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꽃을 피운 인도불교, 그 꽃을 티벳으로 들고 온 아티샤 존자
*이 글은 <2021고미숙의 行설水설 – 달라이라마, 칸을 만나다!> 강의의 일부 내용입니다.
폐불 정책을 피해 일상으로 내려온 티벳 불교
8세기 중반이 지나면서 티벳에 변화가 도래합니다. 랑다르마(Langdarma)라는 왕이 티벳의 불교를 탄압하면서 티벳은 불교에서 샤머니즘 상태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8세기 말쯤에 이름 없는 한 비구가 수행을 하던 토굴에서 나와서, 라싸 한가운데로 활을 쏘아 랑다르마를 죽입니다. 그 순간 하나로 통일됐던 티벳 왕국이 해체됩니다. 그러면서 티벳은 아주 작은 왕국들로 나누어집니다. 이와 관련해서 어떤 왕국들이 있었는지에 대한 역사기록들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티벳에 불교가 들어온 이후로는 불교의 역사를 제외한 여러 왕국들의 크고 작은 싸움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나라가 해체되면서 사람들은 불심에 의지하거나 벤교를 믿게 되었습니다. 특이하게도 티벳 전체적으로는 폐불기이지만 불교는 일상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동안 티벳 불교의 중심이었던 중관장엄론(8세기, 산타라크쉬타가 티벳에 가져온 불교 논리학)은 어떻게 됐을까요? 중관장엄론을 배우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랑다르마 왕이 승단, 사원 같은 걸 해체했잖아요. 그러면서 불교는 사원을 떠나 티벳 사람들의 일상으로 들어갑니다. 밀교가 성행 하게 된 것입니다.
인도 불교의 종언, 티벳 불교의 부흥
티벳은 11세기 무렵에 불교가 다시 부흥하게 됩니다. 부흥이 가능했던 제일 중요한 요인은 승단과 계율의 성립이었습니다. 이 소명을 담당한 분이 바로 아티샤(Atisha) 존자입니다. 이 분이 바로 나란다의 전통을 잇는 나란다 17논사 중 한 분입니다. 이 분으로 인해 티벳에 계율과 수행을 강력하게 표방하는 종파를 하나 구성하는데 이것을 ‘까담파(Kadam)’라고 합니다. 이 파가 몇 백 년이 지난 다음에야 ‘겔룩파’가 됩니다. 겔룩파는 지금 달라이 라마가 포함된 종파입니다.
아티샤 존자가 티벳에 오기 전까지의 과정에는 ‘구게 왕국’이라는 나라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티벳은 수많은 왕국들로 쪼개졌는데 그 중에서 구게 왕국은 실크로드의 사막에 홀연히 형성됐다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왕국이에요. 이 왕국의 왕은 자신은 승려가 되고 조카한테 왕위를 양위합니다. 그리고 스물한 명의 청년들에게 불교랑 산스크리트어를 배워오라고 인도로 보냈어요. 근데 두 명을 제외하고는 안 돌아왔어요. 돌아온 두 사람은 번역, 역경을 굉장히 많이 했다고 합니다.
한편 이때 인도에서는 무슬림이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슬림은 언제 나타났죠? 바로 송첸캄포(581년 ~ 649년) 왕 때 무슬림이 나타납니다. 무하마드는 7세기 전반에 계시를 받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예수님이 탄생해서 유럽의 종교가 되었다면 이번에는 무하마드의 계시로 아랍인만의 종교가 탄생합니다. 유대인만의 종교가 아닌 이슬람이 7세기에 등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인도 불교가 절정에 이르는 바로 그때 무슬림들이 인도에 들어왔습니다. 인도불교는 무슬림들로 인해 종언을 고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티벳 사람들은 절정기의 인도불교가 소멸되기 전에 인도에서 불교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래서 티벳 사람들은 절정이 된 불교의 마지막 유산을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목숨이 담긴 금덩이
이 구게 왕국의 왕이 인도의 위대한 스승 얘기를 들은 거예요. 그게 바로 아티샤 존자였던 거죠. 그래서 ‘저분을 티벳에 초대해야겠다’, ‘초대하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정성을 다해서 쓴 심금을 울리는 편지와 금을 보내야지’. 그래서 엄청난 양의 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아티샤존자가 그걸 다 돌려보내죠. 자신은 인도에 남아서 인도 불교를 지켜야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존자의 말을 금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금을 더 모아야겠다’, ‘금을 더 약탈해 와야겠다’는 유목민들만이 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냅니다. 그 주변에 조그만 무슬림나라들이 많았는데 ‘저 작은 나라를 약탈해서 금을 뺏어와야지’ 이러면서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을 했다가 이 왕이 포로로 사로잡혔습니다. 그러자 무슬림 왕이 ‘야 너 불교를 버리면 자유를 주겠어’ 이렇게 말합니다. 무슬림들은 불교나 다른 모든 종교를 우상숭배자라고 합니다. 이게 무슬림의 대단한 힘이면서도 폭력적인 점입니다. 무슬림은 신에 대한 아무런 상이 없습니다. 무슬림은 신을 형상화할 수 없다고 해요. 또 무슬림은 인간이 때에 따라서는 신의 형상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 안 합니다. 그래서 신에 대한 상을 갖고 있으면 무조건 파괴합니다. 상대의 말을 들으려하지 않는 무슬림의 이런 점이 폭력적인 것입니다.
