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국가와 땅의 시대, 병도 '전쟁처럼' 다룬다!

땅의 시대, 법가와 장중경



법가의 시대


앞서 살펴보았던 노자와 황제의 시대가 무위의 시대, 하늘의 시대였다면, 이번에 살펴볼 시대는 국가의 시대, 땅의 시대다. 이제 정치는 더 이상 하늘에 순응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법과 질서, 전쟁과 국가의 이름으로 환원되었다. 그렇다면 이를 땅의 시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등장한 학파가 법가였다. 법(法)이라는 한자어는 원래 군사적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본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군사들이 따랐던 전략적 규칙을 의미했다. 이것이 전국시대에 국가 전체의 법규질서를 포괄하는 뜻으로 확대되었다. 고대 중국철학의 학파 중, 조직화된 행위의 필요성을 강조한 이들을 법가로 칭하는 이유는 이들이 도식적이고, 통제된 상태를 성공적 지배의 새로운 특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는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등장과 함께 자연에 순응하는 무위라는 도(道)를 대신해 법과 규율에 의거한 국가윤리가 요청된 것이다.

물론 법가를 부정적으로만 볼 이유는 없다. 그들은 극도의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통치의 자의성을 제한하기 위해 어떤 규범의 필요성을 주장한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유가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유가가 강제적 규정보다 인이나 예와 같은 윤리를 주장했다면, 이들은 새로운 국가형태에 맞는 법과 규칙을 요청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둘 다 집중화된 국가의 틀이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윤리를 필요로 했다. 유가와 법가 모두 이제 군주를 위한 통치술로서의 모습이 등장하는 것이다.


옛날에 천하를 통제할 수 있었던 사람은 반드시 먼저 자기 백성을 먼저 통제하는 자였으며, 강적을 제압할 수 있었던 사람은 반드시 자기 백성을 먼저 제압하는 자였다. 백성을 제압하는 근본은 백성을 통제하는 데에 있으니, 이것은 마치 대장장이가 쇠붙이를 불려 두들기고 토기장이가 진흙을 주무르는 것과도 같다. 근본이 견고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나는 새나 달리는 짐승과도 같아 누가 그들을 통제할 수 있겠는가? 백성을 제압하는 근본은 ‘법(法)’이다. 그러므로 잘 다스리는 사람은 법으로써 백성을 제약하며, 그렇게 되면 ‘명성과 땅’이 더해지게 된다.


─상앙, 『상군서(商君書)』


최초의 통일제국 진나라, 그것은 막강한 군사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춘추전국 시대의 전쟁과 진나라의 통일 과정은 이를 잘 보여준다.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강력한 국가의 필요성이 요청되었고, 이 속에서 국가는 하나의 단일한 신체, 조직화된 신체가 된다. 국가는 이제 새로운 유기체로서 전체를 위한 각각의 단위를 아우르는 시스템 속에 위치지어진다. 단위들이 통일되고, 도로망들이 연결된다. 이렇게 안으로는 교통과 물자의 순환이, 밖으로는 외부에 대한 방어가 국가유기체의 목표가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경제와 국가유기체라는 모형은 인체를 이해하는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이 과정을 의학사 연구자 파울 운슐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새로운 국가유기체를 통해 중국은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여러 개의 단위로 구성된 유기체가 되는 경험이었으며, 각각의 단위가 전체의 안녕을 위해 복무하는 경험이었다. 모든 단위들은 도로망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 도로 위의 교통이 원활할 때에만, 그리고 사람들이 막힘없이 여행하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물건을 수송할 수 있을 때에만 이러한 국가유기체의 질서가 유지되었다.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경제와 사회유기체가 당시 일부 철학자들의 세계관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였으므로, 이들은 전일체라는 모형을 내면화함과 동시에 이것을 다시 인체를 이해하는 방식에 적용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의학에서의 인체는 국가유기체가 몸에 투사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파울 운슐트, 『의학이란 무엇인가』


인체를 바라보는 방식이 통일국가라는 유기체에 대한 이해가 투사된 것이라는 그의 견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지만, 인체와 국가가 어떤 동일한 틀 속에서 이해되었다는 점은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그런 점에서 치병(治病)과 치국(治國)에서 치(治), 즉 다스림의 논리는 일치했다. 그렇다면 국가주의 시대, 그들에게 질병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했을까? 이를 보기 위해 당시의 시대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이제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군대였다. 바야흐로 전쟁의 시대, 살아남기 위해서는 안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가 등장한다. 기존에 하늘의 시대에서의 논리가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었다면, 이제 안을 지켜야만 했다. 이 시기 의서에서 예방의 가치를 강조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즉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침입에 대비하는 국가-신체를 만들어야 했다. 


수백 년 지속된 전쟁의 시대가 끝난 뒤, 당시 사람들은 전쟁에서 친절한 설득이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전쟁에서 효과적인 단 한 가지 전략은 공격당하기 전에 먼저 파괴시키거나 보복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이었다. 호시탐탐 공격을 노리고 있는 적의 선수를 쳐서 먼저 죽이거나 몰아내는 것이었다. 귀신이나 미생물을 대하는 방식도 이와 같았다. 예방과 치료는 전쟁과 동일하게 준비되었다.


