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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설수설

[행설수설] 초원의 삶과 사랑-약탈혼과 칭기즈칸의 탄생

by 북드라망 2023. 9. 12.

초원의 삶과 사랑-약탈혼과 칭기즈칸의 탄생

*이 글은  <2021고미숙의 行설水설 – 달라이라마, 칸을 만나다!> 강의의 일부 내용입니다.


 
역사를 보면 너무나 자명합니다. 하지만 역사를 가져다가 자신의 삶에 적용을 안 하는 게 문제예요. 이상하게 우리들은 역사를 자기의 삶에 안 적용해요. ‘역사에서 뭐가 실패했기 때문에 절대 이렇게 하지 말아야지’를 자기 삶에 적용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역사를 내게 적용한다는 것은 주변 조건에 따라서 끊임없이 문명의 내용과 형식이 바뀐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도 그런 조건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게 역사로부터 배우는 겁니다. ‘누가 정복에 성공했고 나중에 아쉽게 실패했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너무 유치한 생각입니다. 그러면 초원에서 어떤 역사의 변화가 일어났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납치당한 신부로부터 태어난 테무진
12세기 중엽에 몽골 초원에 한 젊은 커플이 수레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굉장히 풍요로웠던 메르키트 족 출신의 젊은 전사와 16살쯤 된 그의 어린 신부 호엘룬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 둘이 결혼을 해서 메르키트 족이 있는 곳으로 가던 중이었어요. 그런데 사냥꾼들이 수레를 덮쳤습니다. 약탈의 목표가 여자이기 때문에 호엘룬은 당장 남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납치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남편에게는 도망가라고 합니다. ‘당신이 살아만 있어도 처녀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그 여자를 나 대신에 신부로 삼고, 호엘룬이라고 부르세요.’ 그리고 저고리를 남편에게 던집니다. ‘이걸 가져가요, 내 냄새를 맡으면서 가요.’ 소름 끼치네요. 그래서 신랑이 그걸 받아서 고개를 넘어 호엘룬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이 여인은 자신의 가슴에 담긴 감정을 토해냅니다. 그녀가 크게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거기에 흐르던 오넌 강이 물결치고 숲과 골짜기가 울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초원에서 살아가는 방식이었던 것 입니다.

호엘룬을 납치한 사람은 아주 가난하고 미미한 족에 속한 보르티긴이라는 씨족의 예수게이라는 남자였습니다. 이미 아내와 아들이 있는 남자였습니다. 납치된 16살짜리 신부는 가장자리의 가장 척박한 땅에서 예수게이의 아이를 낳습니다. 그 아기는 오른손에 핏덩어리를 움켜쥐고 태어났어요. 이때 아버지 예수게일은 타타르족과 싸우다가 테무진 우게라는 이름의 전사를 죽입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자기가 죽인 전사의 이름을 따서 테무진이라고 붙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얼마 뒤에 테무진이 아홉 살쯤 됐을 때 테무진에게 신부를 구해주고, 자신은 타타르족에 의하여 독살당합니다. 이렇게 아버지는 테무진이 태어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가장이 없어진 이 가족은 부족에게 버림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부족이 사냥꾼이 없는 가족들을 끌고 다니면서 먹여 살려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변경으로 가족 모두가 쫓겨납니다. 엄마를 포함해서 가족 모두가 나가서 산열매든 들쥐든 다람쥐든 뭐든 간에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무조건 구해옵니다, 그렇게 가족들은 밑바닥 사냥꾼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테무진에게는 어머니가 다른 이복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복형이 사냥감을 자꾸 뺏어갑니다. 그리고 가족 내에 가장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이복형이 어른이 되면 테무진의 엄마와 결혼을 해야 합니다. 이런 게 몽골의 풍속이었어요. 초원에서 산다는 게 이렇게 소름 끼치는 일이었던 것이죠. 테무진은 이복형이 너무 미운데 또 나중에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래서 막내와 합동으로 이복형을 죽입니다. 그래서 테무진은 살인자가 되고 노예 신분으로 몰락합니다.

 


초원의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단단해지는 테무진
테무진은 노예로서 손목에 칼을 차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테무진에게 계속 밥을 갖다 줍니다. 이 손을 움직일 수가 없어서 누가 먹여주지 않는 한 굶어죽는 건데 계속 누군가가 밥을 먹여줍니다. 그리고 어느 날 탈출시켜줍니다. 이유는 없어요. 그냥 좋았나 봐요. 그냥 매력이 있었나 봐요(^^). 그렇게 테무진은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면서 유년기를 통과합니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짝을 지어준다고 데려왔을 때, 테무진은 아홉 살이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데려와 만난 보르테라는 여인과 깊은 사랑을 나눠요. 열 몇 살인데 여인은 아니죠(^^), 그냥 아버지가 보기에 얘네 둘이 굉장히 서로 좋아하는구나 하고 짝을 맺어준 것이죠. 그다음에 아버지는 독살을 당한 것입니다.

