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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못한 소설 읽기

[읽지못한소설읽기] 영원히 풀리지 않는, 돌아갈 수 없는

by 북드라망 2023. 5. 8.

영원히 풀리지 않는, 돌아갈 수 없는

오르한 파묵, 『하얀 성』, 이난아 옮김, 민음사, 2011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있다. 이 질문은 오랜 시간,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서 반복되어 왔기 때문에, 지금은 질문 자체가 마치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 질문이 그렇게나 무수한 반복을 거쳤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 질문이 매우 중요한 질문이라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던진다고 해서 ‘질문’의 중요함이 불현 듯 생겨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오히려 어떤 사람들에게 이 질문은 일부러 웃기려고 던지는 질문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자기, 질문이 묻고 있는 사람도 자기, 질문에 답할 사람도 자기, 이 질문에는 오직 ‘자기’밖에 없다. 그래서 이 질문은 한편으로는 아무런, 정녕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무의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로부터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끝없이 의미를 산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 치고,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 질문의 ‘인기’다. 생각하건데, 살면서 이 질문을 던져보지 않은 사람은 생각보다 적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누구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가, 이른바 ‘인간’이라면 모두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을 것이라고 말해도 큰 과장은 아니지 않을까 싶다. 어째서 우리는 지치지도 않고, 끝내 답하지 못할, 이런 바보스러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대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나’라는 말로 그을 수 있는 구획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나’는 자기 안에서 언제나 ‘나 아닌 것’을 만나게 마련이다. TV 뉴스의 아동학대 기사에 분노하는 ‘나’와 ‘사랑의 매’로 자식을 (이른바) ‘훈육’하는 ‘나’, 둘 중에 어떤 게 ‘진짜 나’고, 어떤 게 ‘가짜 나’인가? 『하얀 성』의 호자와 나 둘 중에 무엇인 진짜 ‘호자’고 무엇인 진짜 ‘나’인가? 

 

 

『하얀 성』의 ‘나’는 17세기 베네치아에 사는 학자다. 그는 배를 타고 나폴리로 가던 중에 노예무역으로 악명을 떨치던 바르바리 해적에게 붙잡혀 오스만 제국으로 팔려간다. 거기서 그는 악착 같이 살아남으려고 애를 쓰다가 오스만인 호자를 만나게 된다. 호자의 물음, ‘네가 사는 곳에서 너는 어떻게 살았고, 어떤 인간이었나?’에 답하게 되면서 호자와 ‘나’는 섞여들기 시작한다. 그렇다. 우리는 언제나, 항상, 이미, 누군가와 또는 어떤 것과 섞여 있는 상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을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 질문에 결코 답할 수가 없다. 소설에서 ‘나’는 자신이 떠나온 곳을 그리워한다. 결국 ‘나’는 그곳으로 돌아갔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볼 수는 있다. ‘나’는 언제나 떠난다고. 언제나 떠나기 때문에 결코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이다.

파묵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영원한 정체성 문제를 게임화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한다. 요컨대 작가 자신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결코 풀릴 수 없는 문제라는 걸 알았다는 말이다. 이것은 어떤 위험에 관한 경고일지 모른다. 말하자면 ‘나’의 ‘정체’를 묻는 순간마다 우리는 어떤 ‘회귀’, 변치 않는 본질의 ‘복원’을 떠올리는데, 만약 그런 게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물음은 ‘영원한 문제’가 된다.

대개의 경우 ‘떠나온 곳’은 언제나 어떤 향수를 자극한다. 지치고 무기력해질 때마다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그런데 우리는 결코 그곳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래서 묻는다. ‘나는 누구’냐고.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결국엔 떠날 수밖에 없다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나’로 호명되는 우리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조건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돌아감’이 아니라, ‘계속 감’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어떨까? 더 멀리 가기. 이미 떠나온 곳에서 내가 누구였든, 무엇이었든, 더 많은 ‘나’와 마주치기. 그래서 그 모든 것이 ‘나’이면서 동시에 무엇이든 상관없어질 때까지, 더 멀리.

 


글_정승연(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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