─파울 운슐트, 『의학이란 무엇인가』


전쟁의 효과적인 전략은 몸의 치료에서도 동일하게 활용되었다.



삼국지, 영웅들의 시대 혹은 원수들의 시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의학이 필요했다. 『상한론』의 저자로 알려진 장중경(張仲景, 150-219)이 등장한 것도 대략 이 시기이다.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 이는 소설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삼국지』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 시기 외척과 환관들이 서로 정권을 잡으려 반대파들을 죽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군벌과 지방 세력들은 중원을 제패하기 위한 전쟁을 끊이지 않고 벌렸다. 

이처럼 전란으로 인구는 대폭 감소했고 논밭은 황폐해져만 갔다. 게다가 천재지변이 겹쳐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 들판에 시체가 즐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엎친데 덮친격 역병이 유행했다. 삼국지에 보이는 영웅호걸들이 판을 치는 시대가 독자들에게는 보기에 즐거울지 몰라도, 그 밑에 사는 백성들이 보자면 ‘영웅들의 시대’가 아니라 그야말로 ‘원수들의 시대’였던 것은 아닐까? 왕찬이 칠애시(七哀詩)에서 “문을 열면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백골만 온 들판을 덮고 있구나!”는 묘사는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장중경이 『상한잡병론집』(傷寒卒病論集)의 서문에서 자신이 책을 지은 이유를 설명하며, 마을 사람의 3분의 2가 죽어나갔음을 진술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상황의 심각함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는 전쟁의 시대, 땅의 시대 공간의 변화와도 관련되어 있다. 국가주의 시대에 사람들이 대단위로 몰려 살기 시작하면서 병의 양상이 변한 것이다. 물론 이전까지 국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규모의 도시들이 생겨나면서, 병의 양상 역시 달라진다. 유럽과 중국에서 거의 같은 시기 전염병이 돈 것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상한론』의 시대, 이제 중심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다. 이제 병은 운기 중심이 아닌 병 자체가 중요하게 등장한 것이다. 장중경이 『상한론』을 집필하는 시기는 이런 시대적 변화에 바탕하고 있다. 즉 이 시기 질병은 몸으로서 확인할 수 있는 병증들의 조합을 통해 파악된다. 그리고 치료법은 운기론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신체에 개입한다. 이제 하늘의 시절에 맞게 사는 것만으로 건강을 담보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이를 서양의학적 개념으로 말하자면 ‘생리학에서 병리학으로’의 전환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공격적인 처방도 늘어나게 된다. 상한론에만 113개의 처방이 있을 정도로 많은 탕액들로 의서가 구성된 이유 역시 이 때문이었다.

이제 시간의 관계성을 직접 변화시켜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마황탕과 같은 센 약들이 하나의 우주인 신체에 직접 작용해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자연적으로 인간이 하늘의 때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약으로서 인간을 하늘에 맞추게 된다. 이제 신체 자체가 약을 통해 전변하게 되는 것이다. 『내경』의 체계가 운기에 맞추어 내 신체를 종속시키는 것이었다면 이제 상한론의 시대에는 내 신체 자체가 우주가 되어 버린다. 상고시대가 하늘의 문명이라면, 장중경의 『상한론』의 시대는 땅이 중심이 되기 시작했던 때로, 국가주의가 시작되던 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한나라 이후, 『삼국지』에 등장하는 땅을 빼앗기 위해 치고받고 싸우던 시기! 하늘이라는 시간에 맞춰 사는 시기를 지나 이제 공간적인 문제가 등장한 시기! 바야흐로 땅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의 토, 중초가 강조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초에서 비위는 사회적 인간을 일컫는다. 실제로 ‘비위가 좋다’라고 하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회성을 담보하는 것이 비위의 역할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비위는 사지를 주관하며, 이는 노동의 영역과도 관련된다. 이처럼 국가주의 시대는 손발을 얼마나 부지런히 움직이느냐가 문제의 핵심이 된다. 앞서 살펴본 하늘의 시대에서 간과 신이 하초, 생명성의 문제라면, 이제 국가주의는 비위의 수고로움의 문제가 된다. 이 속에서 상한이라는 전염병이 유행처럼 번져나간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전쟁과 면역론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전염병은 전쟁의 모델을 통해 쉽게 상상된다. 전염병에 걸린다는 말은 외부에서의 병이 침입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 건강은 어떻게 사기(邪氣)를 막을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전쟁에서 처들어오는 적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가 문제가 되었다면 바깥의 풍한의 기운이 어떻게 내 몸에 들어오는 것을 막을 것인가가 문제가 된 것이다.

『상한론』 처방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사기를 몰아내는 것과 정기를 북돋아 주는 것! 이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병은 치료되지 않는다. 사기를 땀으로 토(吐)로, 대변으로 몰아내는 것은 군사주의적 모델과 닮아있다. 당시 전염병이라는 외부로부터의 질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강력한 성벽이라는 정기였다. 그리고 이는 삼국지가 보여주듯 국가주의 시대, 전쟁의 시대 속에서 당연한 요청이었다.

