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길이 끝난 곳에서 운명은 시작되고

길이 끝난 곳에서 운명은 시작되고


우리는 대개 자신들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낀다. 물론 어느 누군들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겠는가. 우선 나부터도 회사에 앉아 보고서를 읽노라면, 불현듯 알 수 없는 서글픔에 빠지곤 한다. 내가 무언가에, 예컨대 가족이나 명예 같은 것에 얽매여 있기라도 한걸까? 글쎄, 여기에 이르면 그게 딱히 불분명해진다. 가족만 동의하면 당장 회사를 그만둘 수 있냐는 질문에는 바로 대답하기 쉽지 않고, 명예로우면 얼마나 명예롭겠냐며 그 알량한 직함이걸랑 당장 내던지라는 말에는, 어찌 반응해야할지 곤혹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딱히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그러니까 가족이든 명예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박차고 나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마저 선뜻 감행하지 못한다. 결국 자유로워도 교육이나 노후문제가 발생할까 두려운 나머지 연애편지 써 보내듯 사표 제출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아마도 내 안에 감춰진 어떤 공포심이 자주 그런 자유들을 그르쳤을지 모르겠다. 결국 우리는 가족이나 회사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고, 그게 문제없어도 그 문제가 발생할까 두려워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통념에만 따른다면 우리들은 분명 자유롭지 않으려고 사는 사람들임이 틀림없다. 통념이 일러주는 자유가 있기는 한걸까?



우리에게 자유는 없다


카프카의 「학술원에의 보고」(이하 「학술원」)는 바로 이 문제에 민감하다. 한 원숭이가 물 먹으러 갔다가 총알 두 방을 맞고 정신을 잃는다. 원숭이 페터가 깨난 곳은 어느 증기선 갑판 위 우리. 이 상황은 도무지 이유도 알 수 없고, 느닷없이 벌어진 상황이다. 유기체라면 그 무엇이든 떨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 페터도 “일어서기에는 너무 낮고, 주저앉기에는 너무 좁은” 쇠창살 안에서, 처음에는 떨기만 할뿐 아무도 보고 싶지 않고, 어둠 속에만 있고 싶다. 페터는 자연스럽게도 쇠창살 자체를 마주보지 못하고 궤짝 쪽으로 돌아앉는다. 카프카는 이 장면에서 “그러노라면 등에서는 쇠창살들이 살로 파고들어 왔다”는 한 문장을 잔인하게 집어넣고 있다. 자신이 잡혀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아니면 그런 사실을 의도적으로 안 보려고 궤짝 쪽으로 돌아앉았지만, 보다시피 그것은 극도로 관념적인 행위일 뿐이다. 원숭이 페터는 잡혔다! 그러나 페터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물론 ‘도망갈 구멍’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도 궁지에 몰렸을 때, 행운들이 얼마나 달콤하게 찾아오던가. 이 원숭이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 널빤지 사이 틈바구니를 보고는 기쁨에 넘쳐 울부짖는다. 하지만 이내 그 틈바구니가 꼬리를 들이밀기에도 너무 좁은 것이고, 있는 힘을 다해도 넓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행운은 애초에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쇠창살을 외면하고 뒤돌아서지도 않고, 행여 행운이라도 있을까 틈바구니에 기대 거는 것도 멈춘 이 지점에서 원숭이가 하기 시작한 행위는 그야말로 원숭이로서 할 수 있는 ‘온갖 짓들’이다. 소리 죽여 흐느끼기, 고통스러운 벼룩 수색, 야자 하나를 지치도록 핥기, 머리로 궤짝벽을 짓찧기, 누가 가까이 오면 혀 내밀기……그러나 원숭이는 비로소 생각한다. “온갖 짓을 다 해봐도 출구는 없다는 그 한 가지 느낌뿐이었습니다.”
 
