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우울
이번에는 내 이야기를 써볼까 한다. 조금은 부끄럽고, 지루하며, 우울한 이야기임을 미리 밝힌다. 원래 나는 (믿기 힘들겠지만) 선천적으로 텐션이 낮은 종류의 인간이다. 자주 우울하고, 늘 하는 일에 절망하고, 자신이 없으며, 자신에 대해 의심하며, 반성한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삶의 딜레마는, 나는 굉장히 활달한 류의 인간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생각하는 나 사이의 간극에서 평생동안 의문을 가지며 살아왔다. 어쩌면 나는 슬픔에 취해 사는 나르시시스트인 걸까. 우울한 내가 멋져 보이는 그런 유아적인 발상인 걸까. 그러면서도 또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로 행복해지고 싶기 때문이다. 그저 나는 두 가지 면이 팽팽하게 맞서는, 그래서 늘 초조함에 시달리는 사람인 거겠지. 이런 이상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이유는, 원래도 이렇게 생겨먹은 사람이 어떻게 하면 완전히 무너질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어서이다. 살면서 가끔 정말 가끔이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나. “뭐지. 이건 ‘정말로’ 잘못된 거잖아.”
비행기에서의 공황 장애, 공포와 만나다
‘정말로’ 이상함을 느낀 건 비행기 안에서였다. 발리로 가는 중이었는데, 비행기가 뜨자마자 답답해지더니, 조금 지나자 기체의 작은 움직임에도 비행기가 금방이라도 떨어져서 바다 위로 곤두박질칠 것 같은 공포에 부딪혔다. 몸이 덜덜 떨리고, 식은땀이 줄줄 나며, 배가 꾸륵거리고, 심장이 튀어나오듯 쿵쿵거렸다.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스튜어디스에게 증상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비행기 안에서는 처방받거나 개인이 들고탄 것 이외에 약을 제공할 수 없다고 했고, 레몬을 띄운 차 한 잔을 주었다. 차가 무슨 대수람. 지금 비행기가 떨어지고 있는데. 나는 덜덜 떨면서 자리에 돌아와 쿨쿨 자는 남편과 아이를 보았다. 손이라도 잡아주면 좋을 텐데. 하지만 나는 완전히 공황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이 떨어지는 비행기 안에서 남편과 아이를 깨울 수가 없었다. 잠에서 깨면 이들도 나처럼 무서워하겠지. 비행기가 추락하는데 말이야! 어차피 죽을 거면 잠든 상태로 아무것도 모른 채가 낫지 않겠냐고 생각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인가 싶지만 정말 그랬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모니터 화면으로 영화 ‘히말라야’를 보았다. 화면 가득 황정민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고, 그들이 산을 오르기 위한 고통과 공포를 보았다. 마음이 조금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히말라야를 무수하게 반복해서 틀어놓고 함께 고통을 나누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거 정말 완전히 고장 난 거 같다고.
분명 작은 전조 증상들이 툭툭 삶을 노크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몰랐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 크나큰 시련에 시달리고 있었으니까. 아이를 낳고, 키우고, 재우고, 먹이느라 멘탈이 바사삭거리던 시절이었으니까. 내 의지대로 기초 생활을 못 하던 때였다. 내가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싸고 싶을 때 싸지 못했던 날이 몇 년간 지속되자 나의 뇌는 위험 신호를 보냈다. 자는 것이 인생 최고의 낙이었던 사람이 불면증이 걸리면서, 몇십 번씩 잠에서 깼다. 물론, 그건 전적으로 감자 탓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진 않지만, 사실이 그랬다. 감자는 잠에 예민하고, 잠들기를 너무나도 어려워 했으며, 수도 없이 깼기 때문에 나도 푹 잘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은 (감자의 아빠 같은) 몹시도 둔했기 때문에 아이가 빽빽 울어대도 코를 골면서 잘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귀가 예민한 편이라 작은 소리에도 잘 놀라곤 하는데, 거기에 아이와 모든 신경이 이어져 있다 보니 조금만 앵하고 울어도 바로 잠이 달아나곤 했다.
혼자서 잘해낼 수 있다는 자만심
지금에서야 가장 의문인 점은, 왜 도움을 청하지 않았냐는 거다. 물론 아이가 태어난 곳이 제주도였기 때문에 거리상으로 친정과 시댁, 친구들과 모두 멀리 떨어졌다. 육지로 올라온 후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언제나 남편은 바쁘고, 엄마는 멀리 살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도움을 청했다면 훨씬 나았을 텐데…. 적어도 공황상태까지는 가지 않았을 텐데 불행하게도 그걸 인지할 수 있게 된 건 훨씬 많은 시간이 지나서였다. 나는 그 시절에 알 수 없는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다. 육아는 누구에게나 힘든 거니까. 나 혼자도 잘 해낼 수 있다고. 내 아이는 내가 키우는 거지 남에게 도움받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빠져서 두 입술을 앙다물며 살았다. 나에게 주어진 미션을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그저 누구에게도 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인터넷 맘 카페에 가입해 ‘아이가 몇 살이 되면 편해지나요?’라고 질문했다. 100일만 지나면, 돌만 지나면, 유치원만 가면 언젠가는 편해지는 게 있을 줄 알았다. 그랬으니까 혼자 한번 해보자고 생각했던 거였겠지. 이렇게 끝이 없는 긴 싸움일 줄 알았더라면 그랬을까.
