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만화 『기생수』로 만나는 몸과 정치

기생수, 타자와 함께 사는 신체



괴물과 함께 살기


여름이다. 한여름이다. 이런 날씨에 딱딱한 글 읽히지도 않을 독자들을 위해서.. 라는 건 핑계고, 글쓰기가 너무 덥다. 그래서 이번 회는 쉬어가는 의미로 만화로 보는 ‘몸과 정치’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이와아키 히토시(岩明均)라는 작가의 『기생수(寄生獸)』라는 작품이다. 워낙 유명한 만화라서 알만한 사람들 알만한 유명한 만화이긴 하지만 처음 제목을 듣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할만 하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감이 왔겠지만 기생충의 기생처럼 기생하는 동물이라서 기생수(寄生獸)이다. 보시다시피 그림체가 보기에 따라서는 워낙 엉성해서(^^) 처음 보는 사람은 쉽게 손이 안가는 만화책이긴 하지만 한 번 빠져들면 몰입감이 장난 아니다. 터미네이터를 만든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영화화 하겠다고 판권을 산 작품이기도 하고, 박찬욱 감독도 자신이 영화화 하고 싶은 만화는 바로 기생수다라고 말했을 정도니.


이와아키 히토시(1960-)의 작품으로는 『기생수』 이외에 『히스토리에』, 단편집 『뼈의 소리』등이 번역되어 있다.


만화는 처음 다음과 같은 대사로 시작한다.


지구에 사는 누군가가 문득 생각했다. 인간의 수가 절반으로  준다면 얼마나 많은 숲이 살아남을까... 인간이 100분이 1로 준다면 쏟아내는 독도 100분의 1이 될까.. 모든 생물의 미래를 지켜야 한다.


-이와아키 히토시, 『기생수』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날 밤, 외계에서 테니스공만한 생물체가 갑자기 지구에 떨어진다. 이 안에서 드릴같이 생긴 것을 단 이상한 벌레 같은 것들이 나온다. 이들은 기생하며 살 수 밖에 없는 기생수로, 본능적으로 근처에 잠자고 있는 인간의 머리 속으로 뚫고 들어간다. 그리고는 숙주의 머리 내부를 먹어치워 머리를 대신한다. 물론 그들의 탄력적인 조직 때문에 인간의 모습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이 기생수에 잡혀먹었다는 것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잔혹한 살인사건들이 벌어진다.

그러나 머리를 차지하는데 실패한 기생수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기생수 역시 주인공의 머리에 침입하려 했으나, 무언가 자기 몸에 들어온다는 이상함을 느껴서 깬 소년이 이 외계생물체가 머리에 도달하는 것을 막는다. 결국 이 외계 생물체는 머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주인공의 오른손을 차지한다. 그래서 이름이 ‘오른쪽이’다.


주인공의 오른손에 기생하게 된 ‘오른쪽이’. 그렇게 시작한 기묘한 동거, 그리고 공-생(共-生)!


이 ‘실패’가 사건을 만들어낸다. 아침에 일어난 주인공은 자신의 오른손이 외계 생물체에 잠식당했다는 것을 알고는 당황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워낙 탄력성이 좋은 이 놈은 다양하게 변화하며 주인공의 공격을 막아낸다. 주인공은 당연히 처음에는 오른쪽이와 같이 살아야 한다는 걸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차츰 그와의 공존을 선택한다. 오른쪽이 역시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다. 주인공이 좋아하는 여자친구 앞에서 망설이는 모습을,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에 대해 비이성적 행동이라 평가한다. 그러나 둘은 어쨌든 공존해야 함을 인정한다. 그렇게 주인공의 몸에 기생수와의 동거 아닌 동거가 시작된다.


너와 나는 협력관계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종이 다른 생명체이다. 각각의 종이 갖는 성질을 되도록 존경하고, 가령 자기 측의 이념을 강요하는 것을 최대한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 후 우리의 공동 목표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해. 그건 우선 ‘살아남는’거야.


–이와아키 히토시, 『기생수』, 오른쪽이 대사 중


그러나 이 둘은 공생을 하면서 서로 변해간다. 인간의 이타성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오른쪽이는 주인공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해가며 주인공을 지켜낸다. 이로 인해 오른쪽이는 자신의 능력을 30퍼센트 잃어 하루 4시간은 잠에 들게 되고, 주인공 역시 초인적인 힘을 얻게 된 반면 성격 역시 다소 난폭하게 변해간다.