무슬림 왕이 종교를 포기하라고 했는데 이 포로가 당연히 개종을 거부합니다. 그러자 무슬림 왕은, 너의 몸무게에 해당하는 금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너무 이해타산이 밝은 거지요.
그래서 구게 왕국의 젊은 조카인 왕이 금을 긁어모았는데 머리 무게만큼이 부족했습니다. 근데 몸에서 머리가 제일 무겁지 않나요? 어쨌든 조카가 아주 실망을 해서 지하 감옥에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삼촌하고 대화를 나눕니다. 포로가 된 삼촌이 조카에게 말합니다. ‘이런 일을 이렇게 해내는 걸 보니 네가 참 훌륭하다. 나는 여기서 살아서 나가더라도 앞으로 10년 더 살 텐데, 그건 별 의미가 없다. 나는 충분히 살았다. 이 금을 가지고 아티샤 존자를 모셔 와라.’ 이분은 정말 금으로 밖에는 마음을 표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근데 이제는 뭘 건 건가요? 거기 목숨을 담았잖아요. 이제 이 금은 그냥 금이 아니게 된 거지요. 그렇게 하고 이 삼촌은 ‘나는 다음 생에 아티샤 존자의 제자가 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조카는 그 금을 인도로 보냈고 삼촌은 참수 당합니다. 달라이 라마는 어렸을 때 포탈라 궁에서 이 목 없는 몸이 방부 처리된 걸 봤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그게 내려온 거죠.
티벳과 아티샤 존자의 인연
이렇게까지 했는데 아티샤 존자가 티벳에 안 오면 되게 부담스럽지 않겠어요. 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금에 구게 왕국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다 담겼잖아요. 그러니 아티샤 존자가 티벳에 가도 되는지 회의를 했을 거 아닙니까. ‘티벳에 가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대신 3년만 있다가 와라’ 라고 결정이 돼서 아티샤 존자가 티벳에 가게 됩니다. 아티샤 존자는 인도네시아, 이런 곳을 다니면서 최고의 경지까지 수행한 수행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관세음보살의 화신을 만나게 됩니다. ‘북쪽으로 가라, 많은 이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거기 가서 일해야 한다.’ 그런데 또 한 샤먼인 여성이 등장해서 ‘티벳을 가면 사명은 크게 성공한다. 근데 수명이 줄어들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여기 있으면 92세까지 살 수 있는데, 거기 가면 수명이 20년 줄어든다.’ 그래서 아티샤 존자는 결심을 합니다. ‘중생의 삶에 이익이 된다면 내 삶에서 20년은 충분히 희생할 가치가 있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아티샤 존자는 티벳으로 갔습니다.
처음엔 아티샤 존자가 티벳에 3년만 갔다 온다고 했잖아요. 근데 사람은 사람을 통해서 연결됩니다. 내가 ‘굉장한 미션을 갖고 있다’는 건 너무 추상적이잖아요, 이 미션으로 사는 게 아니에요. 이 미션을 수행하면서 사람을 만나면서 계속 거기서 나를 변화시키고 내 마음의 울림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수행의 최고 경지를 이룬 이 존자도 티벳에서 3년이 지난 이후에도 계속 티벳에 계셨습니다. 그 이유는 라마 돈 덴빠(Dromton Gyelwa Jungne)라는 운명적인 제자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제자하고 완전히 혼연일체가 되었기 때문에 인도로 돌아갈 생각이 안 들었겠죠. 그래서 아티샤 존자는 티벳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아티샤 존자는 라마 돈 덴빠를 후계자로 지정하면서 나에게 보여준 것과 같은 존경을 그에게 보여주라 합니다. 그래서 이 제자가 스승의 법맥을 까담파라고 정리합니다. 까담파는 나중에 겔룩파로 바뀝니다. 그리고 겔룩파에서 1대 달라이 라마가 나왔을 때, 달라이 라마를 바로 이 라마 돈 덴빠의 환생자라 생각합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티벳에 아티샤 존자가 오셔서 세워진 계율과 공부예요. 부처님이 내려주신 율보다 더 중요한 게 없는데, 티벳 불교에서 잊혔던 이 율이 다시 확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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