그러니까 혼자서도 잘할 수.. 아니 잘하고 싶다는 마음은 나를 갉아먹었다. 아이 숟가락 하나를 산다고 쳐도 인터넷의 모든 후기를 뒤져서 예쁘면서, 실용적이고, 건강한 성분을 가지면서 우리 아이에게 적합한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몇 날 며칠을 헤맸다. 정말 끔찍한 시절이었다. 그렇게 하루종일 아이를 위한답시고 기저귀며 분유며 그런 것들을 맘 카페에서 찾아 헤맸다. 분유 하나를 사도 해외 직구를 하는 열정을 보였으니 말 다 했지. 아마도 그게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거 같다. 잘 해내고 싶다고, 너무나도 사랑하는,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 감자를 잘 키워보겠다는 마음으로 부들부들 떨던 작은 순간이 쌓이고 쌓여, 와르르 무너졌다.
정신과, 이게 정말 나를 괜찮게 만들 수 있을까.
비행기에서의 공황 이후, 모든 것이 공포로 다가왔다. 엘리베이터는 곧 떨어질 거 같았고, 터널 안에서는 숨을 가쁘게 쉬었으며, 자동차는 나를 치고 달아날 것만 같았다. 나는 아무에게도 자세하게 말하지 못하고, 대신에 정신과를 갔다. 길고 긴 초진지를 받아들고, 아니다. 조금 그렇다, 보통이다, 아주 그렇다 사이를 체크했다. 우울증인 줄 알았는데 불안과 강박이 훨씬 높게 나왔다. 우울증과 불안장애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미국에서 감기약만큼 많이 처방된다는 프로작을 받았다. 나는 평범하게 생긴 초록색 캡슐 약을 보았다. 정신과 약을 먹은 건 처음이었고, 왠지 무서웠다. 이게 정말 나를 괜찮게 만들 수 있을까. 의사 선생님은 자신에게 맞는 약을 먹게 되면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놀랄 거라고 했다. 내 마음속의 행복 기준선이 너무 낮아서 조금만 방심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까.
일 년 반 정도 프로작과 항불안제, 수면유도제를 먹었고 비행기를 타는 등의 특수한 상황에서는 인데놀을 먹었다. 거짓말 같게 정도는 아니었지만, 훨씬 안정을 주었다. 물론 약이 모든 문제를 해결시켜주지 않는다. 하지만 우울이라는 게 불안이라는 게 그렇지 않나. 이성으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알고 있는데 되지 않는 것. 일어나 앉고, 밖에 나가서 걸을 수가 없게 되는 것. 웃으면서도 머릿속이 멍하게 흐려지는 것, 일단 그 허들을 넘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약이다. 정말로 내가 나를 제어할 수 없다면, 정말 절망적이라고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과를 방문해 보시길 추천한다. 일단 생활은 할 수 있게 만들어주니까.
언제나 힘겹게 한 발 나아가기
나는 상태가 나아지자 약을 끊었다. 그리고 조금 기운찬 마음이 되어 마을과 접속했다. 내가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타로와 사주를 배우고, 마을에서 영화제를 함께 만들고, 밥을 같이 먹고, 수다를 떨고, 놀았다. 공부를 시작하고,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다. 정말로 혼자는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작은 인간관계만을 추구하던 나의 삶이 넓어졌다. 그러다 지금은 공동체 안에서 불교를 공부하며 약국일을 하고 있으니, 한 치 앞을 모를 세상 아닌가. 내가 가진 것 중에 조금이라도 좋은 점이 있다면, 언제나 힘들게 한 발 나아간다는 점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지만,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한 발이라도 나아갈 수 있게, 아니 적어도 뒤로 가지는 않도록 노력한다.
그러다 어느 날, 정말 문득 수영장의 비치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생각났다. 아 세월호구나. 세월호였구나.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던 건 아이가 6개월 정도 되던 때였다. 그때 나는 부산인 친정에 내려가 있었는데, 작은 아이를 품에 안고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먹이며 뉴스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저렇게 물 위로 떠 있는데 못 구하리라고. 에이 또 호들갑이다 싶어서 티비만 틀어놓고 건성건성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큰일이 될 줄이야. 그렇게 많은 아이가 죽었을 줄이야. 많은 사람이 그렇듯 나도 몇 날 며칠을 울었다. 그때 생겨난, 소중한 아이를 한순간에 잃을 수도 있다는 마음은 작은 씨앗이 되어서 마음에 자리 잡고, 조금씩 조금씩 자랐다. 그런 거였다. 반평생을 우울과 함께 살았던 나는 죽고 싶었던 적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래도 이만큼 절망한 적은 없었는데 계기가 있었던 거였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나를 만든다. 나의 기쁨을 만들고, 우울을 만들고, 불안도 만든다. 슬픔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다는 집착과 몸의 고단함과 사회적으로 커다란 절망과 공포가 나를 만들었다. 다시 말하면 나의 뭔가가 ‘잘못되어서’ 그런 게 아니다. 그저 예민하고 곤두선 한 인간일 뿐. 그러했을 뿐.
글_모로(문탁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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