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정치, 그 실천적 장을 위하여
체질론에 대한 오해
이제마 사상의 핵심은 天(機)과 人(事)을 몸(MOM)에서 통합했다는데 있다. 그는 心(太極)과 身(四端)을, 자유(free will)와 필연(necessity)을, 그리고 철학과 과학을 몸(MOM)에서 통합하였다. 이제마는 조선사상사에서 유일한 몸(MOM=人體)의 발견자이다. 이제마는 몸에서 대우주를 발견한 유일무이한 사상가이다. 나의 지식이 미치는 한 전 인류의 사상사에서 이제마와 유사한 체계를 발견키 어렵다.
─도올, 『동의수세보원론』 강론 강의록 중
이제마 하면 흔히 사상의학으로 대표되는 체질론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가 펼친 의학, 아니 그가 펼친 철학은 인간론-사회론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게 의학은 이런 사상을 실천적으로 개입해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즉 몸을 통해 천기와 인사를, 태극과 사단을, 자유와 필연을, 철학과 과학을 통합한 그의 작업을 단순히 체질론으로 정리하는 것은 그의 핵심을 놓쳐버리게 한다.
이는 그의 사상은 13년간 썼던 『격치고』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우리가 잘 아는 『동의수세보원』은 격치고를 완성한 후 1년 만에 완성한 것이었다. 그만큼 『동의수세보원』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역시 『격치고』에서의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격치고』는 의학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인문 철학서다. 그렇다면 그가 13년 동안의 작업 끝에 완성한 『격치고』를 쓴 후 또 다시 붓을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 『격치고』에서 이야기한 그의 사상이 대중들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을까? 그가 살던 당시 성의(誠意)니 정심(正心)이니 하는 개념 자체가 현실의 대중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전혀 다른 나라의 이야기였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내란과 외환으로 살기도 바쁜 와중에 인이니 예니 하는 것들이 어디 쓸데가 있단 말인가. 이런 상황에서 그는 직접적으로 몸에 개입함으로서 현실을 바꿔나가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2002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태양인 이제마> 중 한 장면
게다가 『동의수세보원』은 1장이 성명론, 2장이 사단론으로 의학서 치고는 이상한 구성을 갖고 있다. 그는 몸을 이야기하기 위해 기존의 유학 담론들을 재차 반복한 것이었을까? 아니다. 그에게 의학은 성명(性命) 합일의 삶, 인성이 실현되는 삶을 이야기하는 도구였다. 인성과 관계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직접 몸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인성과 관계가 망가지면 그것만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인체의 생리작용도 망가지고 인체도 병이 들 수 밖에 없었다.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이란 책 제목이 보여주듯, 이 책은 세상살이(壽世)의 근본 지침(保元)을 말하기 위한 것이지, 단순히 체질을 나누어 어떤 체질의 사람에게는 어떤 음식, 어떤 약재가 좋다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그 자신 역시 체질이라는 말조차 쓴 적이 없다. 더욱이 그에게 체질은 임의의 결과일 뿐, 불변적이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다. 각각의 고유한 장점과 단점만 있을 뿐 어떤 우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고심한 것은 삶의 건강성 문제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태양, 태음, 소음, 소양이라는 구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구분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오히려 핵심은 각자는 다른 신체를 가지고 있고, 그 신체성들이 발현하는 관계맺음, 마음씀 역시 다르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유형에 따른 차이를 통해 천기와 신체의 관계를 직접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사상의 핵심이었다.
