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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왔다 2

[아기가왔다2] 아기가 왔다, 신이 왔다

by 북드라망 2023. 5. 10.

아기가 왔다, 이 왔다


나는 평소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가끔(?) 찾을 때가 있는데, 결혼한 지 5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을 때가 그랬다. 무관성-무식상 부부여서 그런 건지, 그냥 뭘 해도 안 생겼다. 이쯤 되니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더라. 그러길 5년, 아내도 마흔 살이 되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는지, 시험관이라도 하자며 대치 중이었는데 그 무렵 갑자기 아이가 왔다. 그날 그 감동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그때 가장 먼저 내뱉은 말이 뭐였는지 아는가. “하느님 감사합니다.”였다. 신기할 노릇이다. 신을 믿지 않는 내가 그 감동을 하늘에 돌리다니. 그 순간 내가 떠올린 하늘은 분명 예수도 붓다도 아니었다. 그냥 막연한 하늘, 하느님이었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완전한 존재, 전능한 존재로 신을 떠올린다면, 그 완전함과 전능함이 가장 잘 보여주는 건 신의 본성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말한다. 불완전하고 무능한 존재라는 인간의 자기인식이 완전하고 전능한 존재인 신을 만든다는 것이다. 하여 스피노자는 창조주, 인격신, 더 나아가 그 어떤 신이라도, 신은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질에 따라 신을 숭배하는 상이한 방식 속에 만들어진’(『윤리학』, 스피노자, 진태원 옮김, 1부 부록) 하나의 ‘자기 상상의 변용들’(같은 책, 1부 부록)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상상한대로 신을 경험하는 것이다. 내가 복을 구하는 마음으로 만나길 소원한 기복신(祈福神)처럼 말이다. 


문제는 이런 신에 대한 상상이 상상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 삶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상을 보라. 우리는 자신이 믿는 상상들을 온갖 신의 대리물로 세우고, 그 대리물을 통해 자신의 결핍이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 돈이 그렇고, 직장이 그렇고, 쾌락이 그렇다. 인류가 왜 그토록 수천 년간 신이라는 문제에 매달렸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신을 어떻게 경험하고 이해하는가의 문제가 곧 우리 삶이기 때문이다. 

 

 


매 순간 신을 경험하는 중
‘신’하면 떠오르는 관념이 있다. 대체로 창조주, 인격신, 구원신 등이 그러한데, 스피노자의 신은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몇 가지 형상으로 표현되는 전능함이라니, 이 얼마나 왜소한 신인가. 하여 스피노자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하여 신에 이르는 사유가 아니라 신으로부터 출발하여 만물에 이르는 사유를 전개한다. 인간으로부터 신을 사유하게 되면 자주 인간적인 신을 맞닥뜨려서다. 그 결과 스피노자는 자연을 신으로 이해하기에 이른다. 개개의 자연물이 아니라 무한하게 많은 것들을,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을 통해서,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생산하는 필연적 원인으로서의 자연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근거 혹은 체계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보이지 않으면서도 머물지 않는 곳이 없고, 쉼 없이 작동하여 모든 것을 낳는 제1원인, 그것이 자연 아닌가. 그래서 스피노자에게 신은 ‘실체’다. 실재하는 것이다. 

 

신을 다르게 이해하니 양태도 다르게 이해되었다. 스피노자 이전까지의 철학자들에게서 양태는 실재들이 존재하는 방식, 태도 등을 의미할 뿐, 실재들 자체를 가리키지 않았다. 때문에 양태는 실재를 통해서만 인식되고, 그 판명함은 신에 의해 보증 받아야만 했다. 실재 따로, 존재방식 따로. 그러나 스피노자에게 존재방식은 실재와 다르지 않았다. 실재는 실재가 존재하는 그러한 방식이 아니고서는 실재할 수 없다. 하여 스피노자는 양태를 ‘나는 실체의 변용들, 곧 다른 것 안에 있으며 또한 이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되는 것을 양태로 이해한다.’(정리5)고 새롭게 정의하며, 양태에 ‘신의 변용’을 부여한다. 그 결과 ‘양태’는 신의 활동으로 만들어진 모든 생성물 즉, 나무, 인간과 같은 물리적 실재들(연장양태)에서부터 개념, 정서 등과 같은 온갖 심리적 실재들(사유양태)을 아우르게 되었다. 모든 양태가 신의 표현인 것이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변용이란 거칠게 표현해서 변화된 결과물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든다. 양태가 신의 변용이라는 건 알겠는데, 양태입장에선 자신이 신의 변용이라는 걸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일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신의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더 신뢰하지 않는가. 게다가 양태는 부분이다. 부분이 어떻게 전체인 신을 인식한단 말인가. 이에 스피노자는 신 또는 자연은 ‘동일한 원인들의 연관 및 질서’(2부 정리7 주석)로 이루어져 있는 ‘하나’라고 말한다. 그러한 즉, 양태는 ‘동일한 원인들의 연관 및 질서’가 때로는 이런 모습으로, 때로는 저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실재이기에, 특정한 양태를 만나는 일은 부분과 만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자연 전체의 연관 및 질서’와 만나는 일과도 같다. 모든 양태는 자연 전체의 연관 및 질서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양태인 인간이 신을 인식할 수 있는 단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신과 양태가 공유하고 있는 ‘변용’능력이다. 

