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철살인 감자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 에피소드를 먼저 말해볼까 한다. 몇 년 전 진지하게 감자의 대안학교를 알아보러 다니던 때가 있었다. 초등학교 생활을 코로나로 시작해 무려 3년을 제대로 된 상호작용을 하지 못하고 학년이 올라가 버린 감자는, 또래 관계와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나는 고기동에 있는 수지꿈학교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입학설명회를 신청하고 온 가족이 방문했었다. 학교도 둘러보고, 같이 사는(?) 야생 닭도 구경하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나는 이만하면 보내도 되지 않으냐는 생각이 들었고, 전학을 가는 게 어떨지 감자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감자 왈.
“꿈학교를 가도 그렇게 재미있을 거 같지 않고, 손곡초를 그대로 다녀도 재미없을 거 같은데, 그럴 거면 가까운 데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지금 다니는 학교는 걸어서 5분, 꿈학교는 차로 2~30분은 가야 하는 거리. 아…. 맞는 말이다. 너무 맞는 말이라 나는 더 이상의 반박을 하지 못하고 알았노라고 답했다. 감자를 키우면서 이런 상황은 수시로 일어난다. 감자는 때때로 굉장히 직관적이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감자가 언어 천재라고 생각하던, 7살 무렵이었다. 그때는 러시아어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오호라 이런 식이라면 영어를 시작해도 되겠는데? 하고 욕심이 들었다. 학원은 무리일 거 같고, 간단한 시작으로 방문 영어 선생님을 불렀는데 딱 한 번 듣더니 감자 왈.
“엄마, 저는 배워서 하는 영어는 싫어요.”
흠.. 그래. 너는 누가 시키는 건 곧 죽어도 못하는 아이였지? 그 단호한 말에 한 번의 체험 수업 이후로 영어 공부를 덮어두고 있다. 그런데 요즘에 들어서는 이렇게 말하는 거다.
“엄마. 듀오링고(감자가 빠져있는 영어 학습 앱)만으로 영어 공부하기에는 너무 역부족인 거 같은데요? 계속하고는 있는데 실력이 느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으래.. 이제 정말 영어학원에 가볼까? 하는 상황. 쓰읍.
아빠에 대한 일기.. (ㅋㅋㅋㅋ) 학교 일기장에 여러가지 아빠의 미운점(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밥을 안 먹을거라고 하고 먹는다, 화를 잘 낸다)을 가감없이 써서 제출했다. 영원히 박제함.
물론, 지금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한다. 하지만 의사소통에는 크게 문제가 없는데, 이렇게 되기까지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원체 말이 느리기도 했고, 단어와 글을 먼저 익히긴 했지만, 문장으로 이야기하기까지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한국 나이로 5~6살쯤이었나? 어린이집에 가서도 한동안 소통이 안 되었는데, 그때는 반향어라는 걸 했기 때문이다. 반향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까. 이제는 익숙해진 단어지만, 처음에는 정말 낯선 개념이었다. 반향어라는 것은 간단하게 말해 이런 것이다.
“밥 먹었어?”라고 물어보면 “먹었어요, 안 먹었어요.” 혹은 “뭘 먹었다”는 답이 나와야 하는데, “밥 먹었어?”라고 앞사람의 말을 그대로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말을 배우는 과정이겠거니 생각했지만, 갈수록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놀이치료를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는데, 놀이치료라는 것은 한 마디로 아이와 함께 놀면서 여러 가지 부분을 가르쳐 주는 수업이다. 놀이치료실에 들어가면 모래 놀이를 비롯해, 인형이나 자동차, 동물 같은 장난감들이 가득하다. 그 장난감들을 이용해서 일종의 상황극을 하는 건데, 아이에게 지금 문제가 있는 행동들을 연극식으로 하나씩 가르쳐 준다. 처음에 감자는 자기표현을 거의 안 하는 것이 문제였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읽는 수업부터 시작했던거 같다. 마음을 알고 나면 그 말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데, 이때 엄마가 앞서서 감정을 읽어주는 건 좋지 않다. 나 역시 성격 급하고 말 많은 엄마이기 때문에, 감자의 말을 대신해서 해주는 경향이 있었다. 어쩌면 이게 말을 느리게 만든 이유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감자가 말 안 해도 엄마가 다 알아차려 주니까, 그게 또 독이 된 것이다.
