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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걷다보면

[기린의 걷다보면] '할미꽃'과 걷다보면

by 북드라망 2023. 6. 22.

'할미꽃'과 걷다보면

 

 

희(喜)
올해로 86세가 되신 어머니는 4남매가 모두 경기권에 자리를 잡은 탓에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자 별 수 없이 독거노인의 일상으로 접어들었다. 연세가 들수록 점점 거동이 둔해지는 어머니를 보며 그나마 지팡이라도 짚고 걸을 수 있으실 때, 바람이라도 쐬어 드리자는 마음이었다. 올해는 평창에 있는 친구의 집을 숙소로 잡아서, 그 근처에 있는 ‘허브나라 정원’을 관람하며 걷는 일정으로 잡았다.

허브나라 정원은 테마별로 세익스피어 가든, 팔레트 가든 등 여러 가든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처음 들어선 곳은 세익스피어 가든이었는데 주변으로 튜울립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작년 순천만정원에서 온갖 색깔을 뽐내던 튜울립을 다시 보니 무척 반가웠다. 어머니도 작년의 튜울립을 올해는 여기서 본다며 좋아하셨다. 어머니와 나란히 걷던 남동생이 우리가 어릴 때 고향집에도 화단이 있었다고 한마디 거들었다.

어머니는 남동생까지 태어나면 네 명이나 되는 자식을 데리고 더 이상 셋방살이를 할 수는 없어서 빚을 내서 집터를 장만해야했던 시절을 회상하셨다. 빚을 갚느라 형편은 쪼들렸지만, 내 집이라 하고 싶은 대로 꽃도 심고 나무도 키웠다고 하셨다. 우리를 키우느라 손끝에 물이 마를 새가 없던 그 시절에도 틈틈이 그 꽃밭을 가꾼 취향은 여전히 남아서, 지금도 세상 구경에 최고는 꽃구경이라고 좋아하신다. 튜울립 화단을 지나 유리 온실도 구경하고, 처음 보는 꽃들과 식물들을 살펴보며 천천히 정원을 둘러보았다.

 

햇빛에 손 탄다고 장갑에 모자까지 꼭 챙겨서 나오신다

 

노(怒)
허브나라에 조성된 모든 가든을 둘러보는 것은 어머니의 체력으로는 무리였다. 정원 입구에서 가까운 곳들 중심으로 관람을 끝냈다. 그러고는 숙소 근처에서 점심을 먹었다. 음식점을 나서면 평창강이 흐르는 강가를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다. 소화도 시킬 겸 어머니와 둘이서 그 길을 조금 걷기로 했다. 오전에 왔던 비는 그쳤고, 점점 개여 가는 하늘도 바람도 연초록으로 물이 오르는 나무도 모든 게 좋았다.

강물이 흐르는 길을 따라 걸으며 어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어머니의 일상에 등장하는 고향 분들의 근황도 빠지지 않았다. 그 분들과 나눴던 이야기도 몇 마디 전하는 와중이었다.

 

-요새는 딸 없는 사람이 불쌍타잖나, 그 집도 아들만 둘이라 영 마음 붙일 때가..
-아이고.. 언제는 날더러 인정머리 없는 딸년이라 그래놓고는
-니가 인정스럽게 굴지는 않지.
-어머니가 그렇게 듣기 싫은 말을 하는데 우째 인정이 생기겠쓰?
-사람이 우째 맨날 좋은 말만 하노? 안 좋은 말 할 때도...
-나는 듣기 싫다고요!


내 목소리에 짜증이 실리고 어머니의 표정이 굳어졌다. 밥 잘 먹고 공기 좋고 물 좋고 햇빛도 좋았던 그 순간의 평안이 깨졌다. 어머니나 나나 더 이상 이야기할 맛이 안 났다. 더 걷기도 싫어져서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으이구!

