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붓다를 만나다
원자연(남산강학원)
2018년에 초기불경 세미나에서 붓다를 만났다. 업과 윤회, 고집멸도 등 모르는 말투성이였지만, 가~끔 마음속에 박히는 말이 있었다. 이를테면 ‘두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 ‘뗏목에 의지하여 가되 강을 건너기 위한 것임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부처님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자기 스스로를 괴롭히는지를 보게 하고, 가르침을 믿고 가되 배웠으면 그것을 놓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주셨다. 너무도 적확한 비유에 놀라고 그 뜻에 또 한 번 감탄했다. 그렇게 나는 붓다를 믿고 따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 경험은 과거형이다. 요즘 불경을 접할 때면 어렵고 답답하기만 하다. 탐욕‧집착‧갈애 등을 여의고 깨달음의 길을 간 수행승을 볼 때면, 대단하지만 나는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늘 쫓아다닌다. 나는 여전히 감각적 쾌락에 시달리고 대상에 집착하는 번뇌하는 중생이기 때문이다.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밖에 없다고 붓다는 말한다. 그러니 따라가 볼 수밖에! 하지만 이 비루한 현실과 저 먼 이상 사이에서 괴롭기만 하다. 그리고 이 간극을 나는 금욕과 당위로 해결하고 있다. ‘감각적 쾌락을 여의어야 해!’, ‘집착하면 안 돼!’ 시도와 실패뿐. 오, 이 불쌍한 중생이여!
『청년 붓다』를 통해 붓다의 삶을 엿보면서 무엇보다 크게 다가왔던 점은 붓다는 한 ‘인간’으로서 완전한 해방의 길을 갔다는 거다. 붓다는 우리와 같은 몸과 마음을 가진 존재로 고뇌하고 나아갔다. 고행을 하면서 생생하게 살아나는 탐진치의 업에 괴로워하고, 수행의 고비마다 등장하는 마왕의 유혹에 시달린다. 그리고 또 나아간다. 붓다는 이렇게 매번의 번뇌 속에서 이치를 얻었다! 내가 번뇌하는 중생이기에 이 길을 가지 못하겠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괜스레 든든해졌다. 길을 먼저 걸어 간 스승이 있다는 것에 대한 든든함이랄까.
‘붓다도 정말 사람이었구나!’를 믿게 된 한 장면이 있었다. 붓다가 아들의 이름을 ‘라훌라’라고 지은 것에 대해 저자가 해석해주던 장면이다. 나는 붓다가 아들을 ‘라훌라’ 즉, 장애물이라고 칭했던 지점에서 늘 의구심이 들었었다. 비인간적으로 느껴지고, 이 정도로 매정하고 단호해야지만 수행할 수 있는 건가? 라고 생각하며 수행의 마음을 살포시 접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저자가 들려주는 붓다의 스토리를 들어보면, 그 또한 정말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성을 떠나기 전 아기를 한번 안아 보고 싶어서 부인의 침실을 찾아가지만, 부인의 품 안에 있는 아들을 차마 안아 보진 못한다. 그렇게 그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리며, “부처가 되어 다시 돌아와 만나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아들에 대한 애착은 출가를 막으려는 아버지를 뿌리치는 것보다, 부인의 사랑을 저버리는 것보다 강력한 장애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아들을 ‘라훌라’라고 칭한 것이었다. 저자는 말한다. ‘라훌라’는 명사라기보다 감탄사에 가깝다고.
붓다는 인간으로서 겪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 없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관계에 대한 애착부터 수행하는 일상의 모든 어려움을 넘어가는 것까지. 아들을 남기고 떠날 때도, 자신이 가려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따르던 스승을 떠날 때도, 함께 고행하던 벗들이 자신을 떠날 때도, 절대 쉽지 않았을 거다. 붓다는 한 발짝 한 발짝 스스로 해방의 길을 열어젖혔다. 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진흙탕 속에서 매번 겪으면서도 계속 나아가게 되는 힘, 그것은 청년시절 붓다의 강렬한 질문에 있다. 그 강렬함이 끊임없이 겪고 좌절하면서도 그를 나아가게 했다. 청년시절 품은 강렬한 질문이 그의 일생을 수행으로 이끈 것이다. 질문하고 탐구하는 청년성만이 길을 나아가게 할 수 있다.
붓다가 그랬듯 내 삶에서 만나는 모든 번뇌가 깨달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장애물이라 생각되던 것이 곧 디딤돌임을 믿고 가보려 한다.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부딪히고 구르며 한 걸음씩 말이다. 그리고 ‘와서 보라’는 붓다의 말처럼 그의 법을 가서 보고 탐구하려 한다. 붓다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어떠한 번뇌 위에서 어떻게 나아갔는지를, 어떻게 완전한 해방에 이르렀는지를. 이전처럼 멋진 말을 그저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보고 그다음으로 나아가는 법을 붓다에게서 배울 것이다. 이럴 때에야 금욕과 당위로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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