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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걷다보면

[기린의 걷다보면] 우여곡절 무릎소동

by 북드라망 2023. 3. 29.

우여곡절 무릎소동


무릎이 부어도
언제부턴가 한약 포장 기계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말끔하게 포장되어 나오는 쌍화탕을 한 팩씩 정렬하는 일을 즐겼다. 푸짐한 뱃살 때문에 쪼그리고 앉는 자세 자체가 불가능했던 시절을 지나, 어쨌든 앉아지는 가능성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뱃살들이 다 사라진 것은 물론 아니고 아주 약간 얇아졌을 뿐이지만. 그런데 언제부턴가 오른쪽 무릎이 좀 더 삐걱댄 달까 했던 것도 같다. 그러다 어느 아침, 샤워를 하다가 왼쪽 무릎과 비교해서 현저히 부어있는 오른쪽 무릎을 발견했다. 당장 검색부터 했다. 무릎에 물이 찼다는 신호란다. 무릎의 염증이라는 진단과 물이 찼다는 표현 차이가 이해가 잘 안 되어 몇 번을 읽었다. 병원을 가야했다.

출근해서 오전 일과를 마무리 짓고 나니 12시쯤 되었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슬그머니 약국을 나섰다. 침을 잘 놓는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는 동네 한의원에 갔다. 정형외과를 가면 시간이 더 많이 걸릴 것 같고 침이 더 빨리 붓기를 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한의사는 무릎 상태를 진단한 후 검색으로 읽었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퇴행성이냐고 물었더니 진단으로 봐서는 그것보다는 앉는 자세나 무릎에 무리가 가는 활동의 영향이라고 했다. 걷는 것도 포함된다고 했다. 나는 한의사에게 1월 1일에 좀 많이 걸을 계획이 있는데, 압박붕대 같은 걸 하고 걸으면 어떠냐고 물었다. 부은 것 빼고는 별다른 통증이 없기도 했다. 한의사는 굳이 하겠다면 압박 테이프도 도움이 될 거라며, 테이프로 부은 무릎을 지지해주는 처치도 함께 해 주었다. 약국으로 돌아오니 점심시간이 지나 있었다. 점심도 안 먹고 어디 갔다 왔냐는 물음에 그냥 저기로 얼버무렸다.

 



내 의지를 꺽기 싫다
무릎이 부었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 친구들한테 걷기부터 미루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 뻔했다. 일요일마다 걷겠다는 의지를 간섭받을 것이 싫었다. 아프다는 말은 삼켰고, 응급처지는 했으니 괜찮겠지 싶기도 해서 새해 첫 날 계획대로 둘레길을 걸었다. 오른쪽 무릎에 충격이 가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걸었더니 견딜 만 했다. 하지만 그날 밤 잠자리에서 몸을 뒤척일 때마다 무릎에 통증이 느껴졌다. 예상은 했지만 통증이 제대로 느껴지니 마음이 점점 쪼그라 들었다. 출근해서 무릎이 아파서 한의원에 간다고 했다. 갔다 오니 친구들은 언제부터냐, 일요일에 너무 많이 걸은 거 아니냐며 걱정들을 했다. 무릎 통증과 관련한 온갖 정보들 끝에 다들 당분간 걷지 마라 했다. 나는 걷기 전부터 부었다고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은 정형외과를 가서 엑스레이도 찍었고, 일리치 약국에서 약도 지어 먹고, 한의원에서 침도 계속 맞았다. 그 사이 인문약방 캠프로 정선의 운탄고도를 걷는 일정이 있었다. 모든 치료에도 불구하고 붓기가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차도는 있어서 운탄고도를 걸을 마음을 먹었다. 캠프 전날 밤에 눈에 와서 걷기는 무산되었다. 이제는 날씨까지 걷겠다는 내 의지를 꺽는구나 싶었다. 그래도 설 명절을 끼고 인문약방 친구들과 제주 여행이 있으니 드디어 제주 올레길을 걸어보겠지 기대를 했다. 여행 날짜가 점점 다가오면서 일기예보를 챙겨봤는데, 여행 기간에 제주도에 폭설이 온단다. 설마 했다. 3박 4일 여행 기간 중 올레길을 걷기로 했던 이틀째 날, 새벽부터 바람에 눈발까지 날렸는데 초속 13미터의 바람이 불었다. 제주에서 뜨는 비행기 전체가 운항 취소되어 4만 여명의 인원이 공항에 발이 묶였다는 소식도 떴다. 새해부터 걷기 계획에 연달아 차질이 생기다니 어이가 없었다.

