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영들, 물소리길을 걷다
우수에 나선 물소리길
대동강 물도 녹으며 봄이 온다는 우수(雨水)다. 물소리길의 강물도 다 녹았을까. 그래서 양평 물소리길을 골랐다. 양평 주변을 흐르는 강을 따라 조성된 둘레길인데 총 여섯 개의 코스로 조성되어 있고, 경의중앙선과 연결되어 있어서 접근성이 좋다. 재작년 1월에 걸었을 때는 혼자였는데 이번에는 동행을 찾았다. 인문약방 프로그램 <일욜엔양생>에서 함께 공부했던 조은영님, 나와 이름이 같다.
죽전역에서 수인선을 타고 왕십리역에서 경의중앙선으로 환승해서 아신역까지 두 시간, 검색은 그랬다. 하지만 실제 경의중앙선은 지나가는 기차를 보낸다고 5분씩 대기하는 역이 몇 개나 되었다. 30분 지각, 일찌감치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은영님을 만났다. 우수라지만 날씨는 여전히 쌀쌀했다. 아신역을 나서니 부슬부슬 가는 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오전에 잠깐 비오다 오후 맑음이란 일기예보에 우산은 챙겼다. 둘레길에 들어서니 우산을 든 손이 시렸다. 장갑은 안 챙겼다. 방수가 되는 등산점퍼에 달린 모자까지 쓰고 장갑을 낀 은영님은 주머니에서 핫팩을 꺼내 나에게 주었다. 같이 세미나를 했을 때도 누가 뭔가 필요해서 찾는가 하면 어느 새 챙겨 내놓던 은영님이었다. 그런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 좀 신기했다.
물소리길 3코스는 아신리 마을을 거쳐 옥천면을 통과하면서 남한강 쪽으로 연결되어 있다. 재작년에 걸어봤던 길이라 좀 익숙하게 느껴졌다. 은영님이 같은 계절에 왔던 길을 또 걷는 까닭을 물었다. 둘레길을 걷다보면 누구라도 같이 보면 좋겠다는 경치들이 있다. 물소리길을 처음 걸을 때도 그랬다. 탁 트인 겨울 강을 걸으며 마음도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친구들에게도 이 경치를 보여주고 싶었다. 걷는 것을 좋아한다는 은영님과 같이 걸을 만한 길을 고르자니 이 길이 떠올랐다. 강을 따라 걸으며 보니 아직 강기슭 쪽에는 얼음이 남아 있었다. 비는 그쳤고 하늘은 푸르게 투명해져서 드높았다. 바람이 제법 차서 앉아서 간식을 먹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3코스의 종점인 양평역에 도착했다. 우수라고 하지만 봄이 오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은영과 은영
양평역 주변에서 점심을 먹었다. 찬바람을 맞고 걸었더니 따뜻한 국물이 생각나서 감자탕 집으로 들어갔다.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그런지 우리가 들어가서 앉고 나니 좌석이 꽉 찼다. 푸짐한 시레기에 된장국물 베이스인 감자탕이 구수하니 맛있었다. 밥을 먹으며 올해 퇴근길 인문학을 같이 공부하게 되었는데 신청자가 둘뿐이라 열릴 수나 있을지 걱정을 했다. 일요일아침에서 목요일 저녁으로 시간을 옮기게 되면서 은영님도 부담이 늘었다. 의정부에서 퇴근해서 용인 동천동까지 공부하러 오는 일이 어떻게 쉽겠는가. 그래도 시작한 공부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는 나의 바람에 흔쾌히 응답해줘서 많이 고마웠다. 같이 걸으며 그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물소리길 4코스는 양평역에서 원덕역까지 남한강과 흑천강을 따라 걷는 길이다. 겨울 강을 따라 걷는 길은 나뭇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 사이로 시야가 트여서 멀리 추읍산까지 시야가 트였다. 버드나무길이라고도 불린다고 하니 다른 계절에 오면 푸릇푸릇한 나무들로 둘러싸여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겨울에 두 번이나 걸었더니 다른 계절의 풍광이 더 궁금해지긴 했다. 경치가 좋다 좋다를 연발하다보니 서로 좋아하는 것들까지 이야기하게 되었다. 둘 다 혼술을 즐기는 습관이나 사우나를 좋아하는 공통점도 발견했다. 이름만 같은 게 아니라 좋아하는 것도 비슷하니 우린 제법 통했다. 은영님이 최근에 받은 선물이라면서 가방에서 미니어처 위스키를 꺼냈다. 한 모금씩 나눠 마시면서 제법 불량스럽게 키득거렸다. 둘이 걸으면 이런 재미도 있다.
은영님, 고마워요
원덕역에 거의 도착할 즈음 은영님이 전화를 받았다. 큰 아들이 군대 훈련소에 입소해서 처음 하는 전화였다. 은영님이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편안히 전화 받으라 눈짓을 하고 나는 길에서 벗어나 주변에 있던 벤치에 앉아 강을 바라보았다. 자식들도 점점 제 갈 길을 찾아가는 때라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은영님의 일상이 느껴졌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공동체에 접속하여 일상을 꾸려가며 사는 은영의 삶과, 두 아들이 각각 독립을 하게 될 시기에 맞춰 은퇴를 준비하는 또 다른 은영의 삶이 이렇게 엮였다. 세상의 또 다른 은영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름이 같아서 왠지 더 궁금한 그녀의 삶 한 자락을 엿보며 함께 걸은 시간이었다.
2월이 다 갔는데 퇴근길 인문학 프로그램은 여전히 신청자가 없었다. 아무래도 폐강을 해야 할 것 같다며 신청한 두 사람에게 장문의 톡을 보냈다. 폐강 결정 시한 하루를 남기고 한 사람이 신청했다. 다음 날 한 사람이 더 신청했다. 우주의 기운까지 끌어다 프로그램이 열리길 기원하자던 바람이 이루어졌다고 방방 뛰었다. 개강을 하고 보니 한 분은 은영님이 아는 분이란다. 혹시나 폐강이 될까 주변을 물색해서 같이 퇴근길 인문학을 하자 권했다고 했다. 그녀의 마음씀씀이가 이렇다. 소박하니 다섯 명이 모여서 올해의 공부길이 열렸다. 뚜벅뚜벅 걸어가 볼 참이다. 은영님^^고마워요!
글_기린(문탁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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