이후 사람들의 머리를 차지한 기생수들은 자신들의 번식을 위해 인간들을 공격하고, 오른쪽이와 주인공은 이들을 막기 위한 스텍타클한 싸움을 펼친다. 뒷부분부터는 직접들 보시라~~



집합적 신체로서의 공-생


이 만화가 먼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누가 도대체 기생수인가이다. 오른쪽이는 말한다. “‘악마’라는 것을 책에서 찾아봤는데 그것에 가장 가까운 생물은 역시 인간으로 판단된다” 고. 인간이란 어찌 보면 공존하기에는 최악의 개체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양보 안하고 모든 것을 가지려하는. 기생수들은 말한다. “인간은 거의 모든 종류의 생물을 잡아먹지만 내 ‘동족’들이 먹는 것은 고작 한 두 종류야. 훨씬 간소하지”

그러나 이 만화는 단순히 기생수와 인간의 대결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의 자연파괴 -> 인간의 반성 -> 사랑으로 극복 뭐 이런 진부한 스토리로 끝난다면 이 만화도 그저 그런 만화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이 만화는 한 발 더 나아간다. 기생과 공생, 그리고 더불어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이다.


다들 인간을 얕보고 있군요. 분명 개체단위로 보면 지극히 허약한 동물로 보이죠.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은 인간과 우리의 가장 큰 차이.. 인간이 수십 수백 수만 수십만이 모여 하나의 생물을 이뤄낸다는 거에요.


-이와아키 히토시, 『기생수』


만화에서 기생수를 포함해서 모든 개체는 집합체로 이루어져있다. 기생수끼리 서로 결합도 하고 분해도 하며 하나의 개체를 구성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하나의 집합체로 모여있기도 하고, 그것이 해가 될 때는 분해하기도 한다. 그것이 기생의 원래 의미이다. 사전에서 기생의 의미는 “서로 다른 종류의 생물이 함께 생활하며, 한쪽이 이익을 얻고 다른 쪽이 해를 입고 있는 생활 형태”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한쪽은 이익을 보지만 다른 한 쪽은 해를 입는 관계를 기생이라 하고, 쌍방이 이익을 받는 것을 공생이라 한다.



인간이야말로 지구의 기생충일지도. “인간 한 종의 번영보다 생물 전체를 생각해! 그래야 만물의 영장이다!!”


그런 점에서 넓게 보면 인간 역시 마찬가지로 모두 집합체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이란 유기체도 수십개조 세포들이 만드는 거대한 집합체로서의 신체라는 점에서, 그뿐만 아니라 인간들은 홀로 살아갈 수 없이 집합적 관계들을 구성해나가면서 살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도 인간은 말 그대로 집합적 신체이다.

그러나 우리가 공존, 공생을 말할 때, 이는 단순히 서로 사이좋게 잘 지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한 수동적 관계에서는 사이좋음이 단순히 미덕이나 윤리적 가치로서만 인식될 뿐이다. 그러나 실제 우리가 타인들을 만날 때 느끼는 문제지만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그것은 언제나 나의 안위를 위협하고, 나는 항상 타인과 적이 되거나 친구가 되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한다. 적인 타인에게 대적하고, 친구인 타인을 껴안고.

만화에서 오른쪽이는 인간의 몸에 붙어있지만, 인간과 서로 더불어 살아갈 수 밖에 없음을 인식하고, 그 관계 속에서 인간을 지배하려고 하지도, 인간이 오른쪽이를 자신의 뜻대로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공존이란 그 순간에 일어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함께 관계하며 존재한다는 것은 그 함께함이, 그 우정이 단순히 공존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 앞의 많은 공동체가 더 이상 변화하지 못하는, 하나의 전체로서 고정화된 집합체로 끝나는 경우를 보아왔다.

만화 말미에 가면 오른손이는 고토라는 기생수에 흡수되어버려 개체성을 잃어버린다. 나중에 주인공과 고토와의 싸움에서 다시 오른쪽이가 코토라는 기생수에서 탈출하여 한 대사는 우리에게 이 점을 말해주고 있다.


“몸속에 독이 들어오기 전까지 그놈은 완전한 하나의 생명체였어. 실제로 ‘머리’의 통제력은 대단했지. 다른 기생세포를 순식간에, 그리고 완전히 잠재워 마음대로 조종했으니까. 그러니까 조금 전까지 적이었던 나조차 신체의 일부가 되어 흡수되었던 게지. 그 이후 내 의식은 거의 잠자고 있었어..”


“하지만 그럼 마치 노예생활 같은 거잖아?”


“그게 뜻밖에 아주 편하더라구. 그게 무척이나 기분 좋아서. 이대로 무적의 생물 ‘고토’의 일부가 되어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기까지 했지.”