여기서 일전에 언급했던바 있던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논의를 다시 살펴보자. 그는 공동체(communitas)와 면역(immunitas)간에 라틴어 munus가 있음에 주목한다. 여기서 munus라는 말은 임무, 의무, 법, 책무를 의미한다. 또 다른 의미로는 선물로서의 증여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공동체(com-munitas)라는 것은 이 munus를 함께(com)하는 것이고, 면역(im-munitas)은 munus를 제거(im)한 것이다.


면역화란 라틴어의 immunitas에서 파생되어, 그 어의를 확대한 것인데, 이 immunitas는 communitas라는 말과 munas라는 항을 매개해서, 전자는 부정적인, 후자는 긍정적인 관계로 결부되어 있다. 즉, 공동체(communitas)의 구성원이 동일한 법, 동일한 책무나 증여에 구속되어 있다면, 면역(immunitas)은 반대로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면제되었다는 것이다. 즉 타자에 대한 의무를 지지 않고, 그 때문에 스스로 소유자인 주체라는 고유의 실체를 전면적으로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Immunitas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국가주의란 자기면역화의 과정에 다름아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내부를 지키는 동시에, 내부의 갈등을 중화시키는 자기면역화 과정, 즉 외부의 내재화와 내부의 중성화를 목표로 한다. 공동체가 바깥을 향해 열려있다면, 면역화는 바깥을 향해 닫혀있는 자기폐쇄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몸속 세포들은 물론이고, 몸 바깥의 모든 것들은 이제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으로 나뉜다.


물론 면역을 자기폐쇄로만 보는 에스포지토의 논의를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가는 조금 더 생각해 볼 문제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듯 문제가 되는 것은 위험에 대한 강조와 이에 대한 면역 메카니즘의 악순환이다. 우리 시대 자가면역반응질환이 유행인 것 역시 이런 외부와 접촉하지 못하는 지나친 면역 메커니즘의 결과는 아닐까?



밖-갗의 사유     


물론 장중경의 상한론을 단순히 면역모델로 설명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이때의 신체는 내부와 외부를 절대적으로 구별하는 모델이 아니다. 표(表)의 논리는 안과 밖이라는 이분법적 발상이 아니라 오히려 삼(3)의 모델에 가깝다. 그것은 낭시가 말하는 밖-갗의 사유와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밖-갗으로의 노출(expeausition), … 이 같은 공간의 열림, 혹은 이 같은 출발이야말로 몸의 내밀성 그 자체이자 몸이 행하는 자기 절단의(다른 표현을 쓴다면 그것의 변별성이나 개별성의, 나아가 그것의 주체성의) 맨 끝 부분이다. 몸은 그것이 떠난다는 한에서, 바로 여기에서 여기로부터 이탈한다는 점에서, 출발에 듦으로써 자아가 된다. 몸의 내밀성은 순수한 자기 유래성을 이탈해 출발로서 드러낸다.


─장 뤽 낭시, 『코르푸스: 몸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


낭시는 노출이라는 의미의 exposition의 원철자 중 –po-를 대체한 동음어 peau, 즉 표피, 살갗을 의미하는 말을 통해 바깥을 밖-갗, 즉 바깥이자 살갗으로 읽어낸다. 이처럼 그에게 경계란 너와 나, 자기와 타자를 가르는 장애물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경계를 통해 자기가 생겨난다. 그리고 이는 꽉막힌 벽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세포벽에 가깝다. 살갗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이 때 살갗은 단순히 안을 보호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바깥과 소통하고, 교류하며, 멈추지 않는다. 


안-밖, 나-너의 이분법적인 도식 넘어선다는 것은 '경계'를 다시 사유하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우리는 안과 밖, 나와 너라는 이분법적 도식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이런 이분법적 도식을 넘어서는 것이 삼의 사유다. 표(表)와 리(裏)라고 할 때, 여기서 표와 리는 단순히 안과 밖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고정된 방어막이나, 보루가 아니다. 오히려 낭시가 말하는 밖-갗으로서의 살갗이라는 의미에서 구멍뚫린 다공성(多孔性)의 통과하는 창의 의미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히려 전쟁모델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 모른다. 『상한론』에서 말하는 전쟁이란 단순히 면역과 같이 안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안과 밖이 서로 소통하고, 싸우는 모델이다. 그러나 국가주의 시대 이러한 표(表)의 사유는 더욱 단단한 외피로서 기능하게 되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안과 밖의 사유를 넘어, 경계라는 문제를 다시 사유하는 것, 즉 공동체와 면역이라는 문제를 통해 신체와 정치의 문제를 다시 파헤치는 것이 우리에게 남은 과제일지 모른다.


_담담(남산강학원)


의학이란 무엇인가 - 10점
파울 U. 운슐트 지음, 홍세영 옮김/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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