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나는 공동체로 출근한다』의 저자, 문탁넷의 나은영 선생님(aka.기린)의 글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꾸준히 둘레길 걷기를 하신다고 하는데요, 걸으며 소소하게 느끼시는 것들에 대해 저희에게 공유해주신다고 합니다. 기린샘과 함께 걸어볼까요?
걷다 보면 알게 된다
해가 바뀌었다. 작년에는 일요일에 세미나를 하느라 둘레길 걷기를 거의 못했다. 약국 휴무인 월요일에 걸으면 되지 않냐 묻는 친구가 있었다. 경험에 비추어보면 대부분의 둘레길은 북적이는 등산로 등과 연결된 지점을 지나면 일요일에도 한산한 편이다. 월요일이면 드물 것이다. 그래서 혼자 둘레길을 걷는다면 휴일이 그나마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둘레길 안전 수칙에도 나와 있다. 가급적 2인 이상 동행하시오. 나는 가급적, 일요일에 걷기로 나만의 수칙을 정했다. 1월 1일은 마침 일요일이었고, 며칠 전부터 다시 둘레길을 걸을 수 있도록 몸 상태를 보살폈다.
공동체에 온 후 걸어서 출근하게 되면서 탄천을 내내 걸었다. 그러다 휴일이면 집 주변에 연결된 탄천을 걷다가 ‘영남길’이라는 표지판을 보게 되었다. 검색을 해보니, 조선 시대 한양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총 6개의 간선 도로망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 길을 다시 복원해 ‘경기 옛길’이라 지정했고, 영남길은 한양에서 용인을 거쳐 부산까지 이어진 영남대로의 일부를 복원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나있던 길이라고? 십 세기 후반에서 이십 세기 초반이 단번에 연결되었다. 계절의 변화 정도밖에 보이지 않던 탄천 길에 낯선 이가 걷고 있었다. 괴나리봇짐에 패랭이를 쓴 모습이었다. 저 이는 어디를 향해 무슨 일을 보러 갈까, 나는 하릴없이 휴일을 어슬렁대는 중인데. 물론 상상이다. 하지만 그런 상상은 시간을 거스르고 공간을 전환시키면서 나와 세계를 연결시켰다. 더 찾아보니 경기도에만도 옛길을 넘어 둘레길로 숲을, 갯가를, 물길을 연결시켜 조성되어 있었다. 그 길들에는 또 어떤 상상이 잠재해 있을까. 내 발로 그 길들을 걷고 싶어졌다.
2021년에 그렇게 둘레길을 찾아 걷고 또 걸었다. 주중에 검색을 통해 출발점까지 가기 위한 교통수단을 알아놓았다. 내가 살고 있는 용인의 둘레길은 물론 수원 팔색길이나 서울 둘레길의 코스별 출발점은 지하철역에서 시외버스 터미널, 낯선 마을 입구일 때도 있었다. 집을 나서서 버스나 지하철을 탔다. 출발지점까지 적게는 한 시간 많게는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둘레길 종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더 걸리기도 했다. 그렇게 대중교통을 갈아타며 둘레길 출발점에 서면, 몸은 저절로 여행객 모드로 전환되었다. 낯선 길에서 어떤 우연과 맞닥뜨리게 될지 기대감이 부풀었다. 내딛는 발과 보는 눈 사이로 쉴 새 없이 낯선 것들이 출현해서 익숙했던 것들을 마구 헤집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출발점에서 품고 있었던 어떤 것들은 지나갔고, 또 어떤 것들은 변형되었다. 동시에 몸에는 나른한 피로감이 감돌고 돌아갈 집이 있다는 안심에 휩싸인다. 이 코스를 완주했다는 성취감은 덤이다. 기분 전환이나 새로운 결심 등을 위해 멀리 떠나지 않아도 되는 여행, 둘레걷기는 그렇게 나에게 당일치기 여행이 되었다.
2023년 1월 1일의 여행은 서울 둘레길 2코스 용마-아차산 코스였다.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에서 출발해서 5호선 광나루역이 종점인 코스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니 역시 가보지 않는 동네였다. 화랑대역에서 출발하여 도심을 한 시간 정도 걸었다. 망우 역사 공원이라는 표지판이 눈앞에 나타났다. 말로만 들었던 망우리공동묘지가 역사공원으로 재단장 했단다. 일제 강점기인 1933년에 조성된 공동묘지에는 애국지사를 비롯 널리 알려진 인사들이 많이 안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안창호 선생도 있었고(현재는 국립묘지로 이장했다고 함), 방정환, 이중섭 등의 묘소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지난해에 내린 눈이 녹지 않아 무덤들이 즐비하게 압도하는 공동묘지의 기운은 감춰진 채, 애국지사들의 사진이 프린트된 깃발들만이 역사 공원의 분위기를 풍겼다.
새해 첫날인데도 공원길을 걷는 무리가 꽤 되었다. 등산차림의 두 노인이 어떤 묘지석 앞에서 나누는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아는 이름인지 그 양반이 어디 출신인데 어쩌구 하는 말이었다. 참배는 아닌 듯했는데, 말의 본새로는 연륜이 느껴졌다. 그분들을 지나쳐 경사가 있는 공원길을 좀 더 오르는데 젊은이 둘이 지나갔다. 레깅스에 잘록한 허리까지 오는 등산복 윗도리 차림이었다. 영하의 날씨에 저렇게 몸을 차게 내놓다니 철딱서니가 없어 보였다. 헉,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않은가. 걷다 보면 우연히 마주치는 타인들을 향해서도 이렇게 평가질이 작렬한다. 말로 뱉지 않았을 뿐, 이미 떠올라버린 생각이다. 생각을 단속하는 일이 이렇게 어렵다, 쩝.
또 걸어 걸어 깔딱고개 쉼터를 지나고 아차산 능선에서 정상에 이르는 사이 고구려 시대 유적으로 추정되는 군사시설인 보루가 있던 유적지라는 표지판들을 지나치게 되었다. 이 코스는 서울 둘레길 중에서도 전망이 가장 뛰어난 코스라고 하더니, 보루가 있었다는 능선을 따라 곳곳에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한 전망대에 서 보니 미세먼지 사이로 한강 줄기가 보였다. 그 옆으로 서울 동부와 잠실 쪽으로 빽빽하게 도심이 형성되어 있었다. 고구려의 병사도 바라보았을 한강이겠지만,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하겠지. 이번 둘레길을 걷는데 유난히 뻔한 잡생각들이 끼어드는 걸 보니, 인문약방 홈피 자기배려코너에 ‘기린의 걷다 보면’을 연재하기로 한 결정이 영향을 미친 게 분명하다, 헐~.
푸코에 의하면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계율은 사실 고대 문화에서 항상 자기 배려의 계율과 연관되어 있었고 또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돌보는 하나의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고 한다. 자기를 배려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나의 둘레길 걷기는 내 ‘꼬라지’를 점검하게 되는 과정이다. 지속해서 ‘낯선’ 길로 여행하면서 출현되는 또 다른 나를 인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길에서 만난 수많은 타자들(경치를 포함)을 통해 변형에 변형을 거듭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첫 글을 맺는다.
글_기린(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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