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북드라망 이야기 ▽/북드라망은 지금

이렇게 만났습니다!- 『슬픈 열대, 공생을 향한 야생의 모험』 북토크 후기

by 북드라망 2022. 9. 30.

이렇게 만났습니다!
- 『슬픈 열대, 공생을 향한 야생의 모험』 북토크 후기


어느덧 9월의 마지막 주, 마지막 날이네요. 올해 2월부터 한 달의 끝에는 ‘공부로 불타는 화요일’이 있었지요. 이번 달도 어김없었습니다. 27일 화요일 저녁 7시, 『슬픈 열대, 공생을 향한 야생의 모험』을 가지고 줌에서 모였습니다. 


지난 8월, 『돈키호테, 끝없는 생명의 이야기』에 참여하셨던 곰샘이 매우(아마도) 부러워하셨던(“내 저자 강의 땐 이런 것도 안 해주고 말야”—쉑북은 북토크에서만 한답니다^^) 쉑북의 시간을 지나, 인상 깊은 구절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오늘은 북토크에 참여해 주신 독자님들께서 『슬픈 열대, 공생을 향한 야생의 모험』의 어느 부분을 만나셨는지를 중점적으로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어쩜 이렇게 겹치는 데 하나 없이, 다들 다른 곳을 ‘픽’(pick)해 오셨는지…^^. 여담이지만 잠깐 그런 생각도 했답니다. 인터넷서점의 미리보기 서비스를 독자님들이 골라 주신 부분으로 하면 재밌겠다고요. 해당 페이지에 ‘○○○ 독자님이 골라 주셨습니다’라고도 쓰고요. 이것이 성지가 될지…는 나중에 두고 보기로 하고요, 다시 북토크로 돌아갑니다. 북토크에서는 이런 말들이 오갔습니다^^. 

 

★ 레비-스트로스는 이런 안타까운 사정을 코앞에 두고서, 자신의 유한한 경험세계를 넘어 타자를 만나고 자연을 이해할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남아메리카의 지세를 바라보며 수많은 풍경, 다양한 인간을 고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는 없을까 궁리했지요. 그래서 기승전결로 짜인 여행기, 모든 경험을 자기 고유의 경험으로 환수해 버리는 여행기를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다양한 경험과 관점들을 다채롭게 종합해 내는 양식이 필요했고, 그것을 지질학이 풍경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찾아냈습니다.(64쪽)

 

“저는 『슬픈 열대』 제목만 들어 봤지, 레비-스트로스 삶에 대해서는 오선민 선생님의 책을 통해서 처음 봤는데, 나름의 이방인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타자를 만나는 시선과 자연을 이해하는 것을 같이 놓고 레비-스트로스가 생각했다는 게 인상적이었고, 저도 공부를 하면서 제 고유의 경험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힌트를 이 부분에서 얻었습니다.”(이*민) 

 

★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에 인간의 손이 가해진 자연 그 자체, 유럽인의 발자국이 찍혀 있지 않은 원시 그 자체란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나와 함께 경험되는 공간, 그 장소와 함께 다시 구성되는 나가 있을 뿐입니다.(95쪽)


“선생님께서도 책에서 말씀하셨지만 사람은 자기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생각을 하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규정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결국엔 그렇게 규정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계속해서 되어 가는 존재로서 자기가 놓여지는 시공간에 따라서 계속해서 변화해 나간다는 점, 그런 의미에서 여행이라는 것이 가지는 여행의 참된 의미라는 것에 대해서 설명해 주신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윤*영) 

 

★ 레비-스트로스는 홀로코스트를 어리석인 독일인들의 실수라든가 유럽 문명의 파행으로 보지 않습니다. 나중에 더 살펴보게 되겠지만,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에 반유대주의와 같은 방식으로 자타의 살인적 배타성을 강화하는 문화 현상은 인류의 모든 문명에 내포되어 있는 잠재되어 있는 잠재적 위험입니다. 문제는 이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어떻게 찾느냐 입니다. ‘인간은 타자를 통해 자기를 구성한다. 그런데 그 구성 방법에 어떤 문제가 있기에 찾아낸 타자에 대한 극도의 경멸로 자기다움을 유지하게 되는 것일까?’ 20년간의 침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긴 시간 동안 레비-스트로스는 바로 이 물음에 답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답을 구하게 되자 쓸 수 있었겠지요.(44~45쪽)

 

“홀로코스트라든지, 나치즘에 대해서 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에서 ‘이런 나쁜 놈들!’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왜냐하면 그런 시선 자체가 나치나 홀로코스트와 똑같은 시선으로 타자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판단이라는 것을 하지 않았다라고 해서 그 내용이 되게 와닿았고, 제가 생각해 보지 않았던 부분어서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줄을 쳐 놨고요. 
레비-스트로스가 20년 동안 이 책을 묵혀 놓고 안 쓰셨던 거잖아요. ‘아, 이게 어떻게 해석돼야 하지’ 이러면서 고민을 엄청하시다가 20년 만에 이 답을 써 내야겠다 하면서 쓰셨다는 게 감동적이었다고 그래야 하나(일동 엄마 미소 ㅎㅎ). 저도 글 쓰는 입장에서 이런 고민과 침묵이 있었다니 하면서 많이 놀라웠던 것 같습니다.“(박*비) 

