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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열의 자기만의 고전 읽기

칼과 바다, 정치사상가 한비자 읽기 (7) : 한비자 개요 ③

by 북드라망 2022. 8. 25.

칼과 바다, 정치사상가 한비자 읽기 (7) : 한비자 개요 ③

복합적인 사상의 결(1)



한비의 세계는 단순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사상 이면에는 역사에 대한 통찰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한비는 이전의 역사를 상세하게 검토해 거기서 얻은 결론을 자기 사상으로 체계화했다. 적지 않은 역사자료가 참고로 수록되었다. 역사적 전례뿐 아니라 이전의 사상을 검토하고(노자 해석포함) 당대의 학술도 포괄해 이를 자신의 사고와 견주는, 역사의식과 현실감각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 부분은 중요하기 때문에 셋으로 나눠 얘기할 수 있다. 

1) 자료로서의 역사와 그 해석이다. 역사의 쓸모를 누가 모르랴마는 당위로 떠드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가 있다. 역사의 효용을 잘 알기에 기록성에 대한 한비의 감각은 남다르다. 『한비자』에 수록된 기록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희귀 자료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오리지널리티에 점수를 많이 준다. 높은 점수를 받는 다른 이유는 역사해석과 관련된다. 역사는 자료더미가 아니다. 반드시 어떤 관점을 가지고 해석해야 하고 해석행위가 개입할 때 역사가 된다. 법가적 역사관이라 명명할 수 있는 그의 역사관은 임금의 통치에 대한 반성과 도움자료로 해석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사상에 역사적 증거를 제시하는 모양새다. 이 말은 역사를 거울로서 해석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거울로 이미지화한 효용으로서의 관점. 

 

그렇다면 동일한 태도를 견지하는 유가적 해석과 무엇이 다른가. 한비는 법가 이데올로기에 기반하기 때문에 역사관을 해석하면 그의 사상을 알 수 있다. 뻔한 소리라고? 뒤집어 얘기하면 한비는 역사를 자신의 이념에 맞게 해석함으로서 자신의 이데올로기성(性)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독자들은 한비의 역사해석을 읽음으로서 한비의 이념성을 정확히 이해하게 된다. 이는 그대로 유가의 역사해석에도 적용된다. 유가의 역사해석은 한 학파의 사고방식일 뿐 일반적이지도 대표성을 띤 것도 보편성을 가진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한비의 역사해석을 통해 볼 수 있다.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드러냄으로서 유가 역시 하나의 이데올로기임을 보여준다. 이 부분이 한비의 빼어난 점이다. 유가의 한비 비판은 예리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한비가 근저에서 비판한 이념성을 간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비를 비판하면 할수록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는 여기서 이데올로기란 개념을, 보편성 사상인 냥 널리 유포돼 특수하고 개별적인 역사적 존재성(사고양태)을 망각한 허위의식이라는 비판적 의미로  사용한다. 한비의 기록성과 역사해석은 중요한 테마이기 때문에 뒤에서 다시 다루기로 한다. 

 

한비를 비판하면 할수록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난 유학

 

한비가 인용한 역사자료는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한비자』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상당하다. 한비는 역사자료를 따로 분류했다. 「설림」(說林) 상·하 두 편에, 「내저설」(內儲說) 상·하, 「외저설」(外儲說) 좌상(左上)·좌하(左下)·우상(右上)·우하(右下) 등 저설(儲說) 여섯 편, 「난일」(難一)에서 「난사」(難四)까지 네 편, 모두 12편이 이에 해당한다. 적지 않은 분량이다. 한비는 논의를 벌일 때 늘 역사와 고사를 인용하는데 그것까지 고려하면 그의 논의 전체가 역사와 전거(典據)를 빼고는 얘기할 수 없을 정도라 하겠다. 「화씨」(和氏)같은 경우도 이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데 화씨의 고사를 전면에 두고 논의한다는 점에서 그의 글쓰기와 역사전거 활용방식을 알 수 있다. 

역사자료를 읽어 볼 차례다. 「설림(說林) 상」에서 뽑아 본다.

 

“관중과 습붕이 환공을 따라 고죽국을 정벌했는데 봄에 가서 겨울에 돌아왔다. 지리가 헷갈려 길을 잃고 말았다. 관중이 말했다. ‘늙은 말의 지혜를 이용할 만합니다’ 하고는 늙은 말을 풀어주고 말을 따라가 마침내 길을 찾았다. 산중에 가다가 물이 없었다. 습붕이 말했다. ‘개미는 겨울에 산 남쪽에 살고 여름엔 산 북쪽에 삽니다. 개미집이 한자인데 한길 아래 물이 있을겁니다’ 하고는 땅을 파서 마침내 물을 찾았다. 
  관중의 성스러움과 습붕의 지혜를 가지고서도 그들이 알 수 없는 일에 닥치면 그들은 늙은 말과 개미에게 배우는 행동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지금 사람들은 어리석은 마음을 가졌으면서도 성인의 지혜를 배우려고 하지 않으니 진정 잘못이 아니겠는가.”[管仲·濕朋從於桓公而伐孤竹, 春往冬反, 迷惑失道. 管仲曰:‘老馬之智可用也.’ 乃放老馬而隨之, 遂得道. 行山中無水, 濕朋曰:‘蟻冬居山之陽, 夏居山之陰. 蟻壤一寸而仞有水.’ 乃掘地, 遂得水. 以管仲之聖而濕朋之智, 至其所不知, 不難師於老馬與蟻. 今人不知以其愚心而師聖人之智, 不亦過乎.]


인용한 글은 다른 글들과 달리 마지막 문장에 자신의 의견을 노출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대부분의 글은 이야기만 서술하고 해석을 노출하지 않는다. 교훈을 배운다는 저자의 목적이 명시된 글이다.  

