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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걷다보면

[기린의 걷다보면] 이런 조합 처음이야!

by 북드라망 2023. 8. 2.

이런 조합 처음이야!


정말 갈 수 있을까
올해 2월 정월대보름날,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는 모임이 있었다. 공동체에 인문학 공부를 하러 와서 인연을 맺은 친구들 중에서 비혼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모임이다. 그렇다고 특별한 주제가 있거나 하는 건 아니고, 시간이 되면 모여서 밥 먹고 수다나 떠는 취지로 모였다. 작년 8월에 총 일곱 명이 모였는데, 하는 공부도 다르고 했던 시기도 제 각각이라 그 날 처음 만난 친구들도 있었다. 그 후 두 번 정도 만났으니 아직은 조금은 서먹한 사이들이었다. 이 날 저녁은 보름에 어울리는 음식들을 각자 조금씩 챙겨 와서 한 상 차려놓고 맛있게 먹었다. 서로의 근황을 나누는 와중에, 20년 근속을 끝으로 직장을 그만두는 친구가 제주 한 달 살기 여행 계획을 밝혔다. 자신이 여행하는 기간에 시간이 되면 제주에 놀러 오라는 제안을 했다. 다들 좋다며 그 자리에서 날짜를 잡았다. 그렇게 6월 현충일을 끼고 3박 4일의 일정의 제주 여행이 잡혔다.

모임 다음 날 날짜에 맞춰 일단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다. 마음 한 편으로는 정말 갈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다. 연 초부터 제주를 두 번이나 다녀오는 다른 일정도 있었다. 여행 날짜 앞뒤로 인문약방의 구체적 일정들이 잡혔고, 아무래도 무리겠다 싶어서 4월 어느 날은 티켓을 취소하고 말았다. 하지만 막상 그 말을 꺼내자니 친구들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아직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제주 올레길에 대한 궁금증도 여전했다. 결국 다시 티켓을 예매했고, 본격적으로 여행준비를 했다. 최종으로 다섯 명이 함께 여행하게 되었고, 다들 출발과 돌아오는 시간이 제각각이이서 딱 하루 전원이 모여서 여행하는 일정이었다.

 


1일차- 제주 올레길 7코스
토요일 근무 후 마지막 비행기로 내가 제일 먼저 제주에 도착했다. 한 달 살이로 먼저 가 있던 친구가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다음 날 친구와 나는 제주올레여행자센터에서 출발하는 7코스를 걸었다. 올레길의 슈퍼스타라는 별명답게 걷는 내내 제주 해안의 절경을 즐길 수 있었다. 동해안의 단조로운 해안선에 익숙한 내가 바다에서 20미터 높이로 솟아난 돌기둥 외돌개를 마주하니 탄성이 절로 나왔다. 바다 풍경 좀 안다는 말이 쏙 들어갈 만한 비경이었다.

 


서귀포만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하며 마을길까지 접어들었는데, 스피커에서 음악소리에 구령까지 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일요일 오전에 마을에 이렇게 큰 소리가 나도 사람들이 항의를 안 하나 보다며 신기해했다. 그 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걷다가 길가에 걸린 플랜카드를 발견했다. 서귀포 여고의 총동문회 체육대회였다. 함성의 실체를 알고 나니 언니들의 운동회를 구경하고 싶기도 했지만, 오후에 도착하는 친구들을 맞이하기 위해 그냥 지나쳤다. 그렇지만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유혹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바다가 코앞에 보이는 곳에 천막집이었다. 멍게와 소라 등이 안주로 나오는 그곳에서 막걸리 한 잔 걸치느라, 숙소에 먼저 도착한 친구를 기다리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에게는 미안했지만, 덕분에 바다를 바라보며 쌉싸름한 멍게 한 점 제대로 맛보았다.

 

 

 

2일차 –새별오름과 방주교회, 약천사
월요일 아침이 되어서야 완전체로 뭉친 우리가 함께 간 곳은 애월읍에 있는 새별오름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나름 유명하다는 오름들의 매력을 얘기할 때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내 눈 앞에서 떡 하니 솟아오른 오름과 마주하니 이번 생에 처음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서는 제주들불축제가 열린다는 새별오름, 가을에는 억새가 일품이라는 이 오름을 초여름 가는 비가 부슬부슬 내려서 우산을 쓰고 올랐다. 꼭대기에 올라 사방으로 트인 풍광은 어느 계절에 와도 아쉽지 않을 만큼 흡족했다.

