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불교, 인도불교, 중국불교
*이 글은 <2021고미숙의 行설水설 – 달라이라마, 칸을 만나다!> 강의의 일부 내용입니다.
스승을 찾아서
조오 불상을 모신 조캉 사원은 순례의 마지막 귀의처는 되는데, 그 사원은 뭐가 없는 거예요? 승려가 없잖아요. 승려가 있고, 재가신자가 있고, 그렇게 불교를 일상에서 배우고 수행하는게 펼쳐져야 불교 국가가 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것을 바로 치송데쩬 왕이 했다는 거죠.
우리가 사원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 불상을 만드는 것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야겠다, 그러면 승려가 있어야 된다, 라고 생각한 것이죠. 승려가 있으려면 계를 주고 가르치는 스승이 있어야죠. 스승을 초청해야 돼요, 티벳에는 아직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인도에서 초청을 하는데, 바로 당시 불교의 핵심 공부처였던 나란다 대학으로부터 초청을 합니다. 이런 이유로 티벳 불교는 나란다 대학의 정통을 계승했다는 말이 있는데 중국 불교 쪽 자료에서는 이런 말이 전혀 안 나옵니다.
앞에서 송첸캄포왕 때에는 불상과 사원을 세우고, 산스크리트어를 본떠서 티벳문자를 만들었다고 했죠? 그러니까 문자가 만들어졌어, 사원도 세웠죠. 그럼 이제, 사원이 있으니깐 승려가 있어야 되고, 문자가 있으니깐 번역을 해야 될 거 아니겠어요? 불경을 옮겨야죠. 그래서 치송데쩬 왕은 스승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인도 불교의 최고의 정점이 있는 곳이 나란다 대학이었던 것입니다. 이게 7세기, 8세기 때 일입니다.
중국불교 대 인도불교
나란다 대학은 대승불교의 후기라고 할 수 있어요. 8세기에서 12세기로 가면, 인도에서 완전히 불교가 사라져요. 대승불교 마지막 후기의 중심지가 바로 나란다 대학이었다는 거죠. 그리고 그때 최고 학자가 누구냐? 샨타라크쉬타 (Santiraksita)입니다. 이분을 모르면 티벳 불교를 안다고 할 수가 없어요. 티벳은 지정학적인 위치상 중국과 인도 사이에 있는데, 당연히 중국 불교와 인도불교의 영향을 동시에 받겠죠. 근데 티벳은 중국이 아니라 인도와 깊은 관련을 맺게 됩니다. 일단 언어는 산스크리트어를 본 딴 티벳문자입니다. 또 치송데쩬 왕이 나란다 대학에서 최고 학자를 초빙했다면 당연히 이때 중국불교도 많이 들어와 있었겠죠, 문성공주, 금성 공주가 중국에서 왔잖아요. 그러면 인도불교 나란다 대학파하고, 중국 불교파가 묘한 긴장이 있지 않겠어요? 중국불교가 이때 어떤 상태였는지 지금 여러분이 짐작을 못하잖아요? 중국불교는 이미 당태종 때 현장법사가 있었어요. 현장법사가 인도에 가서, 나란다 대학에 가서, 그때에 대승경전을 다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은 중국식 불교로 변화, 발전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럼 중국식 불교의 대표적인 특징이 뭐냐? 바로 선불교입니다. 선불교하면 우리가 누구를 떠올려야 돼요? 보리달마, 달마대사입니다.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갔죠. 6세기에 중국에 갔으니 일찌감치 가신 거예요. 그래서 보리달마는 중국에 가서 선불교를 일으켰습니다. 중국 불교는 선불교로 굉장히 무르익어버린 거예요. 근데 티벳은 현장법사가 인도 전역을 휩쓸고 간 다음에야 나온, 더 수준이 높아진 인도불교를 만난 것입니다. 티벳은 처음 불교를 만났는데, 불교의 최고 수준을 만나는 이런 아주 경이로운 장면이 연출됩니다. 그래서 나중에 공개적인 대 논쟁을 통해, 중국불교가 인도불교에 패배하고 물러나게 됩니다.