인간이 품부한 장리에 네 가지 다른 것이 있으니, 폐가 크고 간이 작은 자를 이름하여 ‘태양인’이라 한다. 간이 크고 폐가 작은 자를 이름하여 ‘태음인’이라 한다. 비가 크고 신이 작은 자를 이름하여 ‘소양인’이라 한다. 신이 크고 비가 작은 자를 이름하여 ‘소음인’이라 한다. 인간의 심욕으로 나아가는 데에 있어서 네 가지 다른 것이 있으니 예를 버리고 방종하는 자를 이름하여 ‘비인(鄙人)’이라 한다. 의를 버리고 투일하는 자를 이름하여 ‘나인(懦人)’이라 한다. 지를 버리고 사사로이 꾸며 하는 자를 이름하여 ‘박인(薄人)’이라 한다. 인을 버리고 극욕하는 자를 이름하여 ‘탐인(貪人)’이라 한다. 오장 중에서 마음은 중앙의 태극이다. 오장의 폐비간신은 네 방향의 네 모습이다. 중앙의 태극에 있어서는 성인의 태극이 중인의 태극보다 높게 나타난다. 네 방향의 네 모습에서 있어서는 성인의 사상이 중인의 사상과 공유되는 것이다. 태소음양의 장기의 국면이 길고 짧은 것은 네 가지 다른 네 체질을 얘기했지만 그 속에 크게 같은 것이 있으니 천리의 변화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성인과 중인이 같은 것이다. 그러나 비박탐나(鄙薄貪懦)의 마음의 청탁(心地淸濁)은 네 체질이 다른 중에 또 만 가지로 다르니 인욕이 넓고 좁은 것이다. 여기서는 성인과 중인이 아주 다르다.
─이제마, 『동의수세보원』
여기서 보듯이 그가 태양, 태음, 소양, 소음을 나누는 것은 단순히 체질을 구분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는 사단(四端)인 인의예지를, 천리(天理)의 변화를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이제마가 사람의 외형을 가지고 성정(性情)과 인성(人性)을 이야기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그는 체질에 따라 병을 다스리는 처방이 달라져야 한다는 치병(治病)에 주안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다스리는 치인(治人)에 주목한 것이었다. 태양, 태음, 소양, 소음의 사상은 단순히 체질유형에 따른 분류가 아니라 이처럼 성(性)과 명(命)이 괴리되는 네 가지 유형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의학(醫學)은 바로 리학(理學)에 다름 아니었다. 앞서 최한기가 리 역시 눈으로 볼 수 있고, 증험할 수 있다는 유형지리(有形之理)를 이야기 했다면, 이제마는 리가 사람의 신체에 달려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제마, 사람을 보다
따라서 이제마의 의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거시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황제내경』의 시대가 하늘의 시대, 『상한론』의 시대가 땅의 시대라면 이제마의 의학이 가장 큰 특징은 이제 사람의 시대에 들어섰다는 점이다. 『황제내경』 당시 노자의 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어떻게 하늘이라는 자연에 근접한 형태의 몸을 만드는가가 건강에 핵심이었다. 즉 그것은 간신(肝腎)을 대표로 하는 하초를 중심으로 하는 의학이었다. 그리고 『상한론』 이후에 국가주의 시대, 전쟁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몸은 비위(脾胃)를 대표로 하는 중초 중심으로 돌아간다. 사지를 바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시기로 비위가 건강성을 담보했다.
상초, 중초, 하초의 기준을 그림으로 살펴보자.
그러나 이제마는 이제 하초, 중초가 아니라 상초 중심의 시대라고 평가했다. 그가 사상인을 나누어 설명한 것 역시 이 때문이었다. 그는 기존의 의론을 평가하면서 『상한론』은 대부분 처방이 소음인 처방이며, 금원사대가는 이 소음인 처방을 세련되게 했을 뿐, 상한론에는 태음인 처방 거의 없고, 금원사대가들도 태음인의 반 밖에 못 밝혔으며, 태양인은 아무도 몰랐다고 말한다. 이는 상고, 중고시대가 소인들, 즉 비장과 신장으로 활동한 시대였기 때문에 당연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당시의 시대는 태인들의 시대였다. 태인들이 절반을 넘어섰는데도 태인에 대한 처방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시대가 바뀌면서 사람들의 생리 역시 바뀌었는데도, 아직 의서들이 간신(肝腎)에 매달려 있다는 것.
