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철학에 죽고, 철학에 산다! 질문의 질문을 하라!

철학의 엄밀함



컴퓨터에 악성프로그램이 많아지면, 뒤죽박죽된 프로그램들을 수습하느라 하루 종일 곤욕이다. 그러다 도저히 해결될 기미가 안보이면 세상이 원래부터 없기라도 했던 것처럼 덮어놓고 초기화하곤 한다. 그러면 밤새 푹 자고 일어난 강아지처럼 컴퓨터에 아연 생기가 돈다. 이런걸 보면 초기화한다는 말, 그러니까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린다는 것은 그만큼 뭔가를 생기롭게 만든다는 걸 뜻하는 것 같다.

하지만 처음으로 가겠다는 열망은 컴퓨터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아주 가끔은 인생에도 이런 초기화가 있었으면 하는 때가 있다. 특히 병, 배신 혹은 다툼 같은 것들이 예기치 않게 찾아오면, 세상 모든 것이 그 사건에 비추어 보이는지라, 악성프로그램으로 가득한 컴퓨터마냥 인생이 한동안 뒤죽박죽이다. 사건에 대한 격한 감정이 일상생활에 투사되어, 그 일상이 깨끗하기를 바라면 바랄수록 더욱 극렬하게 현재의 생활을 질타하게 된다. 일순간 관념론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인생에도 과연 초기화가 가능할까?   


영화 「박하사탕」의 초반부, 주인공은 절규한다! "나 다시 돌아갈래!!"



‘자연’ : 대상의 발견



에드문트 후설(1859~1938)

독일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은 유언으로 “철학자로 살아왔고 철학자로 죽고 싶다”고 하였다. 그만큼 후설에게 철학은 자신의 삶과도 같은 것이었다. 전언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유언 그대로, 진지한 초심자의 자세로 끊임없이 자기비판을 수행했던 말 그대로 ‘철학자’ 자체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그도 말년에 이르러서, 자신을 철학의 초보자로 여기면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ab ovo) 다시 시작하려는 열망을 가졌다(피에르 테브나즈,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그도 자기 생의 초기화를 열망했던 것일까?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평생을 자기 시대의 철학이 좀 더 엄밀하기를 열망하면서, 좀 색다른 ‘초기화’를 시도하였다.

그것은 자연과학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한다. 자연과학은 ‘자연’(Natur)이라는 독특한 대상을 발견한 결과로 수립된 학문이다. 여기서 ‘자연’이란 어떤 정밀한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존재들의 통일체라고 볼 수 있겠다. 세상의 갖가지 ‘것’들을 사물로서 바라볼 때, 비로소 그것들은 자연과학의 대상으로서 ‘자연’이 ‘된다’. 아무런 의미 없이 흩어져 있는 ‘것’들은 ‘자연’이 아니다. 당초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던 ‘것’들이 법칙에 따라 움직일 것으로 여겨질 때, 바로 그 순간 ‘자연’이 되고, 비로소 자연과학의 대상으로 정립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자연화’ 혹은 ‘사물화’라고 말한다. 만일 이렇게 자연화하지 못하는 대상들이라면 그것은 탐구할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꿈의 세계는 심리학이 하나의 사물로서 탐구하기 전까지는 과학의 승인된 대상이 아니었다. 무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관찰하고 나면 법칙으로 구성할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사물로서’ 정립하는 것이야말로 과학의 중대한 관건이다. 과학으로서 성립할 수 있으려면 이렇게 대상으로서 ‘바로’ 서야만 했던 것이다.

이렇게 세워진 대상에 대해서 자연과학은 그것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찰하고, 그 관찰을 토대로 자료를 뽑아내 체계화함으로써 어떤 정밀한 법칙으로 만들어내는 것을 1차적인 목표로 한다. 그런데 문제는 자연과학이라는 특수한 학문에서만 이 ‘자연’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이른바 ‘자연계열’ 학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인문계열’의 거의 모든 학문들도 이런 방식을 추종하여 구성된 학문들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역사학은 역사라는 통일체를 ‘자연화’하여 탐구하는 것이고, 사회학은 사회를, 언어학은 언어를, 심지어 심리학은 정신을 대상으로 그것을 자연화(사물화)하여 살핀다.

