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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열의 자기만의 고전 읽기

칼과 바다, 정치사상가 한비자 읽기 (9) : 한비자 개요 ⑤ 복합적인 사상의 결(3)

by 북드라망 2022. 10. 6.

칼과 바다, 정치사상가 한비자 읽기 (9) : 한비자 개요 ⑤

복합적인 사상의 결(3)

 

   
3) 당대 여러 사상조류를 검토하고 사상 선배들을 비판적 음미했다. 「난세」(難勢)는 신도(愼倒)의 세(勢) 논리를 논박한 글로, 세(勢)를 검토해 자신의 사상으로 수용하는 장면이, 「정법」(定法)은 세(勢)뿐 아니라 신불해(申不害)의 술(術)과 상앙(商鞅)의 법(法)이 종합적으로 검토된다. 상앙의 법사상과 관련해 「칙령」(飭令)과 「제분」(制分)을 두어 법 사상을 따로 다룬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대사상에 대한 비판이 자신의 사상 정립에 필수임은 두 말이 필요치 않다. 당대 경쟁자들을 비판한 글은 학술사 연구에 좋은 자료다. 「현학」(顯學)이 대표적인 글로 당시 현저한 영향력을 가졌던 유가와 묵가(墨家)에 대한 비판이 선명하다. 유가와 관련해서는 「충효」(忠孝) 편을 언급했지만 유가의 인의(仁義) 정치 비판은 「팔설」(八說)에서 따로 다뤘다. 국제정치를 주름잡던 당대 변사(辯士)들은 「문변」(問辯)에서 비판한다. 언급한 자료들은 한비 당시의 지적 분위기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예문을 들어 본다.

 

“세상에 유명한 학파는 유가와 묵가다....공자와 묵가의 사후, 유가는 나뉘어 여덟 학파가 되었고 묵가는 분리되어 세 학파가 되었다. 학파별로 취사선택이 상반되고 같지 않은데도 모두 자기들이 진짜 공자, 진짜 묵자라고 얘기한다. 공자와 묵자가 다시 살아올 수 없는데 누가 세상의 학파를 판정할 수 있겠는가. 공자와 묵가 모두 요순을 얘기했지만 취사선택이 같지 않은데 모두 자신들이 진짜 요순이라고 얘기했다. 요순이 다시 살아올 수 없는데 누가 유기와 묵가가 진짜인 줄 판정할 수 있겠는가....

묵가의 장례는 겨울에는 겨울옷을 입고 여름에는 여름옷을 입으며 오동나무관 세치 두께에 매장하고 3개월 동안 상복을 입는다. 세상의 임금들은 이를 검소하다고 생각해 예우한다. 유가의 장례는 집안을 파산하면서까지 장례를 치루고 3년 동안 상복을 입으며 몸을 크게 훼손해 지팡이에 의지한다. 세상의 임금들은 이를 효도라고 생각해 예우한다. 무릇 묵자의 검소함이 옳다면 공자의 사치는 잘못된 것이다. 공자의 효도가 옳다면 묵자의 야박함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 효도와 야박함, 사치와 검소가 모두 유가와 묵가 안에 있는데도 임금은 이 모순을 모두 예우한다....뒤섞이고 반대되는 말이 다투는데도 임금은 모두 귀 기울여 듣는다. 그렇기에 세상 모든 선비들이 말에 정해진 학술이 없고 행동에 일정한 원칙이 없는 것이다. 얼음과 숯불은 같은 그릇에 오래 담아둘 수 없고 추위와 더위는 똑같이 시기에 오지 않는 법이다. 뒤섞이고 반대되는 학파가 양립해서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 지금 뒤섞인 학문에, 잘못된 행동, 서로 다른 말을 죄다 듣고 있으니 어찌 어지럽지 않겠는가. 그들의 말을 듣고 행동하는 것이 이와 같다면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도 또 반드시 어지러울 것이다....”[世之顯學, 儒墨也....孔墨之後, 儒分爲八, 墨離爲三, 取舍相反不同, 而皆自謂眞孔墨, 孔墨不可復生, 將誰使定世之學乎? 孔子墨子俱道堯舜, 而取舍不同, 皆自謂眞堯舜, 堯舜不復生, 將誰使定儒墨之誠乎?...墨者之葬也, 冬日冬服, 夏日夏服, 桐棺三寸, 服喪三月. 世主以爲儉而禮之. 儒者破家而葬, 服喪三年, 大毁扶杖, 世主以爲孝而禮之. 夫是墨子之儉, 將非孔子之侈也;是孔子之孝, 將非墨子之戾也. 今孝戾侈儉俱在儒墨, 而上兼禮之....雜反之辭爭, 而人主俱聽之. 故海內之士, 言無定術, 行無常議. 夫冰炭不同器而久, 寒暑不兼時而至, 雜反之學不兩立而治, 今兼聽雜學繆行同異之辭, 安得無亂乎? 聽行如此, 其於治人又必然矣....]

