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의 생애는 비극적이지 않아
보니 가머스, 『레슨 인 케미스트리』 1~2, 심연희 옮김, 다산책방, 2022
(“‘국민학교’에 다녔던 때를 떠올려본다”라고 쓰자마자, [한컴오피스 한글 2014 for MAC]은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자동 수정을 해버린다. 이건 조금 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국민학교’라는 어휘가 가진 이념적이고, 정치적이며, 역사적인 문제야 십분 이해하는 바이지만, 나를 비롯해서 어느 시기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이 다녔던 학교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였다는 것은 엄연한 경험적 사실이다. 요컨대 그것은 내가 경험한 일이다. 나아가, ‘국민학교’는 문법적인 오류도 아니다. 왜 워드프로세서가 그런 기억과 경험마저 수정하려드는지, 기분이 몹시 좋지 않다.)
어쨌든, 그런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고, 국민학교를 다녔던 그때, 우리 가족이 살던 집은 방 두 개, 월세를 놓은 점포 하나가 딸려 있는 그 시절의 흔한 단독주택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실 그 집은 이른바 ‘자가’가 아니라 고모가 투기를 목적으로 차명(내 아버지의 명의)으로 사둔 집이었다. 어쨌든, 그 집의 방 두 개중에 한 칸은 한참 지점토 공예에 열중하던 모친의 작업실로 쓰였는데, 그 때문에 우리 집에는 언제나 공예품에 채색을 할 때 사용된 시너와 락커 냄새가 진동하곤 했다. 그런 와중에 요크셔테리어 종 개 두 마리와 푸들 세 마리까지 다섯 마리의 개가 마당과 집안을 구분하지 않고 돌아다니기까지 했다. 개털이 공예품에 붙으면 품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 녀석들이 모친의 작업실까지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종종 모친의 작업물들 가운데 몇몇에서는 엉겨 붙은 개털을 찾을 수 있기는 했다. 다만 엄마는 솜씨 좋게 개털을 부착물로 가리거나, 금분으로 덧칠하거나 하는 식으로 수정하는 식으로 대응하곤 했다.
자, 그러면 도대체 우리 집엔 왜 그렇게 많은 개들이 있었으며, 나의 모친께서는 그런 와중에 어째서 그렇게까지 지점토 공예에 열중했던 것일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개들은 새끼를 쳐서 팔 목적으로, 지점토 공예는 공예품도 만들어서 팔고 나중엔 동네 아줌마들을 모아서 ‘지점토 공예교실’을 열어 수익을 내보려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리고 엄마는 어쨌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물론 엄마의 구상이 실현될수록 아빠의 무능함이 도드라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외에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지 아느냐’로 시작하는 특유의 ‘고생서사’가 강화되는 효과도 있었다. 여하간 그 모든 엄마의 활동이 그러한 부정적 효과를 산출하기는 했지만, 그 일들은 엄마의 자부심을, 나아가 엄마의 존재역량을 증가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제 일흔을 훌쩍 넘겨서 과거에 그렇게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절을 기억하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거의 아무런 사회적 활동을 안 하고 계시는 현재 상태를 생각해 보면, 나조차도 그런 시절이 정말 있었는지 아득하다. 그래서 나의 모친께서 그 일로 큰돈을 버셨냐고? 그럴 리가. 돈을 좀 벌기는 했지만, 그 다음에 눈을 뜬 주식을 하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물론 주식을 하는 동안에 잠깐씩 돈을 벌었던 적도 있고, 잃었던 적도 있고 등락이 있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본전에서 약간 마이너스라는 이야기를 ‘무능’해서 딱히 손해를 본 적도 거의 없는, 내가 엄마보다 거의 항상 더 좋아했던 아빠에게 전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가 그렇게 지점토 공예를 하고, 증권회사에 출근도장을 찍던 시절이 그립다. 물론 어릴 때는 ‘왜 우리 엄마는 다른 집 엄마들하고 다르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불만을 갖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거의 아무런 사회적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엄마는 여전히 다른 집 엄마와 조금 다른 사람이기는 하다.
『레슨 인 케미스트리』는 화학자이지만 화학자로 살 수 없었고, 주부였지만 결코 주부였던 적이 없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매우 ‘비극적’인 여자, 엘리자베스 조트의 이야기다. 소설의 배경은 1950년대 미국의 헤이스팅스 화학 연구소이고, 엘리자베스 조트는 거기서 일하는 ‘여자’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헤이스팅스 연구소는 ‘연구소’니까 거기엔 화학자들이 있고, 1950년대이므로 그 화학자들은 대부분 남자다. 그런 이유에서 연구소의 누구도 엘리자베스를 ‘화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엘리자베스는 데이터를 정리하거나 비커를 가져다주는 연구보조원이거나, 그런 일이 없을 땐 커피심부름을 하는 사람으로 취급된다. 단 한사람, 캘빈 에번스만이 엘리자베스를 ‘동료’로 여긴다! 둘은 당연히 연애를 하겠지? 결혼도 할까? 그건 직접 읽어보시길. 그런데 정말 엘리자베스의 생애는 비극적이었을까? 말했다시피 ‘보는 관점’에 따라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 우리 모친의 생애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면에서 보건대 엄마는 외로워하고 있는 중이다. 전해들은 바, 엄마의 어린 시절도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의 전 생애가 외로움으로 점철되어 있을까 하면 그건 또 그렇게 말할 수만은 없다. 요컨대 누구의 생生이어도 마찬가지다. 그의 생애에 어떤 점은 비극적이고, 외롭고, 고독하며, 슬프다. 그런데 어떤 인생도 하나의 색으로만 칠해질 수는 없다. 엘리자베스가 헤이스팅스 연구소에서 쫓겨나듯 나왔을 때, 켈빈과 이별하게 되었을 때, 아무도 그녀를 화학자로 대우해 주지 않았을 때, 평생 거부(?)해 온 어떤 정체성이 그녀를 대표하게 되었을 때, 이 모든 순간은 비극적이고, 슬픈 일이면서, 그녀를 고독하게 만들었지만 그녀는 헤이스팅스 연구소에서 연구를 했었고, 에번스를 만났으며, 연구소 밖에서도 연구를 멈춘 적이 없다. 요컨대 인생은 재미있게도 더해지는 동시에 빼고, 빼는 동시에 더해지는 식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생각보다 공평하다. 물론 그렇게 ‘생각보다 공평’하다는 이유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바꿔야 할 것, 의지를 발휘해야 할 것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수도 없이 마음을 다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인생의 법칙은 생각보다 공평하게 작동하므로, 마음먹기에 따라 할 말은 할 말대로 하면서 마음을 덜 다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다. 그 말을 하고 싶었다. 이것은 엘리자베스의 딸에게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고, 어딘지 모르게 다른 엄마를 둔 어린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물론 그 시절의 엄마와 엘리자베스 모두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글_정승연(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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