원숭이는 바로 이 지점에 와서야 자신이 막다른 골목에 왔다는 것을 인정한다. 똑바로 알아 들어, 너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거야. 너는 죽느냐 사느냐, 아니, 이렇게 죽느냐, 저렇게 죽느냐는 상황에 처한 거란 말이야! 알기나 해? 이런 상황은 「작은 우화」라는 카프카의 또 다른 단편소설을 연상시킨다.


“아!” 쥐가 말했다. “세상이 날마다 좁아지는구나. 처음에는 하도 넓어서 겁이 났는데, 자꾸 달리다 보니 드디어 좌우로 멀리에서 벽이 보여 행복했었다. 그러나 이 긴 벽들이 어찌나 빨리 양쪽에서 좁혀드는지 나는 어느새 마지막 방에 와 있고, 저기 저 구석에는 덫이 있어, 내가 그리로 달려 들어가고 있다” - “너는 달리는 방향만 바꾸면 돼”하며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었다.


─프란츠 카프카, 「작은 우화」


나는 쥐의 처지, 원숭이의 처지가 바로 우리들이 아닌가 싶다. 우리들은 잡혔다. 그게 너에게는 느닷없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잡혔어. 이리 가고, 저리 가봐야 소용없어! 아마 잘해야 덫에 걸리거나, 고양이에게 먹히겠지. 꼼짝 말아! 사실 우리는 우리가 선 자리가 ‘언제나 이미’ 막다른 골목이었다는 것을 ‘항상’ 모른다. 그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언제나 무지했던 것이다. 어쩌면 이게 카프카의 핵심일지 모른다. ‘언제나 이미’ 막다른 골목에 있는데도 어떤 통념들 때문에 다른 선택들과 자유들이 있는 양 착각하는 무지 말이다.
 
그럼 카프카는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을 하자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우리와 페터의 차이에 아주 민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냉철한 동물은 자신을 못질해 박아놓았다 하더라도 지금의 자기가 더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못질해 놓든, 쇠창살에 가둬두든 자유의 정도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유에는 농도가 없는 것이다. 자유가 자유이려면 그건 절대적이어야 한다. 그런 시선에서라면 그만큼 우리가 말하는 ‘자유’라는 것이 기만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말하는 그런 구속에서 조금 벗어난다고 크게 나아질 것도 없는 것을 자유라고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여기에 이르면 원숭이는 도망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또한 알게 된다. 원숭이는 문자물쇠를 자신의 이빨로 깨물어서 부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깨물어 부순들 머리를 내밀자마자 사람들에게 다시 사로잡혀서 더 고약한 우리에 갇히게 되거나, 행여 운 좋게 갑판 위까지 올라간다 하더라도 잠깐의 성취에 취했다가, 결국 물에 빠져 죽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모든 곳이 겹겹이 갇혀 있다는 것을 완벽히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래봐야 덫에 걸리거나, 고양이에게 먹히거나 한다는 것을.
 
원숭이 페터도 우리들의 딜레마를 충분히 알고 있다. 질곡이라고 여겨지는 쇠창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자유라고 착각할 수는 있다. 그래서 우리 같으면 대개 이 구속의 원인을 추적하려고 한다. 왜 ‘나에게’ ‘이런 구속’이 떨어졌을까? 그러나 이 냉철한 동물 페터는 이 질문에 분명히 답한다. “왜 그럴까? 발가락 사이의 살을 긁어보아라, 그 이유를 찾지는 못할 거다. 등을 쇠창살에 대고, 그게 너를 두 쪽 낼 지경까지 눌러보아라, 너는 그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찾아봐라, 당신이 잡힌 이유를. 아무 이유가 없어. 그냥 잡힌거야!! 우리는 있지도 않은 답을 강구하느라 있지도 않은 자유를 기만적으로 끌고 온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하면 쇠창살을 구속으로 보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선으로 그 구속의 원인을 찾아내려는 무의미한 노력을 했을 때 고안한 단어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페터에게도, 우리에게도 자유란 없다.