샨타라크시타의 『중관장엄론』
이 모든 게 샨타라크시타, 이 분이 티벳에 오면서부터 그렇게 된 거예요. 인도 후기불교의 최대 사상가이자 티벳에 불교를 전한 장본인이에요. 이분이 남기신 책이 『중관 장엄론』 (中觀莊嚴論)입니다. 이름도 장엄해요, 중관 장엄론, 들어는 보셨나요? 중관도 어려운데, 중관이 장엄하데요, 세상에^^.
『중관장엄론』 설명문을 보면, “청변(清辨, Bhavyaviveka)의 중간 학설을 계승하고, 다르마 키르티(Dharmakīrti, 法稱)의 논리학을 이용하여 중관사상의 우위를 주장한 문헌.”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한국어로 말한 것 같긴 한데요^^. 저는 지금은 이 말을 조금 이해합니다. 청변이 누군지, 다르마 키르티가 누군지 조금이지만 알게 됐어요. 보충설명 하자면, 『중관장엄론』은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을 종합한 것으로, 모두 97 송으로 되어있는 책입니다. 무시무시한 책이에요. 이름 자체가 너무 무시무시하고, 설명은 더 무시무시하지요. 유식과 중관을 통합했다, 이런 얘기거든요. 그렇다고 무조건 겁먹을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여러분도 다 배우게 돼요. 왜냐면 배우고 싶잖아요, 너무 어려우니깐 배우고 싶잖아요 ^^. 왜, 너무 무서우니깐, 무서운데 자꾸 보는 거 있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될 거는…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초기 불교는 사성제를 위주로 해요. 사성제가 뭐냐? 고, 집, 멸, 도, 삶은 고통이다. 부처님이 12살 때 느꼈죠, 모두가 고통이구나. 그래서 고통의 원인과 본질을 봤더니 집착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집착을 버리면, 고통에서 해방되는구나, 이게 멸 입니다. 그 길을 닦으면 되겠구나가 도 입니다. 고집멸도, 이게 사성제거든요, 이게 초기불교의 핵심이에요. 근데 대승 불교로 가면 반야심경, 금강경 같은 경들이 나옵니다. 여기는 반야(prajñā,지혜)와 공이 핵심이에요. 지혜를 연마해야 합니다. 반야가 지혜이고 지혜의 핵심은 공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들어봤죠? 근데 다 자기 멋대로 이해하고 있죠.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다.
거기까지가 BC, 즉 AD가 시작되기 전인데, AD 1세기에 두 번째 붓다가 등장합니다. 용수 보살(龍樹, 나가르주나)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이 분이 제2의 붓다라고 불리게 된 게, 이 공 사상을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깨쳐서 불교 논리학을 완성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상을 특별히 중관사상이라고 해요. 용수보살의 중론은 너무나 유명한 논서예요. 너무 유명해서 모르면 지금 이 순간, 정말 삶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껴야 될 정도입니다. 그 사상을 중관사상이라고 해요.
그다음으로 유식이라는 게 등장을 합니다. 유식이 만들어낸 최고의 경구가 있습니다. 일체유심조, 들어봤나요? 우리가 불교하면 떠올리는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어…’ 이렇게 하는 게 유식에서 나온 말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중관사상에서 나왔고요.
그러니깐 중관이 나오고 나서 유식에 의해 중관이 약간 도전을 받았는데, 그 상황에서 중관사상을 다시 한번 업그레이드 한 이론이 샨타라크쉬타의 『중관장엄론』입니다. 그러면 이 위상을 알겠죠? 정말 최고의 경지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 거예요. 그리고 티벳에서는 이 스승을 모시고 온 거예요, 세상에, 지금 불교의 기초도 잘 모르는 유치원생인데, 당대 최고 수준의 학자를 모셔다가 유치원생들이 기본을 배우는 상황 같은 일이 이렇게 일어난 거죠.
이렇게 해서 사매 사원이라고 하는 최초의 수행하는 승려가 있는 사원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여섯 명의 티벳 사람들, 청년들에게 계를 줘서 승려가 탄생했어요. 그러면 승단이 만들어진 것 이지요. 이제 다 갖췄죠. 승려도 있고, 사원도 있고, 스승도 있고, 그리고 번역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강의_고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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