 


영등할망의 변덕스런 바람을 맞으며
오전 열한시쯤 비옷까지 단단히 챙겨 입고 숙소를 나섰다. 제주 한림읍 귀덕리에 있는 숙소라서 곽지 해수욕장 해변으로 걸어가 볼 참이었다. 바람이 비옷을 사정없이 펄럭여서 걸음을 내딛자니 몸이 휘청거렸다. 차가운 눈발까지 몰아쳐서 손도 시렸다. 길옆 집들을 둘러싸고 있는 낮은 돌담의 재료가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인 까닭을 실감했다. 안 그러면 이 바람살을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 겨우 차도가 있는 데까지 나와서 건너 바닷가 쪽으로 갔다. 바람이 워낙 거세서 주변 상점들도 대부분 문을 닫았다. 골목 사이로 바다가 보였다. 가까이 걸어가 보니 안내 표지판이 보였다. 영등할망의 착한 며느리 석상이 거센 파도를 맞으며 서 있었다. 뭔가 맥락이 있는 설치물 같았는데 바람 때문에 감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돌아와서 찾아보니 귀덕 1리와 한림 해안도로를 잇는 제주 올레 15B길로 현무암해변으로 걸을 수 있는 길이었다. 영등할망은 바람의 신으로 음력 2월 제주에 변덕스럽고 사나운 바람으로 땅에는 오곡의 씨를 바다에는 해초의 씨를 뿌려주면 진짜 봄이 온다고 여겼단다. 영등할망 신화와 관련된 석상들이 바닷길을 따라 세워져 있다는데, 내가 본 것이 그 중에 하나인 영등할망의 착한 며느리 석상이었다. 바람 여자 돌이 많다는 제주에 가서 제대로 바람을 맞으며 애꿎은 석상에게 하소연했다. 새해 초반부터 무릎 이상에 궂은 날씨까지 이러니 올해 걷기는 망할 조짐일까요? 흑.

 

위 - 초속 13미터의 바람이 부는 제주 한림 해안도로의 영등할망 착한며느리 석상 / 아래 - 맑은 날의 석상 모습



돌봄을 떠올리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는 동안 무릎의 붓기는 다 가라앉았다. 노화의 시작이다 약국 일이 무릎에 무리를 주는 거 아니냐 코로나의 후유증이다 까지 온갖 원인을 주워들었다. 노화가 시작될 나이긴 하다. 예전에는 몰랐던 통증들이 불쑥불쑥 느껴진다. 이제는 쌍화탕 포장 기계 옆에 의자가 항시 비치되어 있다. 계획한 것들이 매번 어긋나는 사태 앞에서 속이 상했다. 그러면서 오로지 내 의지로 성취했다고 여겼던 일들이, 얼마나 많은 것들에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는지 헤아려 보게 되었다. 계속 무릎의 차도를 챙기는 친구들에 둘러 싸여 있다 보니, 당분간 걷기를 자중하라는 말도 더 이상 간섭으로 들리지 않았다. 몸의 변화에 섬세해지라는 조언이었다. 나의 곤란이 친구들의 염려를 타고 다시 돌아오니 훨씬 견딜만해지는 것, 돌봄이 이런 게 아닐까 짐작해 보게 되었다. 입춘이 지났다. 무릎을 아끼느라 쉬었던 걷기에 시동을 걸어 봄을 맞으러 가고 싶다.

 

글_기린(문탁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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