레메디오스 바로, <테이블 위의 눈>



우리에게 출구는 저곳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몸부림쳤지만 더 이상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지점, 쇠창살 하나쯤은 깨부수고 나갈 수 있겠지만, 나가봐야 덫에 걸리거나 고양이에게 먹힐 뿐인 지점, 그러니까 이렇게 죽거나 저렇게 죽거나 하는 수밖에 없을 지점, 그래서 어떤 유용한 가치도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지점. 자유도 기만이 되는 지점. 이 순간에 원숭이 페터는 말한다.


자유는 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의 출구를 오른쪽, 왼쪽, 그 어디로든 간에, 저는 다른 요구는 하지 않았습니다. 출구 또한 비록 하나의 착각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요구는 작았습니다. 착각이 더 크지는 않을 테지요. 계속 나아가자, 계속 나아가자! 궤짝벽에 몸을 눌러 붙인 채 팔을 쳐들고 가만히 서 있지만은 말아야지.


─프란츠 카프카, 「학술원에의 보고」 강조는 인용자


고백컨대, 나는 페터의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저 ‘출구’라는 단어를 ‘운명’으로 바꾸어 읽고 싶었다. 페터는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 다만 단 하나의 운명을 원한다! 기묘하지 않은가? 출구가 없어서 막다른 골목인데, 그 골목에서 도로 출구를 찾고 있으니 말이다. 이럴진대 그 출구가 운명이 아니면 뭐겠는가? 페터가 도발적으로 내놓는 해답은 그야말로 ‘운명을 향한 욕망’이다. 페터에게 출구를 찾는 것은 운명을 찾는 것과 같은 일인 셈이다. 그게 혹시 착각으로 판명 날지라도, 그 착각이 지금 상황보다 더 크겠냐는 거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욕망, 새로운 출발이다. 더 이상 어쩌지 못하는 아포리아 속으로 찾아 온 운명.
 
우리는 페터가 이런 의식을 갖게 된 지점의 특이성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잡혔고, 더 이상 손 써볼 일이 남아 있지 않았으며, 이제 어떻게 죽을지 고민해야 하는 그런 상황에서야 자신의 처지를 깨닫는다는 사실이다. 마치 덫과 고양이 사이에서야 자신의 처지를 깨닫는 쥐처럼 말이다. 그러나 쥐와 원숭이는 다르다. 쥐는 방을 옮겨가며 회피 속에서, 결국 자신의 욕망이 벽에 휘어버리지만(쥐는 급기야 덫으로 달려들고 만다!), 원숭이는 벽을 응시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정면으로 원한다. 우리는 이 미묘한 차이를 깨달아야 한다. 조여 오는 벽들로부터 살 구멍을 찾아서 뒷걸음질 치는 쥐는 그 욕망이 구부러지면서 소멸해 가지만, 원숭이 페터는 자신의 욕망을 새롭게 구성하고 꼿꼿하게 강화한다. 이제 가만히 있지는 말아야지. 계속 앞으로 나아가자! 이판사판, 막판 아니던가.
 

그러나 이 냉철한 원숭이는 새로운 욕망을 허투루 다루지는 않는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지 않았지만, 막다른 벽을 관찰하고 또 관찰한다. 이 관찰하는 태도는 카프카의 다른 단편 「법 앞에서」도 볼 수 있다. 법 앞에 당도한 시골 사람. 그는 법 앞에서 자신을 가로막고 서 있는 문지기를 여러 해를 두고 살펴본다. 그러다 보니 문지기의 외투 깃 속에 있는 벼룩까지도 알아보게 된 까닭에 벼룩에게까지 자기를 도와 문지기의 기분을 돌려달라고 청하는 경지에까지 이른다. 이런 경지에 있었는지, 원숭이 페터도 학술원에서 이런 말을 한다. “만약 제가 앞서 말씀드린 저 자유의 신봉자였더라면, 저는 분명 이 사람들의 침울한 눈길에서 제게 보여진 출구보다는 망망대해 쪽이 낫다고 했을 겁니다.”
 