 


애(哀)
숙소로 돌아온 후 어머니는 좀 쉬어야겠다고 하셨다. 나는 숙소에서 멀지 않은 ‘평창 자생식물원’을 보러 나섰다. 얕은 오르막을 십분 쯤 오르니 식물원 입구로 들어가는 길이 보였다. 4월 말이라 그런지 야생화가 본격적으로 피지는 않았다. 막 싹이 올라오고 있는 싹들 옆에는 앙증맞게 꽃 이름 팻말이 꽂혀 있었다. 분홍바늘꽃, 삼지구엽초, 깽깽이풀, 용둥굴레 등등 이름도 낯선 꽃들이 제대로 피어나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그래도 이름 모르는 꽃들이 군데 군데 피어서 눈길을 잡았다. 그 중에서도 붉은빛이 도는 봉오리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꽃이 식물원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봉오리에 하얀 솜털이 덮여 있었고 꽃봉오리가 진 대궁에는 흰 솜털이 둥그렇게 쌓여 있었다. 무슨 꽃일까.

식물원을 다 돌아보는데 30분이면 충분했다. 식물원에서 벗어나니 황토로 지은 까페도 있었다. 달맞이까페라는 팻말도 보였다. 마침 까페 주인이 나오시길래 까페 앞에도 피어있던 그 꽃의 이름을 물었다. 할미꽃이잖아요. 어떻게 이 꽃을 모르냐는 투여서 좀 머쓱했다. 할미꽃이라는 이름은 알았지만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꽃 대궁에 흰 솜털 뭉치가 할머니의 흰머리 같기도 했다. 저게 할미꽃이구나. 순간 백발이 성성한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졌다. 꽃 좋아하는 할머니, 할미꽃도 보고 까페에 파는 꽃차도 대접했으면 완벽했겠다. 쩝

저녁상에 둘러앉아 오고가는 얘기 끝에 어머니는 강가에서 툭툭대던 나를 보며 외할머니가 떠올랐다고 했다.

 

-나도 옛날에 어무이가 한 마디 하모 듣기 싫다고 머티(핀잔) 많이 줬더라. 그모 너거 외할매가 니도 늙어봐라던 말이 어제 들은 거 같다. (나를 보고) 니도 늙어봐라~ 이 인간아~


한심하다는 듯이 읊는 말꼬리에 살짝 슬픔이 얹혀 있는 것도 같았다. 속절없이 늙어가는 것에 대한 슬픔 같기도 했다. 우리 어머니 많이 약해지셨다.

 

카페 앞의 할미꽃


 
락(樂)
여행을 끝내고 어머니를 우리 집으로 모셨다. 아침에 어머니가 침대에 누워서 손가락 끝을 톡톡 맞부딪치는 소리에 눈을 뜨게 된다. 아침에 일어나기 전에 누워서 하는 어머니만의 운동 루틴이다. 집 화장대 위에는 어머니가 챙겨 오신 화장품들이 나란히 놓여있다. 검버섯을 막아준다는 마사지용 꿀은 필수품목이다. 나에게 얼굴 좀 가꾸라는 잔소리도 빼놓지 않으신다. 저녁 세안하면서 손으로 얼굴 두드리는 소리가 방안에까지 들린다. 꽃을 좋아하지만 꽃무늬가 있는 옷은 나이 들어 보여 싫다면서 스트라이프 무늬를 즐겨 입는 취향을 고집하신다. 우리 집에 계시는 짧은 기간에도 빠짐없이 관리하는 일상을 보고 있으면, 추레하게 늙고 싶지 않다는 어머니의 바람이 느껴진다.

하지만 어머니의 몸은 그 바람에 호의적이지 않다. 이번에 우리 집에 오신 것도 정형외과에 가서 허리 치료도 받고, 이참에 안과 치과 이비인후과까지 두루두루 정기검진을 받기 위해서다. 삼년 전에 허리 수술을 하시고 이제는 허리 통증 없이 살겠다고 좋아하셨는데, 또다시 허리가 탈이 났다. 병원에서는 수술한 허리 위쪽이 내려앉으며 신경을 누르는 통증이라고 한다. 노화가 원인이다. 힘쓰는 일은 최소한으로 하고 살살 움직이면서 사는 날까지 감당해야 할 통증이라는 사실이 우울하다고 한탄도 하신다.

이번에 어머니와 함께 희노애락을 겪으며 이 모두가 어머니가 내 옆에 계셔 주셔서 즐기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자님이 부모님의 나이에 대해 한편으로 기쁘고 한편으로 두렵다고 했던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이렇게 복닥거리는 희노애락 속에서 백발이 성성한 '할미꽃'으로 내 곁에 계시는 지금이 참 감사하다.

 

 

글_기린(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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