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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못한 소설 읽기

[읽지못한소설읽기]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y 북드라망 2023. 10. 13.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도 슈사쿠, 바다와 독약, 박유미 옮김, 창비, 2014.

 

 

지난번에 침묵(링크)을 읽고서, 엔도 슈사쿠의 소설을 한권 더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삶의 무근거성 아래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 그의 문제의식이 좋았다. 그보다 더 좋았던 것은 모든 것이 결국엔 부패하기 마련이고, 부패하는 가운데서 이전과 다른 무언가가 생겨나는 것이라는 그의 답이었다. 요컨대 그것은 인간의 삶이 놓일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조건을 드러내 보여주는 일이다. 바다와 독약도 거의 비슷한 문제를 다룬다. 다만 여기에서는 좀 더 포커스가 좁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결국엔 모두 가지고 살 수밖에 없는 것, 바로 의 문제다.

 

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사실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의 가능성을 묻는다면, 나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살인은 어떤가? 그것은 인가? ‘인간적인 수준에서라면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을 넘어서면 어떤가? 만약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이 라고 한다면, 교미 후 수컷을 잡아먹는 암컷 사마귀도 를 짓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다만 우주의 원자들이 일시적으로 모인 상태일 뿐이고, 죽어서는 다시 그것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죽고 사는 것은 선하지 악하지도 않다. 그렇게 놓고 보면 라는 개념도, ‘선과 악이라는 개념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를테면 암컷 사마귀는 선택에 따라 수컷을 잡아먹는 것이 아니지만, 인간에게는 살인의 가능성과 함께 살인하지 않음의 가능성이 함께 열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심층적인 수준에서는 죄도, 악행도 불가능하지만, 인간적인 수준에서는 그 모든 것이 가능성으로 남는다. 따라서 살인한 인간, 도둑질한 인간, 간음한 인간처럼 가능성을 실현한 인간에게는 죄의식이 남게 마련이다.

 

바다와 독약에는 다수의 화자가 등장한다. 직장에 다니며 기흉 치료를 받는 못공장 직원, 전쟁 때를 좋았던 시절로 기억하는 주유소 사장, 어두운 얼굴의 동네 의원 의사, 늘 밝은 표정의 양복점 주인, 표정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간호사, 이 모든 인간 군상들의 엮임을 담담히 기록하는 제3의 화자까지. 엔도 슈사쿠에게는 어째서 그렇게 많은 화자들, 어째서 그렇게 다양한 시야들이 필요했던 것일까? 언뜻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정도다. 한 가지는 여러 명의 화자를 등장시킴으로써 죄지음이 보편적인 인간 실존의 조건이라는 점을 부각할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와 그것을 조건짓는 이 한 시대의, 아마도 본인이 살아온 시대의 단면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래서, 그러한 앞에는 일방적인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다. 모두가 죄를 짓고, 모두가 벌을 받는다. 다만 슈사쿠가 조망하는 그 시대가 제국주의 일본의 시대라는 점에서 이는 문제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는 모두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슈사쿠의 보편화 작업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를 딜레마라고 말할 수도, ‘아포리아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나는 사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슈사쿠와 같은 문제 설정이 좀 더 인간의 조건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다른문제다.

 

어쨌든,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나의 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 시기에 군인들이 저지른 악행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이라고 쓸 수 있는 정도로 지난날 나의 죄들은 상대적으로 가벼웠는가? 나아가 우리는 어떤 는 가볍고, 어떤 는 무겁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게 무수하게 많은 죄를 짓고도 이렇게 뻔뻔스럽게 살아가도 되는 것일까 등등.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니, ‘를 짓고 난 다음의 삶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일단, 현재로서 나의 잠정적인 결론은 죄의식자체를 어떻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건 그것대로 자연스러운 감정이니까. 문제는 죄의식다음이다. ‘죄지음자체를 아예 덮어둘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의사 스구로처럼 매번 그것은 상기하면서, ‘을 요청하는 것도 답이 될 수 없다. ‘의 망각으로부터도, 속박으로부터도 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도 이 지점에서 끝난다. 나는 그러한 마무리가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삶은 소설의 끝자락에서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스구로로서는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었다…….”

 

스구로가 할 수 없었던 것은 소리 내어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스구로는 노래를 부를 수 없었을 것이다. 영원히 노래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아갈 수밖에 없다. 결국 산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죄를 지었다, 벌을 받는다.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_정승연(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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