결국 페터는 막다른 벽, 즉 사람들의 침울한 눈길(원숭이에게는 인간이 벽이었다!)에서 출구를 본다. 사람들로 둘러싸인 벽들 속의 원숭이 한 마리. 그 원숭이가 끊임없이 관찰하였던 사람들 눈망울에서 마침내 출구를 본 것이다. 이를 일러 말하길, ‘인간출구’. 여기서 원숭이 페터는 놀라운 이야기를 하는데, 바로 이런 말이다. “저는 출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출구 없이는 살 수 없으니 만들어내야만 했습니다.” 이 말대로라면 원숭이는 막다른 곳에서 운명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더 이상 어쩌지 못하는 아포리아 속으로 만들어내고야 만 운명!
 
침뱉기, 파이프 피우기, 독주 마시기. 원숭이가 벽(사람들)을 관찰하는 열의를 보이자, 이제 벽(사람들)이 자신을 가르치려든다는 것을 안다. 어떤 사람은 혼자 자꾸 자기에게 와서 술병을 내밀고 가르치려고 한다. 마치 벽을 계속 보다보니, 벽에 담쟁이가 피어오르는 형국이다. 이제 담쟁이가 다 자라면 그걸 잡고 오르기만 하면 될 듯. 어떤 사람이 술마시는 모습을 원숭이에게 보여주는 장면은 압권이다.


… 그는 병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고, 저와 저의 시선도 그를 따라 목구멍 안까지 쳐들렸습니다. 그는 저에게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이고 병을 입술에 댑니다, 저는 점차 깨달아가는 데 들떠서, 낄낄거리며 가로세로 아무데나 마구 긁어대고, 그는 기뻐하며 병을 입에 대고 한 모금 마십니다. 그를 쫒아하지 못해 안달이 나고 절망한 나머지 저는 오줌을 질질 싸 제 우리 안을 더럽히고, 그러면 그러는 것이 다시금 그에게 커다란 만족을 주지요, 그러고는 술병을 쭈욱 뻗쳐 내밀었다가는 휘익 다시 쳐들어올려 과장되게 교훈적으로 몸을 뒤로 벌떡 젖히고 단숨에 비웁니다. 저는 너무도 큰 욕망에 지쳐, 더 이상 좇아하지도 못하고 힘없이 쇠창살에 매달려 있고, 그러는 동안 그는 배를 쓰다듬으며 이빨을 드러내고 빙긋이 웃음으로써 이론 수업을 끝내는 거예요.


─프란츠 카프카, 「학술원에의 보고」 강조는 인용자


이제 원숭이 페터는 이 단 하나의 출구, 단 하나의 욕망, 단 하나의 운명에 맞추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다. 이 순간에는 욕망도 운명이 된다. 인간에 만족을 주며 그들의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데 모든 욕망을 투여하는 저 간절한 모습을 보라. 깨달아가는 데 들뜨고, 쫒아하지 못해 안달이 나고, 스스로 우리 안을 더럽히는 간절함이란 상상만 해도 쩌릿쩌릿하다. 그 욕망이 어찌나 컸던지 발버둥지다 지쳐서 쇠창살에 매달려 있게 되었다지 않은가. 이제 원숭이 페터는 자신의 본성을 잊어버리기 시작한 것 같다. 새로운 욕망 위에서 둘러싸인 벽들(=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관계 속에서 원숭이 페터는 드디어 완전히 새로운 운명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싶다. 카프카가 제시하는 출구의 독특함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자의 유기체적 감수성을 일거에 넘어서는 방식으로 출구를 생산하는 것이다.
 