좀 열외의 이야기지만, 이 수업을 다니는 데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다. 센터가 있던 고기리는 차를 이용해서 가야 했기 때문에, 운전에 서툰 나는 항상 남편을 동반해서 갔다. 하지만 남편은 도저히 자기 아들의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돈 지랄을 한다고’ 화를 냈다. 멀쩡한 아이를 바보로 만든다고 (늘상 장애 아동의 엄마들이 겪고 있는 주변 가족들의 반대) 화를 냈다. 그래도 나는 꾸역꾸역 2년 정도 수업을 이어나갔다. 당시에는 감자의 주변 사람들이 다들 수줍거나 어려서 혹은 ‘네 아빠도 어릴 땐 그랬다’라는 말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던 때였다. 물론, 그 말이 맞았으면 너무 좋았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은 지금 그 말들은 가끔 상처가 돼서 돌아온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많은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아이들이 언어로 고생한다. 때때로 어떤 아이들은 무발화로 (말을 전혀 하지 못하는 상태)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하는데, 그런 부모들은 정말로 열심히 치료에 임한다.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대화는 살아가는 데 정말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가 없다. 하지만 감자 역시 반향어를 고치고 난 다음에도 조음 문제(말의 높낮이가 급격하고, 혹은 빨라져서 알아들을 수 없는 문제)나 발음의 부정확함을 가지고 있다. 아직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감자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상황에 맞게 목소리 크기를 조절하지 못하는 문제도 있다. 아직도 소곤소곤 말하기는 어렵다. 거기에 더해 엄마와 둘이 붙어있었던 시간이 컸던 터라 살지도 않았던 부산 사투리를 써서 더욱 소통을 어렵게 만들었다. 하.. 이를 어쩌면 좋을까.
그래서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언어치료를 받았다. 친구와의 대화를 이끌어 내거나, 상황에서 적절한 반응을 하는 식의 수업을 했다. 상황 카드 같은 것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했을 때는 적절한 답이 무엇일까. 라는 식의 문제도 많이 냈다. 카드를 보거나 종이로는 잘하는데, 현실에서는 꼭 같은 질문들이 오가지 않으니 또 어려운 문제. 나중에는 말을 글로 표현하는 것도 연습했는데, 언어를 내뱉는 그것뿐만 아니라, 써내는 것도 감자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아직도 계속 연습하고 있지만, 말의 미묘한 숨은 뜻이나 행동 언어들은 잘 알아채지 못하는 거 같다. 계속해서 함께 연습해 가야겠지.
그러나 이런 감자의 특징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가장 좋은 점은 감자는 말 그대로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감자에게 거의 매일 잘생겼다고 이야기하는데 (실제로 잘생겼으니까!! ㅎㅎㅎ) 정말 그것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받아들인다. (엄마가 뭐 나한테 잘못한 일 있나?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건가? 등의 의문을 가지지 않음) 그렇기 때문에 감자에게는 사탕발림이 절대 통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거 다 하고 나면 포카칩을 사 줄게라고 약속 했을 때, 살짝 까먹거나 그냥 지나가려고 했다면, 먹을 때까지 결코 물러섬 없이 반항하는 어린이다. 물론 크면서 유도리가 조금 생기긴 했지만 여전하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둘이 한 약속은 꼭 지키도록 노력한다.
나는 감자 덕분에 숨기거나 모호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정확하게 말하는 법을 배웠다. 내뱉은 말은 최대한 지키도록 노력하기. 아이를 키우면서 배운 소중한 점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빈말이 줄어들었다. 언제 한 번 밥 먹자. 나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면 꼭 먹고 싶다는 것이니 참고할 것! 덕분에 내 언어가 예전보다 훨씬 간결해졌다. 좋은 건 좋다고 이야기하고, 싫은 건 싫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서로 배워가고 있다.
이렇게 할 말이 없게 만드는 감자. 우리 집에서는 기억의 오류가 생기거나 혹은 작은 분쟁이 생겼을 때 무조건 감자의 말을 지지하는 편이다. 감자가 하는 말은 거의 다 맞으니까. 하지만 이런 정확함(?)이 상처가 될 때도 있다. 나는 힘들면 좀 징징거리는 편인데... 저번에 불교학교 2학기 마지막 발표 준비를 하면서도 그랬던 거 같다. 그놈의 ‘극미’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때, 책을 여러 번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감자에게 하소연을 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던 감자는, 발표 전날에 이렇게 물어보는 거다.
“엄마, 내일 발표가 성공할 확률이 몇 프로 정도 되는 거 같아요?”
“한.. 8-90% 정도?”
“그 정도로 공부해서 그렇게 성공 확률이 높다고요?”
감자는 내가 징징거리는 모습만 봐서 거의 망했다고 생각하고 있던 거였다. “아니야 그래도 엄마 열심히 읽어서 아는 만큼만 발표하면 돼. 여기는 망하고 말고의 일이 없어”라고 이야기하니까 분명히 썩소를 지은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그리곤 조용히 덧붙인다.
“엄마는 나랑 아빠보다 머리가 좀 떨어지니까.”
엉엉 그렇게까지 팩폭을 날릴 거는 없잖아. 그렇게까지 솔직하지 않아도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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