 

자못 신랄하고 예리하다. 유가와 묵가뿐 아니다. 이기주의자로 잘못 알려진 양주(楊朱), 협객 무리, 토지를 나눠주자고 주장하는 학자들 등등을 하나하나 격파한다. 한비의 근거는? 이들이 모두 입만 살아 놀고 먹는 존재라는 것, 사회에 혼란을 일으킨다는 것. 한비가 구상하는 사회는 자기 직분을 지키고 모두 일하며 실용과 관계없는 공담(空談)이 사라진 세상이다. 순자가 “제일”(齊一)이라고 표현했던, 분(分)이라고 말한 계급사회의 원칙이 일관되고 균등하게 적용되는 사회였다. 다양성보다 통일성이 중요시되는 가치였다. 한비는 군주의 통치론 차원에서 논의했다.

 

다양성보다 통일성을 중시했던 한비


이상 크게 세 부류로 나누고 중요한 세 번째 부류의 글은 다시 셋으로 세분해 보았는데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중요한 글들이 몇 편 남았다. 한비의 저작이 아니라는 주장으로 논란이 되는 「초견진」(初見秦)과 「존한」(存韓)은 빼더라도, 앞서 언급한 「세난」(說難)이며 「궤사」(詭使), 「난언」(難言), 「고분」(孤憤) 등이 세 부류에 속하지 않는 글이다. 이 편들은 자신의 격분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감정적인 글로 함께 묶을 수 있다. 「오두」(五蠹)도 주제에 방점을 두지 않는다면 이 부류에 넣을 수 있다. 호소력이 상당한 글로 모두 명문이라 할 수 있다. 


한문 산문은 많은 갈래(장르)로 나눌 수 있고 숱한 글이 실용성이 강한데도 문학성이 빼어난 면모를 자랑한다. 이 가운데 예술산문으로 명명할 수 있는 일군의 글들이 있다. 서정적 감도가 높거나 예상치 않은 통찰력을 보여주거나 독특한 묘사가 돋보이거나 인물형상이 뛰어나거나 등등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예술성의 세목을 거론할 수 있는데 감정의 격동을 일으키는 글도 그 다양한 색채의 예술성 가운데 하나다. 고분(孤憤)―지식인의 ‘고독한 분노’는 감정을 억누르며 불우한 지식인의 심정을 드러낸다. 글을 아는 사람의 고뇌가 배어 있다는 점에서 외면할 수 없는 힘이 독자를 잡아끈다. 


저자의 토로에는 갈망과 고독과 괴로움이 저류한다. 논리성, 예리함, 풍부한 역사증거, 조직성이 제 스스로 차별되건만 진정한 매력은 냉정 속의 열정일 것이다. 그 보이지 않는 열정을 감지할 때 표면의 분노를 넘어 글은 다른 차원으로 진입한다. 예술이 되는 까닭이 여기 있지 않을까. 


「고분」을 읽을 시간이다.
 