「변신」에서는 그레고르의 동물-되기를 통해 가족이라는 막다른 골목과의 새로운 배치로  새로운 출구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면, 「학술원」에서는 원숭이의 인간-되기를 통해 인간들과 새로운 배치를 생산함으로써 원숭이의 새로운 출구를 만들어 냈다. 출구란 다름아니라 유기체적인 감수성을 넘어서서, 내가 ‘내가 아닌 상태’에 있게 변화시킴으로써 벽이 ‘벽이 되도록 했던 조건’을 바꾸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기묘한 지대에 도착한 느낌이 든다. 출구와 운명과 욕망이 한 덩어리가 되는 그런 자리. 그러니까 깨달아 들뜨고, 쫒아하지 못해 안달이 나고,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우리 안을 더럽히는 저곳. 우리에게 출구는 바로 저곳이다!



출구, 새로운 신체를 만들다


그러나 원숭이는 인간-되기로 인간이 된 것이 아니다. 원숭이는 인간도 원숭이도 아닌 또 다른 존재가 된 것이다. 원숭이가 인간출구로 뛰어 들어갈 때, 그가 진화의 욕망 때문에 그 출구로 달려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무엇이 될지도 모르면서 그 출구로 달려 들어갔다. 그게 혹여 착각일 뿐이더라도 그 길로 갔을 것이다. 그 길밖에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것이 단 하나의 출구이자 운명이자 욕망이 될 수 있었다. 이 출구를 걸어 들어가면 갈수록 무엇이 되고자 하는 유기체적인 목표는 소멸한다.

이 관점에서 원숭이 페터는 카프카 그 자신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카프카는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단편소설 몇 개를 빼고는 자신의 작품, 편지 및 원고를 모두 없애버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자신이 직접 출판한 작품은 남기려는 반면에, 끝까지 마무리 지을 수 없었던 다른 작품들은 모두 폐기하기를 원한 것이다. 이를 두고 여러 해석이 있지만 나는 그 유언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싶다. 정말 유통시키고 싶지 않았거나, 유통시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원숭이 페터는 마지막 장면에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한다.


전체적으로 보아 저는 아무려나 제가 도달하고자 했던 것에 도달했습니다. 그것이 애쓸 가치가 없었다고는 말하지 마시기를. 저는 아무튼 그 어떤 인간의 심판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지식을 널리 알리고자 할 뿐입니다, 저는 보고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여러분께도요, 학술원의 고매하신 신사 여러분, 저는 보고했을 뿐입니다.


─프란츠 카프카, 「학술원에의 보고」


원숭이 페터는 인간출구라는 운명을 보고 나서부터, 앞뒤 안가리고 배우고,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끊임없이 뛰어들면서 배운다. 덕분에 다시 과거의 원숭이로 되돌아가려면 “제 살에서 가죽을 벗겨야” 할 정도로 변해있다. 원숭이는 이제 원숭이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원숭이는 인간을 목표로 삼았다면 당연히 도달해야할 ‘유럽인의 평균치 교양 수준’에도 도달했기에 자신의 시도를 완성하기도 하였다. 물론 그것이 남 보기에 기껏해야 ‘유럽인의 평균치 교양’에 불과할 뿐이고, 그저 흔들의자에 앉은 채로 창밖을 내다보는 여유 정도를 가질 뿐이고, 집에 있는 암침팬지를 보노라면 견딜 수 없는 지경인 정도에 불과하더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이 순간에 원숭이 페터는 어느 누구의 심판도 바라지 않고 있다. 페터는 절정의 성공을 향유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한줌의 성취라고 가치 없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어떤 결과물에도 인간의 심판을 원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자신의 모든 성과물을 과정 중에 있는 그 무엇으로 인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카프카는 자신의 글도 과정 중에 있는 글이므로 그것 자체로 완성되었지만 종국적으로 완결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불살라버리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원숭이 페터는 말한다. 이것을 보고일 따름입니다. 그저 보고일 뿐이죠. 혹여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찢어버려도 됩니다! 그저 제 수많은 시도들을 보고했을 뿐인데요. 어린애들 블록 쌓기 같은 느낌이다. 이렇게 쌓고 허물고, 저렇게 쌓고 허물고 하기를 무한 반복하기. 
 