어쩌면 이런 학문들이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모두 예외 없이 ‘자연주의자’라고 해야 옳을 듯하다. 그래서 우리시대의 일반적인 통념들은 경험을 넘어선 생각과 말들은 경험에 의해서 반박되거나 확증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반박되어지지도, 확증되어지지도 않는 주장들은 무의미하다고 비웃는다. 예컨대 ‘나는 어젯밤 달나라에 이불을 타고 다녀왔다’는 어떤 사람의 주장은 ‘갔다 왔다’는 어떤 흔적이나, 제3자에 의해 재현된 어떤 실험으로서 듣는 사람이 경험해 볼 수 없기 때문에 확증되어질 수 없다. 그렇다고 그런 주장이 틀렸다고 완전히 반박하기도 힘들다. 왜냐하면 경험적으로야 힘들 수 있어도 경험 이외의 형태로 갔다 왔을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는 떠나서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개 학문으로서 탐구해야 할 대상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경험적인 것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경험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탐구할 수 있으며, 또 설사 탐구하였다손 치더라도 어떻게 그것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의미에서 인문계열의 학문들도 반박할 수 있고, 확증할 수 있도록 주어진 대상들을 모두 사물로 만들어서 누구든지 경험하게 ─ 아니면 추후에라도 현실에서 ‘검증’할 수 있게 ─ 만들어 놓는다. 후설 말대로 이 학문 앞에서는 “모든 존재자가 [심리적인 것조차도-인용자] 심리-물리적 자연이고, 이것은 확고한 자연법칙성에 따라 일의적으로 규정된다.”(후설,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


‘사물’ : 불충분하고 불순한 대상


그러나 이 사물이라는 놈을 좀 더 생각해보자.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물이 진짜로 있기는 한가? 이건 참 이상한 일이다. 어떻게 우리들의 의식이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을 넘어서서 ‘초월’해 있는 저 ‘사물’에 관계할 수 있는 것일까?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 단순한 일에 복잡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산에 올라가 단순히 단풍나무를 보더라도 그렇다. 동일한 단풍나무를 지각하고 있더라도 그 모양은 계속 바뀐다. 보는 각도, 보는 사람의 생각 같은 것들에 따라 그 보이는 모양이 아주 다양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물을 언제나 특정한 측면만을 지각한다. 이 말은 사물을 지각할 때마다, 사물의 특정한 측면만을 현실적인 지각으로 가져오고, 나머지 많은 측면은 미규정 ― 단풍나무의 뒷면은 구부러졌다라고 확증할 수는 없는 ‘아마도’의 상태 ― 인 채로 남겨진다는 말이다. 이렇게 미규정인 채로 남겨진 부분은 장래의 지각 경험에 내맡겨진다.


다시 말하면 미래에 다른 각도로 보고, 다른 생각으로 보았을 때 그것들은 비로소 규정―“아하! 이제 보니 단풍나무의 뒷면은 반듯하구나!”―될 것이라는 말이다. 결국 어떤 한 순간의 ‘사물지각’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지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사태를 후설은 사물이 ‘음영한다’고 표현했다. 사물은 항상 전체적으로 미규정인 상태이고, 따라서 그것은 끊임없이 불충분하게 다가온다. 따라서 그것들은 새로운 경험으로 확인되거나 수정될 수 있으므로 ‘필증적’인 것이 아니다. 즉 달리 있을 수 없게 주어진 것으로 확정적인 것이 아니다. 항상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모네, <루앙성당 연작>


그러나 보이는 모양이 다양하다고 하더라도 단풍나무 그 자체는 동일한 색깔, 동일한 형태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즉 ‘대상’으로서 현출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어떤 ‘사물’을 모상이 아닌 사물 그 자체로서 지각하고는 있는 셈이다. 바로 여기에 이상한 점이 발생한다. 아니, 보이는 부분, 즉 지각된 부분은 특정한 측면뿐인데, 어떻게 우리는 전체를 알게 될까? 우리는 신기하게도 단풍나무 전후좌우의 모습을 모호하고 애매한 형태로나마 그려낼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사실은 우리가 어떤 ‘것’(물체)을 사물로서 지각할 때, 보이는 특정 측면만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되어지는 것과는 다른 어떤 상(像)을 함께 그리고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즉 자연화된 것들은 보이는 특정 측면 뿐 아니라 언제나 이미 다른 ‘선입견’이 딸려온다. 자연화된 것들은 언제나 이미 선입견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그게 옳든 그르든 말이다.
 
따라서 이런 사물 자체의 특성으로 볼 때, 우리들이 갖고 있는 많은 생각들이 대개 특정한 선험적(a priori)인 원리를 부지불식간에 전제하고 그로부터 연역적으로 체계를 구축하는 ‘위로부터’의 생각일 때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후설은 우리가 경험한 것들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 경험이 아무런 선험 원리 없이 이루어진 순수한 경험인지 의심해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풍나무의 전경을 아무 반성 없이 전제하고서 해당 측면들을 지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는 말이다. 이 전경은 대체 어디서 왔단 말인가? 이미 나는 단풍나무의 전경이라는 선입견을 전제하고 단풍나무를 구성하고 있는 셈일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사태들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혹시 우리가 알기조차 힘든 어떤 전제들로 둘러싸여서 그 사태들을 바라보고 그릇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를 넘어서서 존재한다고 하는 ‘자연’은 이미 발견되어질 때부터 불충분하면서 또한 불순한 대상이다. 결국 사물은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는, 아주 애매모호한 대상인 것이다.


