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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못한 소설 읽기

[읽지못한소설읽기] 하고 싶은 말이 전부는 아니다

by 북드라망 2023. 11. 24.

하고 싶은 말이 전부는 아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세 가지 이야기』, 고봉만 옮김, 문학동네, 2016

 

 

최근에, ‘형이상학’도 결국엔 ‘이야기’라는 생각을 잠깐 한 적이 있었다. ‘형形’이 보여야 보이는 모양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할 수 있을 텐데, ‘형이상학’은 말 그대로 ‘형形-이상而上’을 다루기 때문에 다루는 것을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그리고 계산할 수도 없다. 이를테면, ‘존재’, ‘차이’, ‘코나투스’, ‘제1원인’ 등과 같은 ‘개념’들을 결국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아닌가? 최근에는 오랜 반성 끝에 ‘인간만의 고유한’으로 시작하는 인간주의적 규정들이 점차 사라지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만의 고유한 어떤 특질을 꼽는다면 결국 그러한 ‘이야기’를 짓고, 그것을 듣고, 읽는 것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형이상학’이 그렇게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듯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데 비해, 아예 처음부터 ‘이야기’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장르가 ‘소설’이다. 물론 어떤 소설은 ‘이야기’를 짜는 데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이, 알쏭달쏭한 문장들만 이어가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소설’의 본령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그 알쏭달쏭한 소설들 조차도 끝까지 읽고난 다음에는 마음속에 남는 미묘한 이야기의 줄기들을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 오히려 그 알쏭달쏭함은 ‘이야기’를 짓는 실험적 방법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읽는 사람에 따라서 ‘이어 붙이는’ 문장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읽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는 것일테니 말이다. 다만, 나는 그런 소설들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읽기에 힘이드는 것은 물론이거나와, 힘이 드는 만큼 ‘재미’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소설들의 상당수는 형식 실험에 지나치게 힘을 쏟은 나머지 정작 ‘이야기’ 자체가 가진 힘이 딸리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역설적이게도 소설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19~20세기 중반까지의 세계문학류의 작품이나, 아예 동시대에 쓰여진 장르소설(SF 또는 판타지)들을 즐겨 읽는다. 전자의 경우는 고전문학 특유의 정돈된 짜임새, 진지한 주제의식, 장인적으로 빗어낸 소설적 테크닉 등을 즐기는 맛이 있고, 후자의 경우는 발상의 신선함, 말이 좀 안 돼도 어물쩍 넘어가는 뻔뻔스러움, 개그요소 등을 즐기는 맛이 있다. 

물론 연대상으로만 보자면 ‘플로베르’는 확실하게 전자, 고전소설의 범주에 속하는 작가임이 분명하지만, 그의 작품들이 빚어내는 ‘이야기’의 성질은 전자의 범주를 초과한다. 이를테면 그가 ‘박제된 앵무새’를 숭배하는 충직한 하녀(「순박한 마음」)의 죽음 장면에서 기억과 현실을 뒤섞을 때, 사냥꾼 한 사람이 쏜 화살만으로는 도저히 죽일 수 없는 숫자의 동물의 사체가 산더미처럼 쌓이는 순간에(「구호수도사 성 쥘리앵의 전설」), 왕의 욕정이 그의 공포를 가볍게 해체해 버리는 순간에(「헤로디아」), 플로베르는 ‘희안한 일’이 아니면 뉴스에 나오지도 않는 이 세기의 작가가 된다. 놀라운 건 그가 펼치는 그 과감한 설정들이 ‘환상’이나, ‘환각’, 몽환적인 상태에서 재생되는 ‘기억’ 같이 의도적으로 ‘사실’을 해체하기 위해 동원된 장치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플로베르의 작품에서 그러한 환상적인 장면들은 철저하게 사실적인 묘사를 극한으로 추구하는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에 가깝다. 이를테면,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세계를 고배율의 망원경으로 비춰본다고 생각해 보자. 멀리 있는 것이 가깝게 보이고, 가까운 곳은 흐릿해서 보이지 않고, 사건들의 맥락은 모두 잘려나가고, 오로지 눈에 보이는 그 장면만으로 어떤 ‘이야기’를 구성해야 한다면 어떨까? 세계는 환상이 되지 않을까? 

『세 가지 이야기』에서 플로베르는 동시대에서 시작해서, 중세를 거쳐, 고대까지 배율을 달리하면서 ‘이야기’를 지어나간다. 이 모든 이야기들을 ‘모던’이 상실한 ‘영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간단하게 요약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거기서 우리는 신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알리는 예언자를 보고, 떨칠 수 없는 죄의식 속에서 참회를 거듭하며 살아가다 결국엔 구원에 이르는 성자를 보기도 하고, 율법 너머의 믿음, 질박한 삶에 대한 깊은 공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 모든 말들이 결국엔 플로베르가 ‘하고 싶었던 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렇게만 이야기 하는 건 『세 가지 이야기』의 소박한 제목만큼이나 단순하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한 것’은 대개 좋은 것인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그만큼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다시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야기’란 무엇일까? 아니, 우리는 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걸까?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나는 우리가 ‘이야기’를 지어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만큼 복잡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쉼없이 죄를 짓고, 죄를 지으면서도 자신이 저지른 ‘죄’를 ‘죄 아닌 것’으로 바꿔줄 이야기를 지어낸다. 무언가를 좋아하면 좋아 할수록 자신에게나 세상에나 좋을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좋아하기를 멈출 수 없다.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동시에 사랑하고, 슬퍼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쾌감이 인다. 이 모든 복잡함을 간략하게 만들어줄 ‘이야기’가 없다면 우리는 하루도 삶을 유지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야기를 할 때, 그것은 ‘하고 싶은 말’을 하려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하지 않으면 어느 것 하나 엉키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말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세 가지 이야기』는 펠리시테, 쥘리앵, 헤로디아의 이야기가 아니다. 플로베르의 손을 빌어 스스로를 펼치는 ‘이야기’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들은 ‘세 가지 이야기’로만 남아있지만, 여기서 끝난 것 같지가 않다. ‘이야기’는 절대 ‘세 가지’에 머물 수 없으니 말이다. 펠리시테, 쥘리앵, 헤로디아뿐일까? 안나도, 라스콜리니코프도, 송강도, 와트니도, 그레이스도, 누구누구도, 이야기는 결코 쉬는 법이 없다. 읽지 않을 수 없다.

 

글_정승연(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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