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구원하는 삶
(리뷰도서 : 고미숙,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
1등 박보경
지구에서 피어나 숨 쉬고 살면서 나는 매 순간 어떤 삶, 어떤 나를 기대하고 상상했을까. 9살엔 창의력 넘치는 에디슨이 되고 싶었고, 15살엔 정의로운 유관순이 되고 싶었다. 18살엔 책과 신문을 읽으며 ‘모든 생명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부당한 차별이 없어지기를, 억울한 죽음이 사라지기를, 돈보다 생명이 우선이기를 바랐다. 제도를 바꾸고, 잘못된 관습을 바로잡으면 세상은 한 발 나아질 거라 여겼다. 매일 활기찬 나를 상상했지만, 상상과 현실은 달랐다. 성인이 된 나는 시시때때로 우울했고, 시민단체 활동가 삶은 매일 싸움과 투쟁이었다. 자본, 여성, 환경, 앞뒤 옆 사람과 갈등…. 삶은 늘 파도였고 나는 매번 부서졌다. 거대한 기후 위기와 함께 서른을 맞이했다. 그 사이 나는 꽤 자주 쓰러졌고, 늦여름엔 습관처럼 수액과 비타민 주사를 맞으며 지냈다. 이건 상상했던 내가 아니다. 내가 꿈꾼 삶이 아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세상이 나를 가만두지 않아!’라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내게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가 왔다. “사회를 바꾸는 혁명과 소수자를 위한 운동은 아주 종종 헌신과 희생으로 귀결되곤 한다. 혁명을 위해 자신을 내팽개치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혁명인가? 내가 나를 구원하지 못하는 혁명이 대체 누구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고미숙,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 북드라망, 70쪽) 뺨 한쪽을 쌔게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저자는 단체와 개인, 활동과 일상에서 벌어지는 이런 간극을 통찰하지 못하면 혁명이든 진보든 별무소용이라 말한다. 책에서는 이런 간극이 생기는 원인으로 ‘자연과의 단절’을 이야기하며, 실무적 투쟁 너머 인생과 자연, 몸과 우주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자연과 삶을 연결시킬 수 있을까.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에서는 그 연결고리로 ‘사주 명리’를 이야기 한다. 사주는 미신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자연의 리듬이자 선조들은 자연의 이치를 관찰하며 삶의 지혜를 연마했다고 말한다. 살펴보니 때에 맞는 계절의 순환, 생성 소멸되는 자연의 흐름이 있고, 흐름 따라 사는 식물과 동물이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사주를 통해 나를 탐구하는 건, 잊고 살았던 자연과의 연결성을 확립하는 것이자 우주의 이치를 통해 삶의 방향을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광장에 나가 기후 위기에 대한 절박함을 외치고, 자연과 공생하자며 산골로 이사까지 했지만 정작 내가 중요한 자연임을 잊고, 생명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선 무지했다. 이거야말로 끔찍한 모순 아닌가.
책에선 진정한 혁명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한다. 출발점은 내 운명, 나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음양오행으로 이루어진 사주팔자를 보면 내가 어떤 방향으로 기운을 쓰는지, 감정, 첫인상, 신체와의 연결 등 다양한 모습을 입체적으로 알 수 있다. 태어난 때를 바탕으로 나에게 이런 자연의 리듬이 담겨 있는 걸 알면, 세상엔 오행으로 구성된 다양한 생명이 있다는 것도 자연스레 알게 된다. 오행이 균일하게 있는 완벽한 사주팔자란 존재할 수 없으며 모두들 타고난 기운이 한 쪽으로 쏠려있거나, 기울어져 있다. 사주를 선과 악, 길과 흉으로 보는 건 시대적, 사회적 배치에 따른 욕망의 산물일 뿐이다. 욕망으로 덕지덕지 붙은 사회적 배치에서 벗어나야 나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운명은 매 순간 내 안에 있는 씨앗과 만나 궤적이 만들어진다. 내 삶에 무차별적으로 돌진하는 게 아니다. 하여, 달려오는 상황을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따라 운명은 끊임없이 변한다. 세상이 나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는 말은 틀렸다. 내 삶의 주인은 나다. 저자는 타고난 습속대로 사는 것이 팔자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명은 순환해야 한다고 말한다. 순환되지 않은 팔자는 나를 살리기도 하지만, 죽이기도 한다. 나에게 필요한 기운을 찾아 기울어진 사주 구성을 자유자재로 순환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놓인다. 상상해 본다. 어떤 권력과 자본에도 휘둘리지 않고, 자기에 대한 긍지로 충만한 사람. 파도치는 삶을 자유롭게 서핑하는 사람. 그러려면 욕망의 배치를 바꾸고, 습속을 거슬러 팔자를 순환해야 한다.
여전히 나는 모든 생명이 행복한 세상을 바라며 기도한다. 다만, 실천 방향을 틀었다. 내 운명의 주인이 되는 것으로! 내가 선 자리를 해방의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것으로. 매 순간 마주하는 일상 속에서 한발 한발 운명을 거슬러 갈 것이다. 당당하게. 바뀐 일상은 관계의 장을 바꾸고, 서로를 물들이겠지. 어떤 개인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건 하나, 혁명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지금 여기서 내가 나를 구원하는 것. 오직 그것뿐.
'지난 연재 ▽ > 리뷰대회 당선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뼘리뷰대회 당선작] 묻고 마주하며 당당하게 나아가라 (0) | 2023.05.25 |
---|---|
[한뼘리뷰대회 당선작] ‘초심지인’의 동기와 비전, 회향 (0) | 2023.05.24 |
[한뼘리뷰대회 당선작] 품삯 획득을 위한 삶 vs 진정한 전문가 (0) | 2023.05.23 |
[한뼘리뷰대회 당선작] 공동체, 당당한 삶을 위한 도구 (0) | 2022.05.27 |
[한뼘리뷰대회 당선작] 버내큘러, 내 삶에 대해 고민하는 태도 (0) | 2022.05.27 |
[한뼘리뷰대회 당선작] 리뷰 도서 : 이반 일리치 강의 (0) | 2022.05.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