‘사태 자체로!’ : 대상의 혁명


이런 상황에서 엄밀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대체 어떻게 생각한다는 것일까? 사실 후설에 따르면 철학이야말로 엄밀하게 사고하려는 요구로 출발되었던 학문이었다. 하지만 후설은 그 어떤 시기에도 그 요구를 충족시켰던 적은 없었다고 단언한다. 그것은 앞서 말했던 자연주의자들의 태도가 지니고 있는 불완전성 그리고 불순성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루어진 사태일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과학은 언제나 이미 사태 자체를 해석하는 고유의 체계를 가진 채, 다시 말하면 어떤 것들을 사물화하고 경험적인 대상으로 세우려는 순간 이미 어떤 해석체계에 따라서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 경험 일반의 가능성과 조건을 추적해 묻지 않지 않는 한 그것들이 ‘엄밀하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연화 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2차적이다. 더군다나 경험적인 대상 그 자체가 미규정 된 채로 애매모호하게 세워져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언제나 이미 한정된 가능성을 품고서 경험되고 구성된 특정한 실증지식이지, 엄밀한 사유의 결과는 아니라고 봐야한다. 후설은 과학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과학이 이미 어떤 가능성의 조건 아래에서 경험된 세계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인식론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후설의 의미에서 ‘엄밀성'(streng)은 이른바 물리학이나 화학 같은 실증적 자연과학이 추구하는 ‘정밀성’(exakt)이나 ‘논리적 정합성’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후설은 오히려 ‘엄밀성’의 관점에서라면 자연과학이야말로 편견에 찬 학문이라고 지적한다.


… 편견들은 [우리를] 맹목적으로 만들며, 그래서 오직 경험 사태들만 보고 경험과학만을 진정으로 타당하다고 승인하는 사람들은 자연의 사실들에 대립된 모순들로서 경험 속에 입증될 수 없는 배리적 결과들에 의해 크게 혼란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자연주의자들, 과학자들]는 이것을 ‘스콜라적 사변’으로 간주해 제쳐놓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들에 입각한 논증은 또한 다른 측면, 즉 이와 같은 강력한 논증의 힘에 감응하기 쉬운 사람들에게 잘못된 영향력을 아주 손쉽게 행사한다. 철학을 엄밀한 학문의 토대 위에 세우고 엄밀한 학문‘으로’ 형성하고자 했던 자연주의가 완전히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실로 그 방법적 목표 역시 믿을 수 없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실증과학만을 엄밀한 학문으로, 또 오직 이와 같은 과학 위에 기초하는 것만을 학문적 철학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경향이 이러한 측면으로 더욱더 확장될수록 철학을 엄밀한 학문으로 형성하려는 방법적 목표 자체도 더욱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에드문트 후설,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


과학은 언제나 경험 사태들만을 가지고, 오로지 그것만이 타당하다고 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어떤 것들’을 자연화(사물화)한다. 그런 다음 그 사물에 대해 지각한 특정 측면들을 가지고 결코 필증적이지 않은 법칙들을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틀렸다거나, 맞다거나 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이 인식의 어떤 조건 내에서만 가능한 지식인데도, 그 조건은 은폐된 채로, 혹은 반성 없이 부지불식간에 받아들이고서, 생산된 지식이라는 점이다. 혹시라도 ‘자연’―사실 이것조차 발견되고 구성된 것이었다―과는 다른 본성을 지니고 있는 대상이 있기라도 하다면, 이런 자연과학적 방식, 모든 것을 사물화 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그릇된 결론에 도달하기 십상일 것이다. 즉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전제하고 있던 실증지식으로 빠져버리고 또다시 그것의 가능 조건들을 밝혀내지 않은 채 생산된 지식을 수용해버리는 악순환 속에 내던져진다. 주스를 먹을 때 빨대로 먹었다고, 밥을 먹을 때도 빨대로 먹으려고 시도하고서, 밥알의 맛을 알아내려고 하는 것과 같다.
 

관념적인, 너무나 관념적인!