 

사실 특정한 양태는 부분인 듯 보여도, 다른 양태에 의해 규정됨과 동시에 상호 변용하고, 그 다른 양태는 또 다른 양태에 의해 규정됨과 동시에 상호변용하며 이처럼 무한하게 진행하기에 변용과 동시에 전체에 이른다. 뿐인가. 양태들의 변용과 변용 사이를 연결하는 건, 운동과 정지, 근거로서의 자연이라는 전체 질서고, 이 모든 일은 항상 동시적이기에 또 전체다. 이는 개개의 양태만이 신의 표현인 것이 아니라, 양태와 양태들이 맺고 있는 무한한 관계 전체가 신의 표현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스피노자에게 실존한다는 건, 전체와의 관계 맺기이자 전체와의 상호 변용인 것이다. 이로써 양태는 더 이상 신을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변용을 통해 매 순간 신 또는 전체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변용의 역동성, 이것이야말로 스피노자가 발견한 놀라운 신의 활동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내가 아기와 만나 ‘하느님’을 부른 건, 그것이 신의 선물이어서가 아니라, 이 아기가 전체와의 무한한 연결 속에서 무한한 변용을 겪으며 왔을 거라는 경외감과 그 탄생이 아내와 나로 하여금 존재의 자기변형이라는 신의 활동에 접속케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아빠가 된다는 건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신체와 정신의 더 큰 변용이 예고되는 세계 아닌가. 물론 엄마-아빠로서 겪을 변용이 좋은 것들만 골라서 겪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전체란 좋은 것들만이 아니라 좋은 것과 더불어 무수히 많은 괴롭고 슬픈 일들의 함축이기에, 엄마-아빠로의 변용 역시 지옥을 맛보는 일들도 부지기수 일 것이다. 지옥은 천국이 만드는 게 아닌가. 변용은 이 모든 것에 대한 변용이다. 

 

 

아기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음에도 모든 일에 활기가 넘친다.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그런데 그 조금도 가만있지 않음이 만든 활기가 온 가족을 활기로운 존재로 변용시키고 있다. 그 활기가 어찌나 대단한지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똥 싸는 일을 칭찬할 수 있는 신체가 되었고, 트림과 방귀엔 웃을 수 있는 신체가 되었으며, 비슷해 보이는 아기의 울음 속에서 울음 안에 담긴 다양한 결을 읽어내는 신체가 되어가고 있다. 활기란 할 수 있는 일을 반복하는데서 오는 게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할 수 있음을 만드는데서 오는 기쁨이다. 그리고 이런 활기가 주변의 활기로 연결되고 연결되어 무한하게 나아간다. 아기와 더불어 ‘아빠’가 온 것이다. 

 

스피노자는 신과 양태의 관계를 통해 인격신, 구원신과 같이 점점 왜소해지고 있는 신의 자리를 다시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주었다. 만약 우리가 신을 떠올릴 때, 그 신이 스피노자의 신이라면 우리는 어떤 신을 경험하게 될까? 우리는 기도와 기복을 통해 신의 경험을 하는 게 아니라, 전체성에 대한 이해를 신의 경험이라고 이해하고, 매 순간의 변용이야말로 신의 경험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 않을까. 

 

 

글_강보순(사이재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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