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썩는다
엔도 슈사쿠, 『침묵』, 공문혜 옮김, 홍성사, 2003
1638년 3월 예수회 소속 신부 로드리고와 가르페, 마르타는 에도 막부의 박해에 의해 붕괴된 일본 선교를 재건하고자, 포르투갈을 떠나는 배에 오른다. 이들은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시마바라의 난' 이래로 일본의 '키리시탄'은 뿌리가 뽑힌 듯 보였기 때문이다. 정권의 관리들은 신자들에게 성화를 밟고, 그들이 믿는 신을 욕하게 함으로써 배교를 유도하거나, 이를 거부할 경우엔 끓는 유황 온천에 신자들을 몰아넣어 죽이는 형벌을 가하였다. 외국에서 온 신부라고 해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배교의 유혹은 신자들의 그것보다 더욱 집요하였는데, 신자들에게 가해지는 형벌을 신부들이 보도록 하는 것은 형벌 자체의 잔혹함에 못지않았다. 로드리고 신부의 스승 페레이라는 어떻게 된 것일까?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본부에 들려오는 소문들에 따르면 페레이라 신부는 이미 배교한 듯 보였다. 그러나 로드리고는 자신을 가르쳤던, 그 누구보다 인자하고 신실했던 스승의 배교를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로드리고 신부는 페레이라 신부를 만나야만 했다. 그리고 박해받는 일본의 신자들과 함께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들의 출항은 그런 결단이었다.
일본으로 향할 때나, 일본에 도착해서나 그들에게 바다는 막막했다. 썰물에 맞춰 관리들에 의해 바다 한가운데 묶인 그들은 밀물이 되도록 돌아오지 못한다. 그들은 묶인 채로 노래를 부른다. '참배하자, 참배하자, 파라이주의 궁전으로 가자'. 신자들이 죽어가며 부르는 그 노래가 로드리고의 귓전에서 계속 울리는 듯 하다. 로드리고는 거기서 신의 침묵을 본다.
어둠 속에서 들었던 음울하고 북치는 듯한 파도소리. 밤새도록 아무 의미도 없이 부딪쳐 왔다가는 물러가고 물러갔다가는 다시 부딪쳐 오던 소리. 그 바다의 파도는, 모키치와 이치소우의 시체를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씻어 내리고, 삼켜 버리고, 그들이 죽은 뒤에도 여전히 같은 표정으로 그곳에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바다와 똑같이 침묵을 지키고 계십니다. —106쪽
바다 같은 침묵을 지키는 신 앞에서 로드리고는 마음을 다잡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인간은 이 바다의 단조로움이나 그 무서운 무감동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입니다. —같은 쪽
그리고 다시 의심이 자란다.
'그러나 만일…… 물론 만일의 이야기지만…….' —같은 쪽
의심에서 확신으로, 확신에서 다시 의심으로 로드리고의 마음은 '침묵' 앞에서 요동친다.
엔도 슈사쿠의 1966년 소설 『침묵』은 작가가 『바다와 독약』 이래로 그것을 뛰어넘는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발표하여 노벨상 후보로까지 거론되는 등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주요한 테마는 앞서 말한 것처럼 가톨릭 신앙의 일본 전도, 그 중에서도 박해가 극심했던 1600년대 초가 배경이다. 훗날 이 작품은 마틴 스콜세지에 의해 영화화(<사일런스> 2016년)되기도 한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질문을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침묵하는 신 앞에서 신앙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일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작품이 단지 '신앙'의 차원에서만 이야기될 수는 없다고 느낀다. 『침묵』 그보다 더 보편적인 수준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질문을 장전하고 있다. 이를테면 소설에서 '침묵'하는 것은 '신'으로 표상되지만, 신앙이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침묵'하는 것은 나의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일은 바다의 파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어떤 목적이나, 이유를 가지고 치지 않는다. 매일 그렇게 칠 뿐 그 일을 통해 무엇을 이루겠다는 야망이 바다에게는 없다. 일본에 들어오면서 로드리고는 의미와 이유들로 철저히 무장한 상태였지만, 쉬지 않고 그를 쳐댄 파도에 그 이유와 의미들은 쓸려 나간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사랑의 이유, 결혼의 이유, 일의 이유, 인생의 의미,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열망 등을 어떻게든 만들어내고, 그걸 이루기 ‘위해’ 살아간다고 매일 같이 자신을 설득하지만 문득문득 삶은 크고 나는 작다고 느낀다. 크고 냉혹한 삶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단 하나, 여기엔 아무 의미나 이유가 없다는 것이 아닐까? 이 무의미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다. 우리가 사는 이유는 오로지 단 하나,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엔도 슈사쿠가 만약 여기서 멈췄다면, 『침묵』은 그렇게까지 훌륭한 소설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생의 무의미함을 깨달았다고 해서 그냥 살거나 죽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의미와 무의미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찾아야만 한다.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견디는 것이다.
로드리고는 결국 일본에 정착한다. 말한 것처럼 우리 삶은 근본적으로 또 조건상으로는 무의미하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만큼은 무의미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딘가에 놓이고, 놓임으로써 누군가를 만나게 되고, 만남으로써 어떤 정념들을 갖는다는 점만큼은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태어나기 전이라도 내가 나를 나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그 순간 이래로 나는 단 한번도 ‘관계’, 그것이 인간 사이의 관계이든, 사물들과 맺는 관계이든 그 관계 밖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따라서 내 삶의 ‘무의미’는 어떤 의미에서는 가정상 그러한 것이다. 왜냐하면 ‘관계’는 언제나 특정한 의미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로드리고가 일본으로 건너오고, 숨어서 신앙을 지키던 신자들이 그를 돕기 시작한 이래로 로드리고는 바깥의 사람이길 그칠 수밖에 없다. 그는 이미 어떤 관계망 속에 들어왔다. 그리고 거기엔 무의미하지만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이미’ 친구들이 있으며, 거기서 나는 ‘이미’ 어떤 연루 속에 있는 것이다. 바다는 여전히 침묵 속에서 제 할 일을 한다. 페레이라 신부의 말대로, 아니 사와노 추우안의 말대로 그 와중에 ‘신앙은 뿌리부터 썩고 있’었다. 이 부패를 무엇이라 보아야 할까? ‘부패’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나쁘기만 한 것일까? 이 뿌리 썩은 나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일까? 이 부패를 향해 몸을 던질 로드리고에게 예수는 말한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267쪽
그렇다. 우리는 모두 썩는다. 썩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 그래서 결국엔 아무 의미 없는 것, 그렇지만 있는 동안에 어쩔 수 없이 의미를 쌓아가는 것으로 ‘여기’에 있다. 만약 ‘신’이 있다면, 그것은 ‘여기’가 ‘지금’이 ‘내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 아닐까? 삶은 추락하기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자의 노래와 같다. 그리고 신은 ‘침묵’이다.
정승연(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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