 

★ 지질학이란 지층의 다채로운 무늬를 다루는 학문입니다. 이 무늬는 그 장소에 우연히 놓인 지질 구성 성분들이 우발적인 지구 내부의 압력에 의해 만들어지죠. 지구가 지층의 무늬 같은 것을 기획하거나 계산할까요? 자연 전체의 힘 관계에 목적이나 방향을 부여하는 존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질학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풍경의 존재함, 사건의 출현함 자체에 어떤 선험적인 목적을 두지 않음을 뜻합니다.(59쪽) 

 

“요즘에 목성(감이당 목요 대중지성)을 통해서 불교공부를 하고 있는데, 지금 자본주의에서는 어떤 목적이나 방향을 가지라고 압박을 많이 하고 저도 그런 목표에 도달하고 있는 과정에 있는 중이라 이게 아니라고는(잘못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잘 그려지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지질학적 시선’이라는 걸 듣고서는 내가 이렇게 될 거야라고 하지 않지만 이렇게 된다는 것이 신기했고, 그렇다면 그걸 벗어난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을까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남*아) 

 

★ 레비-스트로스는 이렇게 ‘남을 남인 채로 두는’ 공존의 기술이 전무한 사람들에게 별명 하나를 붙여 줍니다. 아니, 병명(病名)을 하나 붙여 줍니다. 그들은 ‘만성적인 고향 상실증’에 시달리고 있다고요. 이 지점에서 우리는 레비-스트로스가 왜 고향인 프랑스를 보여 주는 것으로 『슬픈 열대』를 끝맺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기원을 특정한 장소, 특정한 역사와 연결시키면서 출신을 향수하려는 사람들은 아픈 것입니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동향이 아닌 자와 자신을 차별적으로 분리하려는 편집증자가 되니까요.(265쪽)

 

“이 책 전체에서 타인과 만나는 방법을 오선민 선생님께서 잘 보여 주고 계시는데, 사실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정체성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남과의 차이를 두는 게 가장 손쉬운 방법이니까, 늘 거기로 돌아가게 되지 않습니까? 나를 생각하는 데에는 반드시 남이 전제되고 그러면서 계속 차별을 둘 수밖에 없는데, 이 책 전체에서 레비-스트로스가 그걸 어떻게 사고하려고 했는지, 어떻게 빠져나가는지에 대한 조금의 단서를 책 전체에서 발견할 수 있었고, 남을 남인 채 내버려 두지 않는 이 기술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북*령)

 


강의 중에 오선민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이 선생님과 저 선생님과 제가 아무리 다른 글을 쓴다 해도 근원에서는 자연 안에서 자기 위치를 찾기 위해서 밸런스를 맞추려는 노력 때문에 나왔다라고 본다’고요. 어쩌면 북토크에 참여해 주신 분들이 이렇게 서로 다른 구절들을 골라오신 것은 (물론 우연의 일치이기도 하겠지만) 밸런스를 맞추기 위한, 함께 살기 위한 노력이 무의식 중에 발현된 것은 아닐까 소오름이 돋기도 했습니다. ‘오바’인 걸까요? 그래도 저는 이번 북토크에서 얻은 이 ‘소오름’을 간직해 두고 싶네요. 마지막으로 이번 북토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선생님 말씀을 옮겨 놓고, 다음을 기약하겠습니다. 다음번 북토크는 『여섯 가지 키워드로 읽는 인도신화 강의』인 거 아시죠? 앎의 밸런스가 맞춰지는 소리가 벌써 들리는 것 같네요. 담번 북토크에서 꼭, 또 만나요!^^

 


[“타자에 대해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은 어떤가요?”라는 질문에]
“일단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안 된다, 그건 안 된다. (일동 웃음) 알아야 돼요. 왜 저러나를 깊이 이해한 다음에 나오는 거리두기. 이게 거리의 파토스인데, 레비-스트로스는 거리라는 단어를 되게 좋아하더라고요. 거리를 둬서 계속 다르다라는 것을 유지하는 거예요. 다르다, 다르다, 다르다. 그런데 그 거리가 모두와 같은 방식으로 조정이 된다는 것은 거리를 안 두는 거라고 볼 것 같고요. 그런데 사람마다 이 사람 앞에서의 내가 다르고, 저 사람 앞에서의 내가 다르다는 것, 이걸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저 타자를 이해했기 때문에 나오는 거죠. 내가 하루에 여러 사람을 동시에 만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모든 걸 종합해서, 모두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관계를] 해낼 때 그게 최고봉인 거죠. 하지만 누구나 할 것 없이 거리가 같다면, 그것은 ‘안 된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