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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설수설

[행설수설] 쿠빌라이, 속도를 장악한 유목민

by 북드라망 2023. 10. 11.

쿠빌라이, 속도를 장악한 유목민

*이 글은  <2021고미숙의 行설水설 – 달라이라마, 칸을 만나다!> 강의의 일부 내용입니다.

 

칭기즈칸이 죽은 후에 중국정복은 몽골 제국의 미션이 됐어요. 몽골이 중국을 정복하기까지 과정이 거의 50년에서 60년이 걸립니다. 몽골 초원의 서쪽으로의 정복 전쟁과 중국을 정복할 때의 속도가 매우 다릅니다. 이게 너무 흥미롭지 않나요?
 

세계를 주름잡은 칭기즈칸의 손자들
1227년 이후, 30년 정도 지난후에, 1260년에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가 칸이 됩니다. 쿠빌라이 칸은 남송을 정복합니다. 쿠빌라이는 칭기즈칸의 막내아들인 톨루이의 자식입니다. 톨루이는 술을 많이 마셔서 이른 나이에 죽었지만, 막내아들의 부인인 소르칵타니(Sorqoqtani Beki Khatun)라는 여인이 혼자서 아들 넷을 키웁니다. 이 여인은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에요.  아들 네 명이 전부 전 세계를 지배하는 지도자가 됐어요. 결국 칭기즈칸의 네 명 아들보다도 칭기즈칸의 네 명의 손자가 더 훌륭하게 큰 셈입니다.

첫째 ‘몽케’, 그 다음이 ‘훌라구’, ‘쿠빌라이’, ‘아릭부케’라는 이름의 손자들입니다. 몽케는 대칸으로 선출이 되고, 둘째 훌라구는 전쟁 능력이 탁월해서 페르시아 전쟁에 투입이 됩니다. 셋째 쿠빌라이는 고비사막 남쪽의 몽골 영토에서 송나라를 정복해야 하는 미션을 받고 중국 쪽에 있었어요.

그런데 쿠빌라이는 싸움보다 잔치를 즐겼어요. 이 캐릭터가 정말로 흥미진진한데 잔치를 즐기다보니 몸이 뚱뚱해지고 통풍이 생겼습니다. 송나라를 정복해야 되는데 속도가 너무 느립니다. 자기 영토 안에서 도교와 불교 승려들 사이에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서 그것들을 수습하느라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어요. 그래서 훌라구가 바그다그를 휩쓸고 있는 동안 몽케가 직접 중국원정에 나섭니다. 몽케는 막내인 아릭부케한테 ‘네가 여길 지켜라’ 라고 하고 갔어요. 그런데 몽케가 군대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갈 때 날씨가 너무 더워서 많은 몽골 전사들이 이질에 걸려 설사를 하기 시작합니다. 천지자연이 정말 오묘하지요.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기본조건은 자연 기후입니다. 몽케도 여기서 앓아누웠습니다. 몸은 회복이 됐지만 1259년에 갑자기 돌연사로 죽어요.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 우구데이도 술 먹다가 죽었고, 막내아들 툴루이도 40세에 술 먹다 요절하고, 우구데이 아들 구유크도 암살당해 갑자기 죽었어요. 몽케도 일종의 돌연사를 한 셈입니다. 몽골 역사를 결정하는 건 지도자의 돌연사입니다. 이렇게 될 때마다 세계의 전쟁사가 바뀌게 되는 거죠.

그래서 남송을 향해 가던 몽케의 전진은 중단됩니다. 대칸이 죽었으니 새롭게 대칸을 뽑아야겠죠. 이때 둘째인 훌라구는 페르시아에 있었는데, 거기서 몽골까지 가기가 너무 멀어요. 그래서 몽골에 남아있던 막내 아릭부케가 쿠릴타이(Kurultai)를 열어서 대칸이 됩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쿠빌라이가 송나라에 관심을 가지고 ‘막내인 아릭부케가 아니라 내가 대칸이 돼야지’라는 마음을 냅니다.
 

 

누가 대칸이 될 것인가?
쿠빌라이는 중국 근경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과 쿠릴타이를 열어서 스스로 자신을 대칸으로 임명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전체 부족이 모이지 않았기 때문에 쿠빌라이는 명분 없는 대칸이 됩니다. 이건 일종의 쿠빌라이의 쿠데타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릭부케와 쿠빌라이의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쿠빌라이는 중국 쪽에서 몽골로 가는 식량경로를 차단합니다. 이 시기에 몽골 초원은 이상저온 현상으로 20년 동안 가축들이 기아에 허덕이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릭부케는 열심히 싸웠지만, 그리고 정식 대칸이라는 명분이 있었지만, 결국 쿠빌라이에게 지고 맙니다. 저는 아릭부케가 몸무게가 밀리지 않았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전까지 전투는 안 하고 먹기만 했던 쿠빌라이의 뚱뚱한 몸무게에 사람들이 ‘저기에 뭐가 있을지도 몰라’ 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아릭부케는 여러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나서 4년 만에 쿠빌라이에게 항복을 합니다. 그때부터 쿠빌라이 대칸의 행로가 시작됩니다.
 