이런 의미에서 카프카의 글쓰기, 원숭이의 출구 찾기는 ‘하나의 실험들’이기도 하다. 각각은 완성되었지만, 종국적으로 완결되지 않은 실험들의 묶음 말이다. 이 실험들의 결과물들은 어디 있을까? 아마도 그것들은 카프카의 글-기계들이 되었을 테고, 원숭이의 인간-기계들이 되었을 것이다. 원숭이의 인간-기계가 원숭이와 함께 인간-벽을 돌파하였듯이, 카프카의 글-기계는 카프카와 함께 새로운 신체가 되어 카프카의 수많은 벽들을 돌파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저는 슬쩍 달아났습니다”라는 페터의 수줍은 고백을 사랑한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달아난다는 말이다. 나는 지금 내가 읽고 있는 다섯 장짜리 글과 함께 다른 신체가 되었다. 아마 그 새로운 신체가 단 하나의 출구를 찾아 걸어가고 있을 것이고, 따라서 그곳에 내 운명이 있을 것이다. 이제 또 한번 슬쩍 달아날 참이다.



_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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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봄봄 2013.01.08 11:38 답글 | 수정/삭제 | ADDR

    계속 여기서 딴지만 거는 것 같아서 정말 죄송한데요, 글 쓰신 분 본인도 뭐 그렇게 잘 알고 쓰시는 것은 아니리라는 느낌이 듭니다. 개인적인 느낌이니 좀 화나신다 하더라도 어쩔수는 없을것 같습니다.

    하여간, 저로써는 "유기체적인 감수성을 넘"어선다는구절이 아무래도 좀 거슬립니다. 그 말은 모든 종류의 '변성'을 허용한다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약선생 그리고 북드라망에 계신분들이 가타리와 들뢰즈의 철학에 크게 의존하고 계신건 알겠는데, 제가 그들의 철학에 대해서 약간 감을 잡고 있는 맥락은 '그저 모조리 해제해 버리자'는 해제주의인데 저는 그점에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기본적 본성, 물성마저 해제해버리자는 소리로 들리니까 말이지요.

    해제주의를 받아들이면 아래같은 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사: 완성단계에 있는 미래의 음식 http://media.daum.net/digital/newsview?newsid=20130108040123572
    이 뿐만 아니라 이런것들을 받아들이면 포스트 휴머니즘 논의도 받아들이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들은 방대해 집니다. 아주 인류를 망치고 지구를 거덜낼 일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그런거 조차도 어쩔수 없는 변화이니 받아들이자고 할것입니까?
    궁금하군요.

    • 약선생 2013.01.08 14:31 수정/삭제

      헤헤..언젠가 봄봄님이 제 글에도 코멘트를 달아 주시리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점심 먹고 들어와 봤더니, 봄봄님 댓글이 있어서 이상하게도 반가운 마음이 들더군요. ^^ 암튼 급한대로 다음에 답변을 남김니다.

      1. 먼저, 제가 봄봄님의 코멘트에 화가 날거라는 우려는 거두어 주세요~ 저희 감이당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매학기 말에 에세이 발표를 하는데, 그때마다 봄봄님 말씀보다 더 심한 질책(?)을 받아 왔기 때문에 그런 점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 많이 단련되어 있습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고요. 저는 오히려 블로그라는 한계 때문에 좀 더 치밀한 이야기들이 오고 가지 못하는 것이 더 안타까웠지요. 다만, 질문의 논지를 정치하게 정리해주시기만 하면 블로그도 훨씬 훌륭한 공부의 장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봄봄님이 화를 푸세요 ^^

      2. 나름대로 님의 질문을 정리하면, 이런 것 같습니다. “‘유기체적인 감수성을 넘어선다’는 말이 모든 ‘변성’을 인정해야한다는 말이냐?”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그렇다면, ‘해제주의’(이건 아마도 ‘해체주의’의 오타 같습니다. 물어볼 수 없으니 이하 그렇게 이해하도록 하지요. 혹시 틀린 것이라면 ‘해제주의’에 대해 따로 설명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 쩝)의 경우처럼 그것은 기본 본성과 물성 마저 '해제'(이 경우도 해체의 오타 같습니다)해버리자는 것이냐? 그건 아니지 않느냐?”. 맞는지요? 제가 보기엔 이 정도인 것 같습니다.