오름에서 내려온 후 이타미 준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방주교회로 이동했다. 노아의 방주를 모티브로 한 교회는 인공 수조를 조성해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계속 비가 오락가락해서 수조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한 친구가 그 모습을 포착하며 찍는 영상의 모델이 되어 수조에 놓여있는 징검다리를 오락가락했다. 나중에 확인한 영상을 보니 뒤뚱이며 움직이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교회를 봤으니 절도 가보자며 근처에 있다는 약천사까지 둘러보았다. 대웅전인 대적광전은 아파트 십 층 가량 되는 높이로 삼층 지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웅전 앞에 서면 서귀포 앞바다가 훤히 내다보였다. 약수가 있다는 말에 찾으러 나선 친구들을 기다리며 대웅전 앞에 있는 의자에서 멍 때리는 시간도 좋았다.



 3일차- 한라산 영실코스와 윗세오름(ft. 달리책방)
3월에 북콘서트를 했던 달리책방에서 화요일에 한라산의 한 코스를 오르는 걷기 행사가 있다는 소식을 제주에 와서 알게 되었다. 화요일 오전에 제주에서 떠나는 일정을 잡았던 나는 망설임 끝에 수요일 출근 시간을 늦추고 한라산 걷기 일정을 신청했다. 그래서 여행 일정이 하루 더 늘어났다. 오래 걷기가 힘든 친구와 다른 친구들은 오일장 구경을 가기로 하고, 나와 한 친구를 영실코스 입구에 내려 주었다. 거기서 달리책방 스텝 두 분과 다시 만났다. 전날 밤새 비가 와서 걷기가 취소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는데, 아침에는 서서히 개여서 비옷을 입고 출발하기로 했다. 영실코스로 올라 윗세오름까지 가기로 했다. 빗물이 여전한 산길이라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스텝들의 안내를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중간쯤 오르니 영실기암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날 내린 비로 인해 저절로 만들어진 폭포도 보았다. 비가 와서 못 갈까 걱정했는데, 비가 왔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경관 앞에서 예기치 않은 행운이 주는 즐거움을 누렸다.

위로 올라갈수록 안개가 자욱해져서 더 이상의 절경은 볼 수 없었지만, 윗세오름까지 이르는 능선 옆으로 이름 모를 야생화들을 찍은 분을 따라가며 작은 꽃들을 보았다. 달리책방 스텝분들이 우리 여행의 계기를 듣더니, 본인들이 속해서 활동했던 비혼모임 이야기도 해 주었다. 육지에서 들어와 제주 살이의 연륜이 쌓이기까지 모였다 흩어지는 시간들이 지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이번 걷기는 책방에서 정기적으로 기획하는 모임인데, 참여하는 분들이 적더라도 꾸준히 지속하기에 의미를 둔다고 했다. 윗세오름에서 싸간 간식들을 나눠 먹고 다시 내려오던 중간 틈에 쉴 터에 앉아 책방에서 준비해온 시도 한 편 읽었다. 행사의 루틴이란다. 나에게 주어진 시 구절은 “쥘게 없는 손으로 주먹을 쥐는 나날입니다.” 였다. 한라산이 처음인 나에게는 아는 게 없어서 쥘 것도 없는 처음이 주는 설렘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한 걸음 더 내딛어
수요일 첫 비행기로 제주를 떠났던 나와 달리 다른 친구들은 다음 숙소였던 세화해변 근처까지 두루 둘러보고 각자 돌아오는 것으로 이번 여행은 끝났다. 올레길을 걷고 오름을 올랐으며 한라산까지 등반하는 나름 알찬 시간이었다. 올해만 제주를 두 번이나 갔으면서 제주의 풍광을 느낄 기회를 못 잡았는데, 세 번째에 가서야 제대로 제주를 즐긴 셈이다. 이런 조합으로 삼일 내내 걸었더니, 둘레길을 완주한다던 이들이 몸으로 겪을 것들을 조금이나마 경험해 볼 수 있었다.

한 편으로 서먹한 사이로 조금은 충동적이었던 여행이었는데, 내내 별다른 불편은 없었다. 그 흔한 음식 사진은 물론 단체 사진도 거의 없는 여행이었다. 그저 간간이 찍은 풍경 사진과 기록을 위해 찍은 몇 컷의 사진에서 떠오르는 소소한 추억이 남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로에게 신경을 쓰는 사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볼 만한 것은 다 둘러봤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 여행 전체를 매니징한 친구 덕분이다. 여행 전부터 각자 가고 싶은 곳을 물어보고 참고해서 일정을 짜고, 여행 내내 운전을 도맡아서 허리에 무리가 가기까지 했다. 생색내지 않고 서로의 불편을 보살폈던 다른 친구들도 한 몫을 했다. 그러면서 서로에 대해 조금씩 더 알아가다 보면 이 모임이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갈지도 모르겠다. 여행 이후 오십 번째 생일을 맞았다는 친구를 축하하려고 다시 모였다. 비건인 친구라 케익 대신 수수팥떡을 나눠 먹으며 건강과 안녕을 기원했다. 우리는 이렇게 생일도 챙기는 사이로 한 걸음 더 내딛었다.

 

 

 

글_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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