-이와아키 히토시, 『기생수』 오른쪽이와 주인공의 대화 중


우리가 그냥 전체의 일부로 편하게 살아버릴 때, 우리는 단지 하나의 집합에 속하는 개체로서만 존재한다. 그것이 홉스가 그리던 리바이어던이라는 국가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집합적 신체가 단순히 공존만을 바랄 때, 그것은 진정한 평화일 수 없다. 오히려 평화의 이름을 가장한 노예상태의 안식일뿐.



적대, 공존이라는 또 다른 이름


여기서 우리는 이 기생이라는 것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기생수를 암으로 바꿔 읽어볼 수 있다. 우리가 암이라고 할 때, 이 암세포 역시 우리 몸에 공존하는 세포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공격적으로 숙주의 몸을 잠식하고, 파괴하는 순간 더 이상 공존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과수술로 몸의 종양을 제거하는 것이 건강을 회복하는 길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병을 축출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병은 물리쳐야 하는 ‘악’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병을 타자로 바꿔서 읽어보자. 타자는 누구인가? 무찔러야 할 외재적 대상인가? 슈미트가 정치를 우(友)와 적(敵)의 구분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적을 ‘악’과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 점에 주의하자. 이를 적이란 섬멸해 없애야 할 악이 아니라 나를 일깨우는 존재로, 절대적인 적이란 불가능함이라고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생물의 마음을 아는 체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다. 다른 생물들은 아무것도 인간의 친구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설령 전혀 이해할 수 없어도 존중해야 할 동거인임에는 틀림없다.


슈미트에게 있어 정치를 우적의 구분이라 할 때, 이 때 우와 적은 절대적으로 나뉠 수 없다. 이것은 이념상 논리적으로 구별한 것일 뿐이다. 누가 나에게 적인가, 누가 나에게 우인가? 이는 단순히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친구이면서 적인, 적이면서 친구를 말하는 것일지 모른다.


뒤트만이라는 학자는 이런 슈미트의 적대의 불가능성을 에이즈의 예를 들어 말한다. 생각해보라. 에이즈에 걸린 몸은 적인가, 아니면 나인가? 즉 나는 자기보존을 위해 에이즈에 대해 저항함과 동시에, 에이즈에 대한 이러한 저항은 내가 내 자신에 저항하는 셈이 된다. 이렇게 에이즈라는 병은 자신의 동일성을 깨고 나라는 동일자를 분열 일으키는 존재다.

그렇다면 적이란 자신의 동일성을 분열시키는 것이다. 이 때 내부와 외부는 안과 밖이라는 이름으로 구별될 수 없다. 소위 ‘외부’의 철학을 이야기 할 때, 그것은 안을 긴장시키는 논리라는 차원을 넘어서, 내부와 외부, 자기와 타자, 우와 적 그 자체가 구별불가능함을 말한다. 즉 내부와 외부가 만날 때, 외부는 내부를 일체화, 동일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의 차이들을 불화하게 만드는 것이다. 즉 그동안 의식 못했던 차이들을 생성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 내부와 외부는 구별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타자와 관계를 맺을 때 타인이 자신을 동화시킨다거나 자신이 타인을 동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타자와 관계를 맺을 때 항상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식이 등장하는 것만도 아니다. 타자를 만나면서 내 안에 나도 모르는 속성들이 발현된다. 그런 점에서 사랑이란 어쩌면 공존 혹은 동화의 이름이 아니라 차이를 만들어내는 적의 이름이 더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적의 파악불가능성은 아직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있지만, 적은 의연히, 차안에도 피안에도 속하지 않는 ‘사이’의 장소에서 그 규정불가능한 장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 자신이 내 자신의 적으로서, 내 자신의 차안에도 피안에도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와 타인이 하나라는 것은 나 자신이 내적불화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 나 자신이 면역시스템을 신체의 면역능력 그 자체에 대해 활성화시키는 바이러스가 되고, 그러한 감염의 발단이 되는 것에서도 적대의 효과가 잘 나타난다.


-알렉산더 가르시아 뒤트만, 『우애와 적대: 절대적인 것의 정치학』


여기서 공생한다는 것에서 공존이 아니라 적대를 본다. 함께 신체를 이루며 산다는 것이 공존이 아니라, 자신을 분열시키는 적대를 이루며 산다는 것이다. 랑시에르라면 이를 ‘치안’의 논리와 대비되는 정치로서의 ‘불화’를 이야기했을 것이다. 정치란 이처럼 외부와의 접속 속에서 항상 내부의 불화를 혹은 긴장을 생성시키는 것, 그것이 삶의 정치로서의 모습일 것이다. 반면 죽음의 정치는 항상 외부를 방역하며, 외부와 만날 때조차도 그것을 내부를 일체화하고, 외부 역시도 일체화하려는 모습으로밖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생명이 다할 때까지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간혹 상처가 될지라도.



담담(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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