      우선, 이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관점이 무의식적으로 전제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모든 유기체는 변하지 말아야 할 기본적인 본성을 애초부터 갖고 있었다는 것 말입니다. 따라서 그 최소한의 기본적인 본성은 변하지 말아야 하며, 그런 것들까지 없애버릴 위험이 있는 해체주의라면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인간성’ 같은 ‘인간다움’, ‘꽃다움’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시죠. 예를 들면 원시인의 그 ‘인간다움’과 현대인의 ‘인간다움’이 같은 것일까요? 님께서 말씀하신 ‘기본 본성’이라는 것이 진정 있는 것이라면, 원시인의 ‘인간다움’이라는 것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저는 상상하기에 원시인이 그때의 그 ‘인간다움’을 지닌채로 현대 세계에 나타나면, ‘그’[정말 그는 ‘그’일까요? 오히려 ‘그것’에 가까울 것입니다.]는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다움과 멀어도 한참 먼 생명체에 불과할 거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현실적인 층위의 모습이 아무리 사람 같아 보여도 말이지요. 제 말인즉슨, 이른바 ‘인간다움’이라는 ‘본성’ 그 자체도 끊임없이 바뀌고 있을 뿐 아니라, 어쩌면 그것 자체가 구성되고 있는 것이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애초에 없는 것인데,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사전에 규정한 정의에 맞추어 조작된 용어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푸코의 ‘말과 사물’, ‘임상의학의 탄생’ 같은 책들이 그런 주제를 다루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다움’ 자체가 만들어진 것일 수 있고, 그 만들어진 정의에 비추어서 애초에 있지도 않은 원시인의 인간다움을 논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혹시 조작되었을지도 모를 ‘인간다움이라는 본성’, 혹은 ‘꽃다움이라는 본성’에 비추어 각각의 사물을 이해하는 것은 오히려 사물을 왜곡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시하는 것이 ‘관계성’입니다. 원시인은 문명이 없는 상태에서 다른 사물들과 관계를 맺기 때문에 자의식 같은 내면도 없고, 보다 야생적인 사고와 태도를 가질 가능성이 클겁니다. 아마도 사용하는 언어도 우리랑 완전히 다른 기반 위에서 구성되었을 것이고, 그에 따른 감각도 아주 다르게 구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관계성 하에서의 원시인은 ‘현대의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유기체적 감수성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인간도 아닐 것이고, 더 나아가서, 근대적 유기체론을 따르는 그 유기체도 아닐 것입니다.

