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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퍼거는 귀여워

[아스퍼거는 귀여워] 감자 팬클럽

by 북드라망 2024. 11. 5.

감자 팬클럽

 

그 날은 평범한 오후였다. 감자가 한 50일쯤이었을까. 분유 냄새가 폴폴 나는 뽀시래기 시절, 남편은 출근하고 나는 감자랑 하루 종일 붙어있으면서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거실 소파 위에 앉아 다리 위에 아이를 끼워놓고는,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배부른 아이는 나른하게 누워있고, 모처럼의 평화로운 분위기. 그때 감자는 내 눈을 정확하게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등줄기부터 짜르르 행복감이 느껴졌다. “아…. 이게 행복이구나” 감자를 낳고 밤낮으로 잠도 못 자고, 회복이 늦어서 제대로 앉지도 서지도 못했던 나날들이었다. 내 배에서 나왔지만, 처음에는 실감이 안 났고, 나중에는 정신이 없었고, 씻지도 먹지도 못해 사랑스러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하지만 그 날 처음 눈이 서로 딱 마주친 그때. 나는 속절없이 사랑에 빠졌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존재라니. 그날부터 감자 입덕기가 시작되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생각한다. “호옥시... 우리 아이가 천재?” 누구나 에겐 판단력을 상실하고, 자신의 아이만 보이는 시절이 있었더랬다. 첫 뒤집기가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다 싶다. 태어나서 한 줌밖에 안 되어 보이는 아이가, 조금씩 자라고, 꼬물거리고, 울고, 웃었다. 그때는 손가락만 쥐었다 펴도 대단해 보인다. 그런 아이가 뒤집기라니!! 혼자서 뒤집다니!! 놀랄 노자가 아닐 수가 없다. “우리가 아이가 뒤집었어요.” 동네방네 플래카드라도 붙이고 싶은 심정.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1~2개월이 뭐라고, 인터넷에는 질문들이 가득하다. ‘6개월이 지났는데…. 우리 아이 왜 뒤집기를 안 할까요’부터 ‘6개월인데 벌써 일어나 앉았어요’까지. 나도 그런 엄마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랬으니 어땠겠어. 이뻐 죽지그래. 지금부터 공식적으로(?) 전 국민 우리 감자 자랑대회를 시작합니다.

 


  

천재의 어린 시절

감자의 어린 시절은 비상했다. 기억력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30개월쯤의 별명이 ‘국기 천재’였는데, 우연히 세계 국기 카드와 만난 후 모조리 외워버렸다. 말이 늦었기 때문에 (거의 원활한 의사소통은 5~6살이 되어서야 가능했던 듯) 엄마, 아빠나 단어 정도로밖에 말을 못했던 거 같은데, 국기 이름은 기깔나게 맞췄다. 나는 어딜 가든 가방 속에 국기 카드를 넣고 다녔는데, 이것만 있으면 천하무적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신기해하는 것도 좋았고, 우리 아이가 똑똑하다는 걸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에 어딜 가서나 국기 지식을 뽐냈다. 감자는 국기 카드를 보고 국기 그림과 음성을 기억했고, 그 음성을 한글과 대입해서 혼자 한글을 깨쳤다.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글을 읽는 걸 보고 어찌나 놀랐는지. 물론 그때까지 핑퐁 대화 (주고받는 대화)는 잘 안 되었다. 보통의 아이들은 말을 배우고 글을 익히는데, 순서가 달랐다.

또 남달랐던 점은, 감자는 뭔가 한 번 좋아하기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라는 점이다. 국기가 그랬고, 나중에는 미세먼지 수치, 키릴 문자, 국제 음성기호 등 뭔가 기호같이 생긴 것들을 좋아했다. 미세먼지에 빠졌을 때는, 매일 미세먼지 수치를 체크하고, 국제 규약(?)의 차이점을 들여다보고, 노래까지 만들어 불렀더랬다. 그러다가 러시아 키릴 문자에 빠진 시절이 있었는데, 그땐 또 천잰 줄 알았더랬지. 러시아 키릴 문자와 우크라이나 문자와 몽골어, 카자흐어 등 그쪽 지방 문자들이 내가 보기엔 다 비슷해 보이는데, 나라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들의 차이와 공통점을 찾아내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다. 