쿠빌라이의 칭기즈칸과는 너무 다른 속도
쿠빌라이는 느려 터지고 뚱뚱하지만 중국을 어떻게 다뤄야 되는지에 관해서는 천재적이었습니다. 중국 역사상 이렇게 중국을 잘 아는 황제는 없었어요. 쿠빌라이는 중국이라는 땅의 잠재력과 중국문명을 다스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알았습니다. 중국은 천의 사상을 가져요. 그래서 쿠빌라이는 중국인들의 마음에 맞추기 위해 원형이정의 원, 중천 건을 사용하여 ‘원나라’라는 나라 명을 세웁니다. 과거 몽케가 느끼기에는 속 터지게 느린 쿠빌라이의 속도가 사실은 중국문화를 배우고 학습하기 위한 속도였던 것입니다. 쿠빌라이가 한 정복은 칭기즈칸도 해보지 못했던 정복입니다. 옛날 칭기즈칸 시대라면 다 휩쓸어서 초원으로 만들어버리려고 하겠지만 쿠빌라이는 천천히 치밀하게, 가능하면 전투를 안 하고 사람들을 안 죽이고 중국의 문명과 문화를 그대로 어떻게든 흡수하려 합니다. 이런 속도를 가질 수 있다는 게 참 대단한 거 같아요.
 

느린 속도이기에 나올 수 있는 쿠빌라이의 중국 수용력
쿠빌라이는 중국의 양양과 번성이란 쌍둥이 도시를 점령합니다. 그때 거기에는 굉장히 뛰어난 여문환이라는 충성심 투철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장군은 정예부대와 함께 그 성에서 몽골 군대를 맞서고 있었어요. 몽골군하고 대치를 하는데 참으로 기묘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몽골군은 거의 공격하지 않았다. 대신 토목공사를 시작했다. 10만의 대병단은 전선에 도착하자 곳곳에서 땅을 파 뒤집었다. 해자를 파고 그 흙으로 성채를 쌓아올렸다.’ 사기가 충전했던 남송의 군대는 ‘쟤들 왜 안 오지?’ 라고 생각하며 손을 놓고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 처합니다. 어느 순간에 양양과 번성 두 도시를 둘러싼 큰 동그라미 성이 생깁니다. 남송 쪽에서 싸우기 위해 나갔지만 남송군이 공격을 하면 몽골군은 몸을 숨겨버립니다. 또 몽골군은 도망치면서 폭탄 같은 돌맹이를 남송군에게 투하합니다. 남송군이 다치는 것 외에는 몽골군이 타격을 입히는 게 없게 되었습니다. 또 몽골군은 계속 성을 지키는 게 아니라, 일부는 북방 초원에 갔다가 다시 오는 교대 근무를 합니다. 몽골군 쪽에서는 전쟁에 받는 스트레스가 없고 오히려 재밌지요.

또 몽골군이 주둔한 곳에는 광대들과 여성들이 오면서 굉장히 화려한 도시, 시장이 만들어집니다. 저쪽 성안에서 농성하는 여문환의 군대는 이걸 전부 지켜보고 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몇 년을 대치를 하고 있으니 여문환의 군대는 지쳤지만, 몽골군은 계속 활기를 띄었어요. 결국 훌라구가 보내준 이란의 발달된 폭탄물을 투하하게 되어 남송군은 이길 수가 없는 상황에 처합니다. 그래서 여문환은 항복을 하고 그 조건으로 우리 주민들을 다치게 하지 말고 다 살려달라고 부탁합니다. 이 조건으로 성문을 열었어요. 보통은 그런 약속은 어기는데, 쿠빌라이는 한 사람도 죽이지 않고 적의 장군인 여문환을 다시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속도전은 속도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
이 사건 이후 중국 사방에 소문이 납니다. 그래서 쿠빌라이는 전쟁을 하러가지만 마치 행진을 하는 것처럼 성문이 저절로 열렸습니다. 이 전쟁은 파괴와 살육이 없는 전쟁이 되었습니다. 칭기즈칸이 처음에 했던 전쟁과는 속도도 양상도, 진행방향도 너무 다릅니다. 결국 아주 허무하게 남송은 무너집니다. 너무 조용히 끝이 나서 중국 시민들 중에는 심지어 남송이 망하고 원나라가 세워졌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칭기즈칸의 속도와 쿠빌라이 칸의 속도를 보면 유목민은 무지하게 빠르다가 엄청 느려지기도 하는, 속도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칭기즈칸의 이런 빠른 속도의 내공이 있었기에, 그로부터 쿠빌라이 칸의 느린 속도가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이런 역사를 보면서 ‘나는 내 인생을 어떤 속도로 조율할까?’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도 어떨 때는 정말 번개처럼 빨라야 되고, 때로는 정말 아무런 속도가 없다고 느껴질 만큼 느려야 될 때가 있는 거죠.
 

강의_고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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