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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못한 소설 읽기

[읽지 못한 소설 읽기] 어떤 사랑의 발명―『모렐의 발명』

by 북드라망 2023. 2. 3.
『세미나책』의 저자 정승연샘(aka. 정군)의 새 연재가 시작되었습니다! 정군샘은 책을 아주 많이 가지고 계시다고 하는데요, 그 중에서 '세계문학전집'에 대한 글을 쓰신다고 합니다. 정군샘의 표현에 의하면 이 연재는 "‘소설’들 중에 읽지 않은 책들을 글을 쓴다는 핑계로(강제로) ‘읽어 보자!’는 시도이며 따라서, 어떤 목록을 어떤 컨셉으로 읽어갈지는 불명확"하시다고 합니다. 오호, 정군샘을 따라 읽는 세계 문학 전집!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어떤 사랑의 발명―『모렐의 발명』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송병선 옮김, 민음사, 2008 )

 


나는 책을 많이 가지고 있다. 많다/적다는 물론 상대적인 것이지만, ‘절대적’인 기준에 비춰 생각해 보아도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규모로는 적은 것 같지는 않다. 이렇게, 책이 많다고 말하고 나면 꼭 따라붙는 질문이 있다. ‘그거 다 읽었어?’라는 질문이 그것인데, 질문의 수준은 차치하고 담백하게 대답해보자면, ‘다 읽었다’를 기준으로 보자면 ‘다’ 읽지 않은 책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건 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의 숙명과도 같은 일인데, 책을 읽어야 하는 사람은 나 하나지만 책을 쓰고, 만들고, 팔고, 배송하는 사람의 수는 읽는 사람의 표상을 넘어설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 책이 나오는 속도, 책이 집까지 배송되는 속도는 언제나 읽는 속도를 넘어선다. 그래서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집에 들여놓은 책들을 모두 읽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어쨌든, 그런 이유로 읽지 않은 책들의 적체가 상존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짐짓 모른 채 하며 애를 쓴다. 이 연재는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세계문학전집’들 중에 사놓고 아직 읽지 않은 책들, 비율로 따지면 가지고 있는 전체 ‘세계문학전집’류들 중, 아니 ‘소설’들 중에 읽지 않은 책들을 글을 쓴다는 핑계로(강제로) ‘읽어 보자!’는 시도다. 따라서, 어떤 목록을 어떤 컨셉으로 읽어갈지는 불명확하다. 그때그때 눈에 걸리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읽고 쓰려고 한다. 

 


그래서, 첫번째는 어떤 책이 눈에 걸렸는가하면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모렐의 발명』이다. 물론 이 책이 가장 먼저 손에 잡힌 것은 아니다. 최근에 출간된 오르한 파묵의 『페스트의 밤』이나, 발자크의 『성 안투안의 유혹』 등도 후보였다. 그럼에도 첫 번째 글이 『모렐의 발명』이 된 데에는 읽어야할 페이지수가 가장 적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역시 ‘분량’은 좋은 척도가 아니라는 걸 10여쪽 남짓을 읽자마자 재확인하였다. 보르헤스의 서문과 역자 해설까지 합해서 200쪽이 채 되지 않는 작품임에도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제목에 등장하는 ‘모렐’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소설 초반부터 중반초입까지 그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보였다. 그런데 중반을 넘어서는 순간 ‘소설’은 ‘질문’으로 바뀐다. 왜냐하면 화자가 체험한 섬의 모든 사태들이 그의 ‘발명’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그 ‘발명’이 던지는 질문이란 ‘어떤 인간은 단지 그를 이루고 있는 부분들을 총합일 뿐인가’라는 질문이다. 다시금 ‘재현’이 문제가 된다. 이에 대해 상식적인 대답은 ‘재현’은 ‘원본’을 온전히 재현할 수 없으므로 필시 결여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카사레스 역시 그렇게 답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살인혐의를 피해 무인도로 도피한 화자가 마지막까지 섬의 여인 포스틴에게 다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까지만 보면 소설은 흔한 反기술주의를 표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오히려 나는 소설의 후반부, 재현된 포스틴에 두고서 실존하는 화자가 벌이는 갖가지 행동들, 서로 대화하는 듯 꾸미고, 함께 산책하는 듯 행동하는 일련의 장면들에서 약간 소름이 끼쳤다. 이를테면 그것은 가짜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실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기분이었다. 요컨대 그 장면들을 통해 소설의 환상에서 사실주의로 일변하였던 셈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함께 산책을 한다. 그렇게 사랑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진짜 그 사람일까? 차라리 어떤 재현 속에서 사랑마저도 재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살아있지 않은 모렐을 질투하고, 살아있지 않은 포스틴을 사랑하는 화자가 보여주는 사랑의 행동들을 두고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라 그저 재현일 뿐이라고, 우리가 하는 사랑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요컨대 이 작품을 가상적 사랑에 매달리는 현대사회의 집착적 성격에 대한 고발 같은 식으로 읽는 것은 조금 오만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오히려 『모렐의 발명』은 좀 더 보편적이다. 말하자면 그것을 ‘인간적 사랑의 발명’으로 바꿔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소설을 읽고 난 후에, 나는 사랑을 재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표상’, 그러니까 표상된 사랑의 이미지가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사랑은 이러해야 하고, 거기에 다다르지 못한 것들은 가짜라는 그런 이미지들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매번 새로 발명되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고립된 섬의 풍경을 완전히 바꿔버린 ‘모렐의 발명’은 말 그대로 ‘사랑의 발명’일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비자발적인 ‘죽음’을 토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나쁜 것이다. 그럼에도 생각해 보아야할 것은 ‘발명’이다. 어떻게 매번 새롭게 발명할 수 있을까? 어떻게 ‘추리’를 넘어설 수 있을까?

*(제 생각에) 작품 중간에 ‘반전’이라고 생각할 부분이 있기 때문에 줄거리를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글_정승연(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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