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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마음, 자비

by 북드라망 2022. 7. 7.

하나의 마음, 자비

김미솔(남산강학원)

 


내가 불교를 접한 지는 올해로 3년째다. 불교공부 1년차 때는 티베트불교 강의를 가볍게 귓동냥했고, 2년차 때는 『숫타니파타』를 무작정 암송했다. 그리고 올해 3년차에 접어들어서는 『테라가타』로 글을 쓰고 있다. 불교계에서 3살, 아직 햇병아리인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하나는 확실히 알았다. 붓다가 되면 모든 괴로움을 여읜다는 것. 산다는 것이 고되고 결코 쉽지 않았기에 불교공부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나도 붓다의 경지에 도달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삶의 괴로움을 모두 여의고 싶었기 때문이다.


붓다는 어떻게 모든 괴로움을 여의었을까? 핵심은 자비심에 있다. 완벽한 자비의 마음 위에 있을 때 모든 괴로움을 여읠 수 있다고, 불교는 평정에 이르는 원리를 알려준다. 하여 나는 생각했다. ‘붓다가 되면 자비의 마음을 낼 수 있겠구나. 그때 모든 괴로움이 없어지겠구나.’ 나는 하루빨리 붓다가 되어 자비의 마음을 갖게 되길 바랐다. 


당시 내가 생각했던 붓다의 모습은 아무런 고통 없이, 아무런 장애 없이, 인생을 쉽고 편하게 사는 모습이었다. 결국 나는 쉽고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 위에서 붓다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것은 자비가 아닌 자아였다. 나는 아무런 괴로움 없는, 쉽고 편한 삶이라는, ‘붓다’라는 하나의 실체를 만들고 그 위에 자아를 키웠다. ‘붓다’를 내가 도달해야 하는 도착점 삼았다.


‘붓다’라는 실체를 만들고 나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었느냐 하면, ‘자비’가 점점 더 요원해졌다는 것이다. 실체적 사유패턴 속에서는 붓다가 되고 나서야 자비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절대 못하지만 그때 가면 할 수 있다고 나는 계속 생각했다. 결국 지금의 나는 자비를 가질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고 자비의 여정에서 점점 소외되어 갔다. 붓다라는 실체는 자꾸만 지금의 나와 도착점의 나를 분리시켰다. 저자는 이러한 ‘이원화’가 실체의 속성이라고 말했다. 실체는 자꾸만 세상을 둘로 나눈다. 결국 나는 무려 ‘붓다’가 되어 자비로워지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쉽고 편안한 삶’이라는 실체 위에서 붓다를 꿈꿨기에 자비에 가 닿을 수 없었다. 붓다라는 실체는 현실의 나를 소외시키는, ‘그곳에 도달한 나’라는 자아를 낳았고, 이렇게 둘로 나뉘어 그 간극만큼 나는 괴로웠다. 자비심은 점점 더 멀어졌다. 

 


그런데 이번에 『청년 붓다』를 읽으면서 충격적이었던 대목이 하나 있었다. 저자가 티베트불교에 대해서 설명하는 장면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면 붓다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빨리 성불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보리심이다.”


놀랍다! 티베트불교에서는 붓다를 이루고자 하는 이유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란다. 그들은 오직 중생구제를 위해서 붓다-되기의 여정에 오른다. 그리고 그 여정 위에서도 오직 중생구제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또한 그렇게 해서 붓다를 이루면 또 무엇을 하는가? 

 

“모든 중생을 윤회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 고통받는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것. 붓다의 45년간 전법활동이 그 증거다.”  


그렇다. 붓다는 붓다가 되는 그 시작점에서부터 중생구제를 위한 지극한 자비심을 내었고, 그렇게 붓다가 되어서도 하고 싶은 것이 곧 중생구제였다. 나는 『청년 붓다』를 읽으며 깨달았다. 자아가 아닌 자비 위에서는 그 시작과 끝이 다르지 않구나. 분리되지 않는구나. 그러니 둘이 아니구나. 이후에 이루고자 하는 것도 자비요, 지금 여기에서 내는 마음 또한 자비구나. 자비는 지금은 절대 못하지만 붓다가 되고 나서야 낼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내는 마음이었다. 시작과 끝은 둘이 아닌 하나였다. 그런데 사실 이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과 같은, 보살 심은 데 보살이 난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마음을 내지 못하는데 나중이라고 될 리가 없다! 그럼에도 이 당연한 이치가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붓다’라는 도착점이, 그러한 실체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청년 붓다』를 읽고 배웠다. 자비란 둘이 아닌 하나의 마음이라는 것을. 자비심 위에서는 자타가 둘로 나뉘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의 나와 그때 가서 될 나가 나뉘지 않고, 현실의 나와 실체적 나, 즉 자아가 나뉘지 않는다. 이렇듯 간극이 없으니 소외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자타가 둘이 아니니, 그의 마음은 지극히 평정하다. 실체는 자아를 만들어 자꾸만 세계를 이분화 시키지만 지극한 자비의 마음 위에서는 아무것도 나뉘지 않는다. 따라서 붓다는 ‘그때 가서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당장 붓다로 사는 이가 바로 붓다다. 붓다라는 실체가 따로 있지 않다. 자비심 위에 서 있는 한, 그것이 바로 붓다인 것이다.


『청년 붓다』가 들려주는 한 청년의 붓다 되어가는 여정은 정말 감동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자신이 열반에 도달하기만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코 자아실현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중생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평정에 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붓다는 자신의 몸을 지도 삼아 이치를 깨쳐 그 방법을 알려주고자 했다. 그의 몸과 그의 삶 자체가 보시였던 것이다. 그의 마음은 ‘내가 거기에 도달하고 싶어’가 아니라 ‘얘들아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을 알려줄게’였다. 그는 ‘내 괴로움을 끝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끝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삶 자체가 보시가 될 수 있음이 감동적이었다. 오직 자비의 마음으로 가득 찬 붓다의 삶이 감동적이었다. 나도 붓다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또다시 일었다! 단, 이번에는 저자가 조언해주는 바와 같이 자아가 아닌 자비의 마음 위에서 붓다-되기를 실천해보려고 한다. 붓다가 되길 간절히 염원하고 끊임없이 수련해보려고 한다. 지금, 여기에서 자비의 마음을 끊임없이 수련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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