      이런 구도로 살펴보게 된다면 봄봄님이 말씀하시는 ‘변성’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로지 ‘변신’이 있을 뿐이지요. 왜냐하면 애초에 출발점으로 삼을 ‘기본 본성 혹은 물성’이라는 고정된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변신은 현실적인 층위의 가시적인 모습과 무관하게, 오로지 잠재적인 층위에서의 관계성이 변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현실적인 층위의 여러가지 변화[현실화]가 수반되기도 할테지만 말입니다. 그것도 오로지 관계의 차원에서 그렇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원시인, 그는 사람[현실적인 층위의 가시적인 모습]인채로 선사시대의 관계성에서 다른 관계성으로 끊임없이 변신해 갈 것입니다. 그는 이미 단일체로서 규정될 수 없고, 오로지 다른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만 규정될 수 있지요. 이런 점에서 유기체적 감수성을 넘어선다는 말은 누군가 규정해 놓은 ‘유기체’라는 단일체로서의 개체성[기존의 관계성]을 넘어선다는 말입니다. 오로지 다양한 관계 속에서 구성될 뿐이라는 것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잠재적인 차원에서의 기존 관계성이 송두리째 변하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변신’의 관점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그 잠재적 배치[실재의 관계]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현실적인 층위의 모습이 다양하게 변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잠재적인 관계성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면, 그것은 기만입니다. 성형과 같은 것이 그런 것이겠지요. 님께서 참조하신 “유전자변형작물(GMO)‘ 같은 것도 사실은 현실적인 모습만 다양하게 변화시킨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그것은 실재적인 변신이 아니지요. 그것은 ’자본관계‘를 고정시키며 확대한 이른바 산업의 결과물일 뿐이고, 또 다른 ’국제적 자본관계‘가 산출한 ’기아상태‘를 유지한 채 만들어진 결과물일 뿐이죠. 그것은 변신도 변성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기존 관계성(자본의 욕망관계-자본증식)을 유지, 고착하고자(’계속 돈을 벌기 위해서) 생산한 상품일 뿐인거죠. 따라서 그것은 님께서 우려하시는 바, ”어쩔 수 없는 변화“로서 받아들여서는 안 되지요. 그 고정된 관계성에 주목하고, 비판하고, 저항해야지요. 설사 그런 음식을 생산해야할 때[설혹 그것이'실험실 식량'일 경우라도]조차도 기존 관계들의 전복이 전제된 생산이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저는 그런 전복이 수행될 때는 다른 방식의 식량 관계가 구성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주 다른 형태, 다른 관계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해체주의는 모든 것이 관계성에 의해서 구성된다는 점을 인정하는 극히 윤리적인 태도입니다. 항상 고정되고 부패한 관계성들을 폐기하고 새롭고, 보다 윤리적인 관계성을 구성하기 위해서 힘차게 앞으로 전진하는 태도입니다. 따라서 해체주의는 성형수술이나, GMO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지요. 자본은 자신들이 ‘해체주의자’인양 설레발칩니다만, 그들은 기존의 자본관계, 욕망관계만을 고집하는 극단적인 보수주의자일 뿐인 것입니다.

      제 답변이 많이 모자라시겠지만, 이 정도에서 마치도록 할께요. 아무튼 제 글을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제 답변이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다음에는 좀 더 나은 “관계”(!)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네요. ^^

  • 봄봄 2013.01.08 16:08 답글 | 수정/삭제 | ADDR

    긴 답변 잘 읽어보았습니다. 대단히 논리적이고 지식에 기반한 답변이라고 사료됩니다.
    해제주의인지 해체주의인지 영어로 'dismiss' 라는 맥락에서 같은 말로 사용하였습니다. 관심이 거기까지이기도하지만 저는 그들의 논의를 개략적으로 이해하고 있을뿐이고 더이상 깊이 들어가고 싶은 마음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곳에서 가타리와 들뢰즈의 논의만 너무 신주단지처럼 모셔지는것 같아 좀 거부감이 듭니다.

    음식에 관해서는 좀 유감스럽습니다. 음식의 관계성에 대해 논리적, 이성적, 이론적으로 따지기 이전에 그런 음식을 먹는 것이 어떻게 느껴지느냐가 우선적으로 와야한다고 봅니다.

    트랜스 휴머니즘 논의에 대해서는 답을 안하셨군요.

    저로써는 관계와 개체의 관계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라고 봅니다만... 개체 이전에 '관계 우선' 맥락을 선호하는 것에 대해는 동의를 못하겠군요. 개체와 관계는 함께 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즉, 개체의 온전함도 관계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길게 설명한다'는 것과 '잘 정리한다'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조근조근 논리적으로 설명할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단번에 핵심으로 들어가는 직관이 부족하여 길고 장황하게만 서술하므로써 오히려 주의를 분산시키고 독자로하여금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단점이 있다고 봅니다.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짧게 몇마디 만으로도 핵심을 이해시킬수 있지요. 참고하시면 좋으리라고 봅니다.

    그럼 담에 또 뵙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