 

「내저설」(內儲說)·「외저설」(外儲說)은 「설림」(說林)과 성격이 다르다. 「내저설」(內儲說)과 「외저설」(外儲說)은 경문(經文)이라 해서 원칙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설명, 그리고 역사적 사례[傳文, 이때 전傳은 전해 내려온다는 의미다]를 수록하고 일설(一說)이라 해서 동일한 이야기의 다른 버전까지 기록해 자료를 구성했다. 한비가 역사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알 수 있는 편집이지만 체계적인 편집행위보다는 이런 작업방식 덕에 춘추전국시대 저술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상당량의 역사자료가 갖춰지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내저설 상」에서 한 편을 들어 본다.

 

“초나라 남쪽 땅 여수(麗水)에서 금이 나오자 사람들이 대부분 몰래 금을 채취했다. 금 채취를 금지하는 법은 잡히면 바로 시장에서 사지를 찢어 죽이는 것이었다. 법에 걸려 잡혀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 여수를 막을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몰래 금을 채취하는 일이 그치지 않았다. 형벌 가운데 시장에서 사지를 찢어 죽이는 것보다 무거운 게 없는데도 금 훔치는 일이 그치지 않는 것은 반드시 잡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네게 천하를 주겠지만 네 몸을 죽일 것이다.’ 보통 사람은 여기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천하를 갖는 것은 큰 이익이긴 하나 그래도 하지 않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잡히는 게 아니라면 사지를 찢어 죽인다 한들 몰래 금을 채취하는 일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면 천하를 갖게 되더라도 하지 않을 것이다.”[荊南之地, 麗水之中生金, 人多竊采金. 采金之禁, 得而輒辜磔於市. 甚衆, 壅塞其水也, 而人竊金不止. 夫罪莫重於辜磔於市, 猶不止者, 不必得也. 故今有於此, 曰:‘予汝天下而殺汝身.’ 庸人不爲也. 夫有天下, 大利也, 猶不爲者, 知必死. 故不必得也, 則雖辜磔, 竊金不止. 知必死, 則天下不爲也.]

 

인용한 글은 사례로 든 전문(傳文)뿐이다. 간략히 언급했던 저설(儲說)의 짜임새를 좀 더 살펴보자. 「내저설(內儲說) 상(上)」은 「칠술(七術) 제삼십(第三十)」이라는 다른 제목을 이어 붙이기도 한다. 칠술이라는 벼리를 걸고 일곱 벼리에 따라 하위 항목을 세분화했기 때문이다. 「내저설(內儲說) 상(上)」 은 이렇게 시작한다. “임금이 사용해야 할 술책이 일곱[七術]이고 살펴보아야 할 것이 여섯 가지 기미[六微. 육미에 해당하는 편이 「내저설內儲說 하下」다]다. 칠술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많은 증거를 서로 대조해 보아야 한다. 둘째, 반드시 벌을 내려 위엄을 명확히 해야 한다. 셋째...일곱째, 말을 뒤집고 일을 거꾸로 한다. 이 일곱 가지는 임금이 써야 할 것들이다.”[主之所用也七術, 所察也六微. 七術:一曰, 衆端參觀. 二曰, 必罰明威. 三曰...七曰, 倒言反事. 此七者, 主之所用也.] 이 부분이 경문이다. 우선 경문은 칠술이 무엇인지 원칙을 서술한다. 그 다음 칠술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둘째 항목인 필벌에 가면, “사랑이 많으면 법이 제대로 서지 못하고 위엄이 적으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침범한다. 이 때문에 형벌을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금령이 행해지지 않는다....이에 여수에서 나는 금을 지키지 못했다....”[愛多則法不立, 威寡則下侵上. 是以刑罰不必則禁令不行....是以麗水之金不守...] 칠술을 정의하고 설명하면서 사례로 증명하는데 각 전문(傳文)의 개요를 먼저 보여준다. 그리고 차례대로 역사적 사례가 하나하나 설명된다. 체계적으로 구상해 쓰여졌음을 알 수 있는 편집이다. 크게 보면 제목-설명-사례로 되지만 일곱 제목이므로 7개씩 설명이 붙고 그 설명 아래 각각의 사례가 붙었기 때문에 전체 분량이 많을 수밖에 없다. 첫 번째 항목 참관(參觀)에는 10개의 전문(傳文)이, 필벌에는 25개의 전문이 제시된다. 마지막 항목이 도언(倒言: 신하를 살펴보기 위해 임금이 말을 거꾸로 해 보는 것)인데 6개 짧은 전문이 보인다. 칠술 가운데 필벌의 전문이 가장 많다. 그만큼 필벌을 중시했다는 말이다. 인용한 글은 25개의 전문 가운데 9번째 보인다.

 
덧붙이자면 「저설」(儲說)에서 보여 준 이런 글쓰기―‘제목에서 설명으로, 설명에서 전문(傳文)으로’ 이어져 연결되는 방식을 한나라 위(魏)나라 때 사람들은 연주체(連珠體)라 불렀다. 한비의 이 글은 전혀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였고 저설(儲說)은 연주체의 시조가 되는 글이다. 연주체에 대해서는 뒤로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인용한 글은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준다. 현대사회에서 법이 그렇게 엄한데도 비리가 왜 사라지지 않는지 옛사람들은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익은 그렇게 유혹적이고 법의 한계는 명백하다. 한비가 법을 구상할 때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글이다. 법을 아무리 촘촘하게 짜서 사회를 전부 싸안는 그물을 만든다 해도 실행은 별개일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바꿔 말하면 걸리지 않으면 무슨 일이든 저지른다는 인간심리의 숨은 면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글_최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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