“술법을 아는 선비는 반드시 멀리 보고 명확하게 통찰해야 한다. 명확하게 통찰하지 못하면 사사로운 행동을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법에 밝은 선비는 반드시 굳세고 의연하며 강직해야 한다. 강직하지 않으면 간사한 행위를 바로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하들 가운데 명령을 따라 자기 일에 종사하고 법을 따라 관리를 다스리는 사람을 세력이 중한 사람[重人]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세력이 중한 사람은 명령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행동하며 법을 어기면서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고 나라의 재산을 소모하면서까지 자기 집안을 편안하게 한다. 이런 사람들이 이른바 세력이 중한 이들이다. 술법을 아는 선비는 이들을 명확하게 통찰한다. 임금이 그들의 말을 듣고 발탁해 쓴다면 이들은 세력이 중한 사람들의 감추어진 실상을 밝힐 것이다. 법에 밝은 선비는 강직하다. 임금이 그들의 말을 듣고 발탁해 쓴다면 이들은 세력이 중한 사람들의 간악한 행동을 바로 잡을 것이다. 그러므로 술법을 알고 법에 밝은 선비가 조정에 쓰이게 되면 벼슬자리가 높고 세력이 중한 신하들은 반드시 법 밖에 있게 되어 처벌받게 된다. 이는 법을 아는 선비와 요직에 있는 신하가 양립할 수 없는 원수 사이임을 뜻한다....

무릇 요직에 있는 신하는 임금에게 신뢰와 사랑을 받지 않는 경우가 드물고 또 익숙하고 가까운 사이다. 임금 마음을 헤아려 좋고 싫은 것을 똑같이 공유해 확실히 이를 통해 자기 임금과 가까이 할 수 있다. 벼슬이 높고 세력이 중한데다 붕당도 많아 온 나라가 그를 위해 송사도 벌일 수 있다. 그러나 임금과 만나고 싶은 법술의 선비는 신뢰와 사랑을 받는 친밀함이며 가까이 지내 잘 아는 은택이 없는 데다 법술의 언어로 아부에 쏠린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으려 하므로 임금과 어긋나게 된다. 그는 세력이 낮고 보잘것없으며 붕당도 없이 혼자다. 임금과 소원한 처지에서 임금과 가깝고 신뢰와 사랑을 받는 이들과 다툼을 벌이니 절대 이길 수 없다. 새로 온 나그네로서 임금과 가까이 지내 잘 아는 신하와 다툼을 벌이니 절대 이길 수 없다. 임금의 마음과 반대되는 여건에서 임금과 호오를 함께 하는 사람과 다툼을 벌이니 절대 이길 수 없다. 권세가 가볍고 지위가 천한 위치에서 벼슬이 높고 권세가 중한 신하와 다툼을 벌이니 절대 이길 수 없다. 자기 혼자의 입으로 온 나라와 다투는 격이니 절대 이길 수 없다. 법술의 선비는 이 다섯 가지 이길 수 없는 형세를 쥔 채 몇 해가 지나고 임금을 만날 수 없다. 요직에 있는 신하는 다섯 가지 이기는 바탕에 앉아 아침저녁으로 혼자 임금을 설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법술의 선비는 어느 길로 임금에게 나아가겠으며 임금은 어느 때에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러하니 바탕에서도 절대 이길 수 없는데 세력에서도 양립할 수 없는 관계이니 법술의 선비가 어찌 위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죄와 허물로 덮어씌울 수 있는 경우에는 공법公法으로 선비를 죽여 버릴 것이요 죄와 허물로 뒤집어씌울 수 없을 때는 사사로이 검객을 동원해 선비를 없앨 것이다. 법술에는 밝으나 임금을 거스른 선비는 관리들의 처벌에 죽지 않으면 반드시 사사로이 고용된 검객에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智術之士, 必遠見而明察, 不明察不能燭私; 能法之士, 必强毅而勁直, 不勁直不能矯姦. 人臣循令而從事, 案法而治官, 非謂重人也. 重人也者, 無令而擅爲, 虧法以利私, 耗國以便家, 力能得其君, 此所爲重人也. 智術之士明察, 聽用, 且燭重人之陰情;能法之士勁直, 聽用, 且矯重人之姦行. 故智術能法之士用, 則貴重之臣必在繩之外矣. 是智法之士與當塗之人, 不可兩存之仇也....凡當塗者之於人主也, 希不信愛也, 又且習故. 若夫即主心同乎好惡, 固其所自進也. 官爵貴重, 朋黨又衆, 而一國爲之訟. 則法術之士欲干上者, 非有所信愛之親, 習故之澤也, 又將以法術之言矯人主阿辟之心, 是與人主相反也. 處勢卑賤, 無黨孤特. 夫以疏遠與近愛信爭, 其數不勝也;以新旅與習故爭, 其數不勝也;以反主意與同好爭, 其數不勝也;以輕賤與貴重爭, 其數不勝;以一口與一國爭, 其數不勝也. 法術之士, 操五不勝之勢, 以歲數而又不得見. 當塗之人, 乘五勝之資, 而旦暮獨說於前. 故法術之士, 奚道得進, 而人主奚時得悟乎? 故資必不勝而勢不兩存, 法術之士焉得不危? 其可以罪過誣者, 以公法而誅之. 其不可被以罪過者, 以私劍而窮之. 是明法術而逆主上者, 不僇於吏誅, 必死於私劍矣....]