이는 지금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질병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상고시대에 미학적 몸이 하체가 풍만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남자들마저도 이상하리만큼 가슴에 집착한다. 작은 머리, 넓은 어깨, 풍만한 가슴, 가는 다리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미의 기준은 어쩌면 문명이 상초 중심으로 재편되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가 아닐까? 병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간신의 문제나, 비위의 문제가 건강의 핵심이라기보다 오히려 상초의 문제, 정신의 병이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제 이제마의 시대에 들어서 ‘병’이 중심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 된 것이다. 병이 사람을 중심으로 재배치된다. 물론 그전에도 사람의 개별적인 특징에 따라 처방을 달리 해야 한다는 의론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마의 의학은 그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병을 고치기 위해 직접 사람의 신체에 개입하는 것, 사람에 주목함을 의미한다. 이제마의 의론이 등장하면서 초점은 하늘과 땅이 아닌 사람의 몸에 직접적으로 맞춰진다.
그가 수세의 보원, 즉 삶의 현장을 지키기 위한 근본 지침을 써내려갔던 것도 이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나의 몸을 통해 천리에 직접 개입할 수 있다는 것. 가령 내가 가진 엉덩이가 바로 시비지심의 표현이고, 내가 가진 어깨가 측은지심이라고 하는 이야기다. 이처럼 이제마에게 천리와 인사를 바로잡는 것은 내 몸을 바로 잡음으로서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태음인의 턱은 마땅히 교만한 마음을 경계하여야 할 것이니 태음의 턱에 만약 교만한 마음이 없으면 세상에 뛰어난 주책이 반드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소음인의 가슴은 마땅히 자긍하는 마음을 경계하여야 할 것이니 소음의 가슴에 만약 자긍하는 마음이 없으면 세상에 뛰어난 경륜이 반드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태음인의 배꼽은 마땅히 남을 벌하려는 마음을 경계하여야 할 것이니 태양의 배꼽에 만약 벌심(伐心)이 없으면 세상에 뛰어난 행검(行檢)이 반드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소음인의 배는 마땅히 스스로 과장하려는 과심(夸心)을 경계하여야 할 것이니 소양의 배에 만약 과심(夸心)이 없으면 세상에 뛰어난 도량이 반드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제마, 『동의수세보원』
교만심은 턱에, 자긍심은 가슴에 숨어있고, 벌심은 배꼽에, 과심은 배에 숨어있다. 교만한 이들이 턱을 내세우고, 자긍심이 지나친 이들이 가슴을 내밀고, 자기 과시를 하는 이들이 배를 내미는 것. 이를 경계하지 않으면 세상과 소통할 수 없다.
소음인의 머리는 마땅히 빼앗으려는 마음(奪心)을 경계하여야할 것이니 만약 빼앗으려는 마음이 없으면 대인(大人)의 식견이 반드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태음인의 어깨에는 마땅히 사치하려는 마음(侈心)을 경계하여야 할 것이니 만약 사치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대인의 위의(威儀)가 반드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소양인의 허리에는 마땅히 게으른 마음(懶心)을 경계하여야 할 것이니 만약 게으른 마음이 없으면 대인의 재간이 반드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태양인의 볼기에는 마땅히 도적질하려는 마음(竊心)을 경계하여야 할 것이니 만약 도적질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대인의 방략이 반드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제마, 『동의수세보원』
마찬가지로 빼앗으려는 마음은 잔머리에, 사치심은 어깨에, 게으름은 허리에, 도적질 하려는 마음은 볼기에 숨어있다. 따라서 내가 갖는 마음과 내가 갖는 관계는 나의 신체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세계는 신체와 사물 사이에 있는 것이며, 사회는 나의 신체와 타자의 신체 사이에 있다. 따라서 나의 신체가 바뀌면 세계도 유동한다. 나의 신체가 변하고, 세계와 공명하게 될 때 사회 역시 바뀐다. 이제마의 철학이 위대한 지점은 바로 여기다. 그는 직접 몸을 가지고 관계를 바꾸고,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나의 몸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정치라는 위대한 전환! 신체에 직접 개입함으로서 천리를 확보한다는 사상의 특이성!