그니깐 테무진의 청춘은 정말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겪은 것입니다. 10대에 결혼을 해서 가장이 되고 사랑과 우정을 만끽한 것입니다. 가장 변경의 밑바닥에서 지독한 가난을 겪으면서 테무진은 뼈와 살이 너무나도 단단한 전사로 성장을 합니다. 여러분이 왜 물렁물렁한지 알겠죠? 삶이 얼마나 모질고 치열합니까. 삶에서 살아남는 게 목적이었는데 결국 살아남았습니다. 테무진이 사냥꾼에서 유목민의 전사로 변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8년 뒤에 테무진의 어머니 호엘룬을 빼앗겼던 메르키트족이 복수하러 와요. 이전에는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족의 전사를 죽이고 그 이름을 아들한테 줬지요. 그 때문에 아버지는 독살 당했지요. 18년이 지난 다음에 신부를 빼앗겼던 메르키트족이 복수를 하기 위해 테무진의 가족이 머무르고 있는 텐트를 급습합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객이었던 노파가 텐트에 같이 묵고 있었어요. 이 노파가 밤잠이 없으니 멀리서 오는 말발굽 소리를 들은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을 깨워서 테무진이 가족을 데리고 도망칩니다. 그런데 가족들을 다 데리고 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테무진의 젊은 신부인 보르테가 납치를 당합니다.

초원에서는 정착민들처럼 신부를 약탈했다고 해서 여기에 죄의식이라든가, ‘내가, 약탈된 여인의 아들이잖아? 근데 내 아내를 또 약탈당했어.’ 와 같은 생각은 작동하기가 어렵습니다. 나도 이렇게 생존하고, 저들도 저렇게 생존하는 것입니다. 이게 정주민들과 완전히 달라지는 지점입니다. 신부를 약탈당하면 그냥 다른 여성을 또 약탈하든지, 정혼을 하든지 또 결혼을 하면 되는 것이죠.

 

훗날 칭기즈 칸으로 불리는 테무진

 

신부를 포기하지 않고 자연을 향해 간절히 기도한 테무진
여기서 큰 변곡점이 생기는데, 테무진은 보르테를 포기할 수가 없었어요. 보르테에 대한 사랑이 유목민의 생존 방식을 뛰어넘는 어떤 전투를 하게 만듭니다. 이 과정이 정말 흥미로운데, 테무진은 신의 산이라고 불리는 부루칸 칼툰이라는 숲으로 가서 평생을 좌우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테무진은 영원한 푸른 하늘이란 뜻의 텡그리를 신으로 섬겨요.

일단 테무진은 메르키트의 손에 죽지 않은 것을 고맙게 여기고 그를 보호해준 신과 하늘을 가로질러 달려가는 해에게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그다음에 말발굽 소리를 먼저 듣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구해주었던 노파한테 특별한 감사기도를 드리고 허공과 땅에 말젖을 뿌립니다. 이게 신을 섬기는 방식인 것입니다. 그다음에 허리띠를 풀어 목에 감습니다. 이건 ‘나는 자신의 힘을 완전히 제거하고 신들 앞에서 무장 해제되었다.’라는 표현이래요. 그다음에 아홉 번을 엎드려서, 해와 성스러운 산 앞에 머리를 조아립니다.

사흘 동안 기도를 드리고, 그를 특별히 보호해주는 이 산과 오랫동안 내밀한 영적 관계를 유지합니다. 이 사건 이후로 부르칸 칼툰은 그의 힘의 원천이 됩니다. 이후에도 테무진은 무언가를 결정하기 전에 이 성산에 와서 기도를 하고 결정합니다.

그러면 테무진이 무슨 결정을 했겠어요? 다시 신부를 찾아와야겠다고 결정합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 힘이 없기 때문에 테무진은 당시 최대 부족의 도움을 얻으려합니다. 최대 부족의 추장인 옹 칸이라는 인물에게 메르키트 족을 습격하자고 설득합니다. 그래서 합동으로 메르키트의 게르를 약탈합니다. 테무진은 게르마다 돌아다니면서 계속 보르테를 부릅니다. 근데 보르테는 이미 나이 든 전사의 부인이 되었기에 수레에 실려 도망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도망을 가다가 보르테는 테무진의 절규소리를 듣고 수레에서 뛰어내립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만납니다.

테무진이 그냥 보르테 포기하고 또 다른 신부를 약탈해서 그냥 살았다면, 테무진은 칭기즈칸이 될 수 없었을 것 입니다. 보르테를 다시 찾아오는 이 과정이 결정적인 변곡점이 된 거겠죠. 저는 몽골사에 나오는 여인들의 삶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여인들의 삶은 어떤 거룩함과 헌신의 수준을 넘어서 생명력 그 자체입니다. 그러면서 자식을 키우고 자식들을 대칸으로 만드는 여인들의 삶이 진짜 너무 모질고, ‘사는 게 이런 거구나, 이렇게 사무치게 사는 거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고 팍팍하고 허무할까요? 삶의 모진 그 힘을 모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우리가 생명력을 끌어내질 못하기 때문에 살맛이 안 나는 것이 아닐까요.

 

강의_고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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