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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열의 자기만의 고전 읽기

칼과 바다, 정치사상가 한비자 읽기 (8) : 한비자 개요 ④복합적인 사상의 결(2)

by 북드라망 2022. 9. 15.

칼과 바다, 정치사상가 한비자 읽기 (8) : 한비자 개요 ④

복합적인 사상의 결(2)

 


2) 이전 사상에 대한 검토다. 한비는 자신의 사상적 토대를 역사에 비춰 볼 뿐 아니라 근본적인 사고의 측면에서도 따져보았다. 철학적 기반을 두드려보는 일이 필수적이었는데 그가 선택한 고전은 『노자』(老子)(道德經)였다. 현실에 대한 예리한 안목은 『순자』에게 힘입은 바 크고 『순자』의 논거에 기대 구체적 제도를 구상하는 쪽에 힘을 기울였지만 제도의 기반을 떠받치는 근거에 대해서도 한비는 고민이 깊었다. 『도덕경』은 당대에 이미 심오한 사고를 품은 책으로 널리 알려진 듯한데 한비는 『노자』를 재해석하고 소화해 법(法) 사상의 초월성을 확보하려 했다. 법이 통치의 수단을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이는 중요한 작업이었다. 

 

 


논어해석사(論語解釋史)와 마찬가지로 노자해석사(老子解釋史)를 쓸 수 있을 텐데 그 동안 아니 현재에도 한비의 『노자』 해석은 소홀히 취급당했다. 현재 널리 통용되는 왕필(王弼)의 위진남북조시대 판본과는 다른 고층대의 텍스트를 사용한다는 점에서도 한비의 노자해석은 참고가 될 만하고 지금의 도경(道經)·덕경(德經) 체계가 아니라 덕경(德經)·도경(道經) 순서로 텍스트를 읽은 방식도 눈여겨 볼만한 점이 있다. 「해로」(解老)·「유로」(喩老) 두 편이 이에 해당한다. 한비가 인용한 『노자』 텍스트가 완전한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인용한 글을 복원해도 주요 발굴본보다 가치가 작고 왕필의 편집본과도 변별점이 크지 않아 주목받지 못하는 사정이 이해가 간다. 하지만 한비의 해석은 간단한 『노자』 주석에 그치지 않는다. 충분히 음미되어야 하므로 두 편은 따로 다루기로 한다. (두 편의 연장선에서 「수도」[守道]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예문을 읽어 보자. 「유로」에서 가져온 글이다.
   

“왕수가 책을 지고 길을 가다 주나라 길에서 서풍을 만났다. 서풍이 말했다. ‘일은 실행이다. 실행은 때에 맞게 하는 데서 드러난다. (때를) 아는 사람은 정해진 일이 없다. 책은 말이다. 말은 아는 것에서 생긴다. (말을) 아는 사람은 책을 간직하지 않는다. 지금 그대는 어쩌자고 책을 짊어지고 가시오?’ 그러자 왕수는 책을 불태우고 바람에 날려버렸다.
  그러므로 아는 사람은 가르침을 말로 하지 않고 깨달은 사람은 책을 간직하지 않는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은 잘못이라고 하지만 왕수는 근본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것이 ‘배우지 않음을 배운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 제64장에) ‘배우지 않음을 배워 뭇사람들이 지나치는 것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王壽負書而行, 見徐馮於周塗. 馮曰:‘事者, 爲也. 爲生於時, 知者無常事. 書者, 言也. 言生於知, 知者不藏書. 今子何獨負之而行?’ 於是王壽因焚其書而儛之. 故知者不以言談敎, 而慧者不以藏書篋. 此世之所過也, 而王壽復之, 是學不學也. 故曰:“學不學, 復歸衆人之所過也.”]


한비는 주나라의 은자로 알려진 서풍을 내세워 일화를 통해 노자의 말을 풀었다. 구체적인 예시를 가져와 노자를 해설했기에 「유로」(喩老)라고 한 것이다. 폭넓은 비유로 해석해 경문(經文)을 풀었는데 이해하기 쉽다. 비슷한 예로 『시경』(詩經)을 풀이한 『한시외전』(韓詩外傳)을 떠올릴 수 있다. 「해로」는 「유로」와 다르다. 「해로」의 첫 부분을 보자. 
 

  “덕은 내부에 있는 것이고, 득(得)은 외부에 있는 것이다. ‘상덕부덕’(上德不德)이라는 말은 우리의 신령스러움이 외부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신령스러움이 외부에 흔들리지 않으면 몸을 온전히 보존한다. 몸을 온전히 보존하는 것을 덕(德)이라고 한다. 덕이란 자기 몸을 온전히 갖는 것이다. 무릇 덕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無爲]으로써 모여들고 욕망하지 않음으로써 성취하며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편안하며 무엇에 쓰려고 하지 않음으로써 확고해진다. 무언가 하려 하고 욕망하면 덕은 머물 곳이 없고 덕이 머물 곳이 없으면 덕은 온전할 수 없다. 무엇에 쓰려 하고 생각하려 들면 확고하지 못하다. 확고하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이룰 수 없다. 좋은 결과를 이루지 못하면 인위적으로 덕을 쓰는 일이 생긴다. 이런 덕은 덕이 없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덕을 쓰지 않으면 진정한 덕이 생긴다. 그러므로 (『노자』 제38장에) ‘최상의 덕은 덕이 아닌 것 같다. 이 때문에 덕이 있다’고 하였다.”[德者, 內也;得者, 外也. 上德不德, 言其神不淫於外也. 神不淫於外則身全, 身全之謂德. 德者, 得身也. 凡德者, 以無爲集, 以無欲成, 以不思安, 以不用固. 爲之欲之, 則德無舍. 德無舍則不全. 用之思之則不固. 不固則無功. 無功則生於德. 德則無德, 不德則在有德. 故曰:“上德不德, 是以有德.”]


 「해로」의 글은 주석은 주석이되 통상적인 주석과 다르다. 자구 해석이나 용례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해석을 붙였다. 이론적인 성격이 강하다. 덕(德)을 발음의 유사성에 착안해 득(得)으로 풀이하는 음훈(音訓)은 『논어』에서 인(仁)과 인(人)을 혼용하는 관계로 풀이하는 예에서 보듯 낯선 방식은 아니다. 『노자』 본문에서도 덕(德)과 득(得)을 혼용해 ‘덕/실’(德/失)로 쓴 예가 23장에 보인다. 한비는 인용한 글에서 “득신”(得身)으로 풀이해 덕을 완전히 새롭게 해석했다. 이는 임금에게 형벌을 받지 않고 자신을 온전히 보전한다는 군신관계를 상정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인 색채가 강하다. 한비의 해석 자체를 다른 문맥에 놓고 재조직해야 할 성질의 글이다. 「유로」와 다른 형식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글_최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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