「고분」에는 지뢰밭을 건너는 심리로 가득하다. 통치의 주체인 임금을 움직여 부국강병으로 이끌려는 선비와 자신의 이익을 탐하는 기존 관료를 대치시켜 기득권을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목숨을 건 유세객의 상황을 박진감 있게 설파했다. 정확히 말하면 상술한 묘사는 한비가 파악한 현실, 그의 현실인식이라 하겠다. 찬찬히 생각해 보면 한비가 파악한 현실이 냉정한 진실이라 하겠다. 글이 빼어난 이유는 그의 적실한 현실파악능력에서 오지만 바탕에 깔린 감정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가는 우환(憂患)의식이 강하다는 게 통상 견해다. 세상을 근심한다는 지식인의 책무로 흔히 인용하는 말이다. 한비의 글을 읽노라면 한비만큼 강렬한 우환의식도 보기 힘들다. 한비의 선배로서 맹자를 떠올려보자. 유세객으로서 맹자는 성인의 이상정치를 실현하고자 바삐 세상을 돌아다녔지만 그의 글은 한비만큼의 절박감까지는 느껴지지 않는다. 우열을 논하자는 게 아니다. 그만큼 한비의 열도가 뜨겁다는 말이다. 「고분」에는 절박감과 위기의식이 가득하다.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줄 이렇게 잘 알면서, 「세난」에서 보듯 임금을 만났다 한들 유세의 어려움은 또 다른 문제라서 겹겹이 층층이 장애물 투성이, 조금만 삐끗해도 목숨이 날아가는 판인데 무엇이 한비를 정치개혁에 나서도록 하는 것일까. 한비 개인의 열정일까. 글 읽은 사람의 사명감일까. 지식인에게 부여한 시대 분위기 때문일까. 고난에 사는 백성을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일까. 공자가 사(士) 계급에게 책임감을 부여하고 시대를 이끌 사명감을 부여한 이후 몇 백 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 계급의 자기 각성은 이렇게 높아졌다. 자신을 수양하는 사람에서부터 사회를 개선해 이끌어야 한다는 임무를 떠안은 사람까지 스펙트럼은 넓어졌고 한비는 오롯이 사회철학에 집중했다. 『순자』에서 종합적으로 논의된 통치철학이 한비에 이르러 군신관계로 초점이 맞춰졌고 논리는 치밀해지면서 깊어졌다. 다시 자문해 본다. 무엇이 한비를 통치철학에 집중하게 한 것일까. 「고분」은 읽을수록 풀기 어려운 질문이 따라온다. 다단한 질문으로 몰아치는 힘, 그게 이 글의 미덕이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한비의 절박감에 비하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가. 그의 절박감에 얼마나 다가갈 수 있을까.

 

 

글_최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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