사치심은 어깨에 있다?! 이제마 식으로 보면 이 한 장의 그림도 달라 보인다.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시 대답하기
다시 첫 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정치란 무엇인가, 어떤 정치가 좋은 정치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정치(politic)가 폴리스(polis)의 문제, 즉 공공적 삶이란 문제라면, 정치란 관계의 문제다. 즉 나 자신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잘 해나갈 것인가라는 문제다. 이는 결국 잘 살기 위한 문제, 삶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문제라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정치란 단순히 내 삶의 외부에 있는, 그것이 참여라는 이름이 될 때조차도 나의 삶과 분리되어 있었다. 그것은 당위의 영역으로서 참여, 혹은 실천의 문제를 항상 강제하는 것인 동시에 언제나 나의 일상과는 분리된 채 진행되는 무엇이었다. 그러나 나의 몸이, 나의 일상이 바뀌지 않는 한 어떤 사회가 도래해도, 어떤 혁명이 도래해도 또 다른 굴레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몸이야말로 정치가 벌어지는 바로 그 ‘장’이다. 이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같은 자리를 맴돌 뿐이다. 이제마는 이 속에서 몸에 직접 개입한다.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의 신체를 바꾸는 것, 우리의 감각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을 해도 바뀌지 않는 답답한 현실, 그 때문에 지레 포기하거나 체념하게 되는 상황에서 동무 역시 동일한 고민을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활 혹은 삶과 유리된 정치란 없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이야말로 죽음의 정치일 것이다. 모든 삶들은 파편화, 박제화시킨 채 하나의 고정화되고 조직화된 무엇으로 박제화한 죽음의 신체! 삶을 어떻게 영위할 것인가, 지금의 나를 어떤 기쁨의 상태로 만들 것인가, 이 속에서 우리는 어떤 집합적 신체를 이룰 것인가라는 문제는 바로 지금, 여기의 문제다.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 우리가 살아가는 삶, 우리가 의식하고 만들어가고 있는 신체야말로 지극히 정치적이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몸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가장 손쉬우면서도 가장 본질적인 정치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질문이 비정치적이지 않은, 혹은 반정치적이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우리가 몸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이 되기 쉽다. 물론 개인적이라는 말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고립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나쁘다. 정치적으로 올바름이란 어떻게 공공적으로 좋은 삶을 가질 수 있을까를 고립이 아닌 소통, 연대를 통해 해결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를 위한 삶이 어떻게 타인을 위한 삶일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우리가 맺는 관계, 우리가 만들어가는 신체야말로 지극히 정치적이라는 것!
제도와 서비스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것이 정치라는 질곡에서 벗어날 때, 우리의 욕망과 신체가 변화하는 순간, 즉 우리의 신체가 증여의 신체, 소통의 신체. 순환의 신체, 외부와 접속하고 공명하는 신체가 될 때 우리는 죽음의 정치가 우리의 삶을 유린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반자본과 반국가라는 형식적인 구호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그렇게 만들 때, 우리 신체를 반자본적이고 반국가적인 삶을 만들 때, 삶의 정치는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우리의 신체를, 집합적 신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정치가 아닐까.
담담(남산강학원 연구원)
※ <몸과 정치>의 최종편입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탄듯 시공간을 가로지르며, 그리스 시대의 몸과 정치에 관해서도 알아보고, 춘추전국시대에 관해서도 알아보고, 또 지금의 모습까지 보게 된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관계맺고 정치할 것인지~ 스스로의 길을 만들어가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몸과 정치>를 읽으면서 어떠셨는지요? ^^
그동안 <몸과 정치>를 사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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