그 실력을 발판으로 영어 발음을 듣는 게 아닌 발음 기호로 배우더라니까. 지금도 발음이 모르겠으면 들어보는 대신 발음 기호를 찾아본다. 나는 도대체 어느 부분이 재미있는지 모르겠으면서도 감자가 몰두하는 것들이 좋았다. 때때로 너무 지긋지긋해지면 다른 쪽으로 관심사를 돌리기 위해서 비슷한 부류의 것들을 던져주었다. 국기에서 키릴 문자로, 세계 지도로, 태양계 도표로, 주기율표로, 취향에 맞을 만한 것들을 보여주었다. 물론 실패하는 게 더 많았지만, 좁은 시야를 조금씩 넓혀주기 위해서 노력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다는 세밀하게 관찰했다. 지금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이걸 어떻게 다음으로 연결할 수 있을지를 말이다. 그렇게 조금씩 넓혀갔는데 이제는 컴퓨터 쪽으로, 우주도 나보다는 훨씬 깊게 들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제시할 수 없는 범위에 들어간 것 같다. 이제는 본인 스스로 위키 백과나 챗 GPT 같은 것들로 관심사를 넓혀가는데, 사실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인터넷상의 정보는 무궁무진하지만, 그것이 다 옳은 것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점이 요즘의 숙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아이가 상위 0.1%?!



아무튼, 그 시절에는 우리 감자가 일론 머스크라도 될 줄 알았다. 아이가 똑똑하다는데 싫어할 부모가 어디 있으랴. 아니 이렇게 똑똑한 아이를 내가 이해하질 못했구나. 아이를 위해 내가 한번 영재 교육을 해보겠다. 마음먹었던 시절도 있었다. 까짓거 뭐 지금까지도 힘들었는데 못할 게 뭐가 있겠냐 싶어서 영재 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거기에서 웩슬러 5판 지능검사를 받았는데, 어머나 세상에! 상위 0.1%의 고도 영재가 나온 것이다. 이 정도일 줄? 그 센터는 영재를 위한 사교육 학원이 아니라, 영재의 어려움을 공감하는 곳이었다. 영재들은 특유의 예민함과 몰입 때문에 사회성이 힘든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아이들이 서로 모여서 모임을 했다. 거기에 주최하는 모임도 나가고, 엄마 교육도 받고, 감자 수업도 듣고 했는데 다 실패했다. 영재 아이들이 사회성이 없다 없다 해도 우리 감자보다 없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큐브를 몇십 초에 맞추고, 체스를 몇 수 앞을 보고, 고등학교 수학 문제를 푼다는 아이들 사이에서 감자는 겉돌았다. 또 그런 스타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성이 없으니,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원활하게 다른 아이들과 나눌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때 반짝였던 영재 사교육 시장으로서의 단꿈(?)은 물건너갔다.

여기서 살펴보는 영재와 아스퍼거의 한 끗 차이. 『영재와 정신건강 오진단과 이중진단』 (J.T. Webb, 학지사) 177p를 보면 영재성과 아스퍼거 장애 간의 유사성을 이렇게 말한다.

 

사건과 사실에 대한 탁월한 기억력
언어 유창성 또는 조숙성
쉴새없이 말하거나 질문하기
자극에 대한 과민감성
공평함과 정의에 대한 관심
비동시성 발달
특정한 관심 분야의 몰두

 

 

이 책에서도 영재 아동과 아스퍼거 장애 아동을 변별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이것의 차이를 사회성의 여부에 두었다.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관심사를 나눌 수 있냐 없냐의 문제인 것이다. 감자는 위의 예로 들었던 모든 특성이 있다. 거기에 ADHD와 틱까지 복합적으로 있어서 더욱더 파악하기 힘든 건 사실이다. 사회성이 없긴 하지만 정말 늦게 지금이나마 조금씩 생기고 있으므로 더욱더 잘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기론 감자의 가장 큰 어려움은 ‘비동시적 발달’인데 국기 천재 시절의 예와 같이 모든 것이 동시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어떤 건 아주 잘하고, 어떤 건 아주 못하는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그러니 좀 이상해 보일 수밖에.

 
엄마는 감자의 영원한 성덕
우리는 왜 어린 시절을 잊어버릴까. 팍팍하게 힘든 날에, 혹은 뭔가를 포기하고 싶을 때 어린 시절 똥만 잘 싸도 박수받던 시절을 기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도 사랑받던 시절을 온전히 기억한다면, 타인을 완전히 믿고 바깥에서 잠들 수 있었던 시절을 기억한다면, 오늘 조금 더 힘을 낼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감자의 첫 번째 팬이다. 뽀얗고 보드라운 볼, 두툼한 귓불, 나랑 똑같이 생긴 (것이 유일할 것 같은) 발이 좋다. 감자랑 특정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도 재미있고, 이제 덩치도 나보다 커져서 무거운 물건을 척척 들어주는 것도 좋다. 이제 사춘기에 들어서서 순간 울컥하고, 쥐어박고 싶은 순간들이 생기긴 해도, 그래도 아직까진 함께 있는 시간이 좋다. 오늘도 내가 가진 사랑을 가득 주기 위해 감자 팬클럽을 클릭한다. ‘사랑해요 김감자, 오늘도 엄마가 잘생겼다고 이야기했나? 오구오구 이쁜 내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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