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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못한 소설 읽기

[읽지못한소설읽기] 그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인 이유

by 북드라망 2023. 3. 3.

그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인 이유

(가즈오 이시구로, 『클라라와 태양』, 홍한별 옮김, 민음사, 2021)



우리 동네 마트에는 대형 서점이 있다. 아이와 함께 마트에 가서 시간을 보낼 때면 그 서점에 자주 들른다. 딱히 사야 할 책이 있어서 가는 경우는 거의 없고, 그저 시간을 보내기에 서점만 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아이와 함께 가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내 책은 금방 골랐는데 아빠 책은 왜 이렇게 오래 골라요?”라고 묻는 아이를 옆에 두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서가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아빠에게 아이가 ‘불공평’을 항의하던 어느 날엔가 『클라라와 태양』을 사왔다. 빨간 표지가 눈에 금방 띈 탓도 있고, 마침 ‘2017년 노벨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가 기억 어딘가에 박혀 있던 것도 책을 고르는 데 큰 영향을 준 듯하다. 사실 이 작품을 읽기 전까지 ‘가즈오 이시구로’는 나에게 잠깐 잊혀져야만 하는 작가였다. 왜냐하면 노벨상을 수상하고, 적어도 2, 3년 정도는 지나야 덜 민망한 기분으로 작품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모두가 관심을 보이는 무언가를 일부러 피하고 싶은 약간은 오만한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노벨상쯤 되는 대단한 상을 타야만 겨우 그 작가의 작품을 ‘읽어 봐주는’ 것처럼 구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겨우 가즈오 이시구로의 노벨상 수상 6년 만에야 읽게 되었다.(『클라라와 태양』은 그가 노벨상을 수상한 후에 처음 나온 장편 소설이기는 하다)

『클라라와 태양』에서 ‘클라라’는 AF소녀다. AF란 ‘Artificial Friend’의 약자로, 인간 소년소녀의 ‘친구’가 되어 줄 용도로 개발된 인공지능 로봇이다. 그 중에서 클라라는 소설 속 시점을 기준으로 보면 한 세대 전의 약간 구형인 B2 모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라라는 놀라운 관찰력, 학습을 선호하는 성향 덕에 특별히 뛰어난 ‘제품’으로 평가받는다. 소설의 결정적 질문에 해당하는 후반부의 사건에 이르면 어째서 인간 소녀 조시의 어머니 크리시가 클라라를 조시의 ‘친구’로 선택했는지 밝혀진다. 그 ‘사건’이 무엇인지 말하는 것은 스포일러에 해당하므로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스포일러를 피하면서 이렇게 물을 수는 있다. 향상을 위해 유전자 편집을 당하고,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주기적으로 아픈 조시를 조시이게끔 하는 것은 무엇일까? 또 ‘인간’이 아닌 ‘제품’으로 조시의 집에 온 클라라를 인공지능 로봇이 아닌 ‘클라라’이게끔 하는 것은 무엇일까? 
 

“저는 조시를 배우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고, 그래야만 했었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했을 거예요. 하지만 잘되었을 것 같지는 않아요. 제가 정확하게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요.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머니, 릭, 가정부 멜라니아, 아버지, 그 사람들이 가슴속에서 조시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는 다가갈 수가 없었을 거예요. 지금은 그걸 확실하게 알아요.” (442쪽)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 클라라가 과거를 회상하며 하는 이 말 속에 물음에 대한 답이 있는 듯 하다. 어떤 사람은 클라라의 저 말을 두고, ‘인공지능’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오직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감정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데 오히려 클라라의 저 말이 이미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으로부터 나온 말처럼 보이지는 않는가? 요컨대 클라라는 그 감응의 역량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 점에서 ‘인간만의 무언가’라는 ‘인간만이 가진 오만’을 해체하고 있는 셈이다. 클라라의 저 말은 그런 단순한 해석을 차단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누군가가, 아니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그것인 이유는 그것이 존재하는 한, 이미 어떤 관계 안에, 동시에 그 관계에 근거한 감정들 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다시 말해 그것은 오직 관계들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인간이든 인공지능이든 그 무엇이든 말이다. ‘클라라’가 그토록 독특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분명히 있지만 조시 안에 있는 게 아니었어요.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있었어요.”(442쪽)


곧바로 이어지는 클라라의 말은 그 점을 분명하게 한다. 이 말은 똑같이 클라라에게 돌려줄 수 있다.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분명히 있지만 클라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클라라를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있다.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조금씩은 다 다르다는 점에 각각이 모두 아주 특별하다. 그리고 동시에 그 모든 것들 중에 관계 속에 있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그것들은 아주 특별하다. 과연 인공지능 로봇 클라라는 정말 ‘인공’인 것일까? 인간이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그것은 ‘인공’이지만 ‘인간’ 역시 인간이 만드는 것 아닌가? 그러면 우리는 모두 ‘인공’이 아닌가? 우리는 계속 인간과 인공으로 관계 맺어야 하는가? 인간이 그렇게 특별한가? 

좋은 소설은, 좋은 글은 언제나 질문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점에서 『클라라와 태양』은 좋은 소설임에 분명하다. 거기에는 여전히 찾아내야 할 질문이 많다. 그 중 한 가지에 답하자면 이렇다. 특별한 건 인간이 아니라 애써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클라라처럼.
 
 

글_정승연(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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