그래서 후설은 자연주의자들이야말로 관념론자(Idealist)(에드문트 후설,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라고 조롱했다. 자연주의자들은 처음엔 필증적 명증성, 즉 달리 있을 수 없게 되도록 할 확증적인 것을 찾겠다고 출발했으면서, 경험적인 것만을 대상으로 내세우고 결과적으로 특정 측면만 규정될 뿐인, 여전히 필증되지 않는 결과물만 제출한다. 애초에 출발할 때의 주장과 끝날 때의 주장이 다르면서도 그것만을 타당하다고 고집하는 셈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강력한 논증의 힘에 쉽게 감응되어 버린다. 어쩌면 자연과학이야말로 최면술에 가장 능한 마술인지도 모르겠다.
 
바로 이 순간이 후설의 그 유명한 테제, ‘사태 자체로!’가 탄생하는 지점이다. 후설에 따르면 경험에 주어진 것, 즉 경험하고 있는 것은 그것들에 부여한 ‘의미’에 의존해서 이른바 ‘객관적’이 된다. 그런데 자연주의자들에게는 출발점에서 공간적 시간적 물체세계만 정확한 의미에서 유일한 ‘자연’이다. 그래서 자연과학은 사물 자체가 경험된 것으로 존재한다고 소위 스스로 일컫는 것의 ‘의미’만을 일관되게 추구한다.


따라서 한정된 가능성으로서의 어떤 의미에 구속되지 않은 어떤 것을, 다시 말하면 ‘자연’ 아닌 어떤 것, 더 엄밀하게 말하면 물체들을 자연이라는 사물들로 세우게 했던 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통찰하는 방식으로 사유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경험된 것만 존재한다’고 하는 편견을 배제하고 바라본 어떤 것 그 자체를 필요로 한다는 말이 된다. 기존틀로 해석되지 않는 바로 그것,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바로 그것! 그것은 바로 현상(Phänomen)이지 자연(Natur)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표상도 상상도 환상도 아니다. 표상이나 상상이나 환상마저도 이미 해석되어서야만 떠오르는 것들이므로 언제나 이미 주어진 의미 속에서 구성되어진 것들일 것이다. 그것들조차도 어떤 의미에서 자연과학적 의미에서 이해되어 나타난 자연화된 사물들일지 모른다.
 
따라서 후설은 이런 편견에 차고, 통념적인 경험과 판단으로부터 등을 돌려 ‘현상 그 자체로’ 되돌아가야(환원)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사태 자체로!’란 테제는 일체의 선입견을 배제한 진짜배기 ‘경험’[본원적인 경험]에로 돌아가 거기서 드러나는 ‘현상’의 본질을 정직하게 직관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의미에 대한 의식, 즉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 그 자체에 대한 탐구로 들어가는 것이다. 저것은 어떻게 이렇게 표상되었을까? 이것은 왜 저렇게 상상되지 않고 이렇게 상상되었을까? 아니 왜 나는 저것을 그런 모양으로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어떻게 이런 관점에서 나는 저것이 움직일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등등. 이런 본원적인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물음’은 무한히 생성된다. 이 물음들은 과학적 물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과학적 물음에 대한 물음’이다.


르네 마그리트, <자유의 문턱에서>


그런 의미에서 현상학은 끝까지 올라가서 추적해보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대상들은 자연과학적 유혹을 제쳐두고, 또한 상대주의의 무력함을 넘어서, 철저한 정초를 갖는 필증적 명증성의 영역으로 엄밀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후설은 현상학을 철학의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는 더 나아가서 현상학을 본질적으로 첫걸음을 내딛는 철학이라는 의미와 정초하는 철학이라는 이중적 의미에서 ‘제일철학’이라고 확언하였다. 사유가 통념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라면 그 확언은 정당한 것 같다. 세계의 모든 것을 괄호치고, 그 세계가 가능했던 전제들을 깨면서 거슬러 올라가는 것. 나는 바로 그 엄밀함의 순간들이 철학의 초기화이고, 인생의 초기화인 것 같다.



_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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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나무 2013.05.02 18:21 답글 | 수정/삭제 | ADDR

    르네 마그리트의 <자유의 문턱에서>를 검색하다가 들르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후설에 관한 내용이어서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재밌어서 끝까지 읽었네요. ^^
    감사합니다.

    • 북드라망 2013.05.03 09:12 신고 수정/삭제

      반갑습니다~ ^^
      마그리트 그림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네요! (막 이럼;;)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너무 좋습니다~ 철학관의 다른 글들도 강력하게 추천드려요! 하하~ 자주 뵈어요!

    • 약선생 2013.05.03 13:34 수정/삭제

      와~ 마그리트를 거쳐서, 후설에 불시착(?)하셨군요. 의도하지 않으셨더라도 재미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어쩌면 불시착이야말로 새로운 인연과 길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다음에도 꼭 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