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

늘 푸르렀던 청년靑年, 붓다

by 북드라망 2022. 7. 11.

늘 푸르렀던 청년靑年, 붓다


김경아(고전비평공간 규문)



『청년 붓다』는 붓다의 생애와 가르침을 ‘청년’이라는 화두로 가로지른다. 붓다의 생애는 그의 깨달음의 여정과 분리되지 않는다. 출가·구도·깨달음 그리고 진리를 설하는 과정이 붓다의 삶이고, 그 자체가 깨달음의 여정이다. 그 삶을 통해 이미 깨달은 자 붓다의 가르침을 등불 삼는다면 누구나 붓다처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애로운 붓다의 이미지와 그가 설한 심오한 진리로부터 ‘청년 붓다’의 모습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붓다의 인생 전환기의 구체적인 나이를 보고 새삼 놀랐다

 

“출가할 때의 나이는 스물아홉, 성도成道했을 때의 나이는 서른다섯, 당시로서도 그렇지만 우리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충분히 젊다! 무슨 뜻인가? 붓다의 고뇌와 깨달음은 청년기의 산물이라는 것. 이 사실은 몹시 중요하다. 모든 사상은 그 안에 시대를 뒤흔들 역동적 에너지를 품고 있지만 그렇다고 다 청년기의 산물은 아니다. 공자의 사상은 중년 이후에 무르익었고, 노자는 태어날 때 이미 노인이었다지 않은가. 그에 비해, 붓다의 가르침은 청년의 파토스가 아니고선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그가 던진 질문이 그렇다. 세상이 왜 이토록 부조리한가? 혹은 천하를 어떻게 평정할 것인가? 등의 사회정치적 질문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것인가? 라니! 이 질문은 2,600년이 지난 지금도 인류의 보편적이고도 심오한 과제다. 조금도 퇴색하지 않은 살아 숨쉬는 미션이다. 문명이 이토록 고도화된 지금도 사람들은 노·병·사를 감당하지 못한다. ...중략... 그저 숙명으로 받아들일 뿐.”(『청년 붓다』, 15~16쪽)


정말 젊어도 한창 젊었을 때 출가했고 성도했다니! 그런 청년 붓다가 품은 질문 자체는 의외로 심플하다. 심플하다고 질문이 가볍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떻게 하면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것인가?” 태어난 이상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는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질문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 중생들은 괴로움이 어디서 오는지 묻지도 않고 그저 숙명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그런데 붓다는 그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런 질문을 품었을까? 사실 자신을 뒤돌아보아도 한창 피가 끓어오르는 바로 그때 한번쯤은 떠올렸던 질문이 아닌가? 아직 세속에 발 담그기 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는 경계의 시기. 나는 누구인가? 세계는 어떻게 돌아가는가? 등등. 이 본질적인 질문을 놓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힘도 청년의 열정과 활력이기에 가능하다. 그 질문을 끈질기게 붙잡느냐 그저 스치는 바람처럼 흘려보내느냐 그 작은 차이가 붓다와 중생을 가르는 큰 차이가 된다. 인류 최고의 지성인 붓다의 깨달음도 ‘청년의 파토스’가 아니면 불가능했다는 것! 그래서 청년 붓다의 가르침은 오묘하고 깊음에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활활발발한 청년들과 번개와 피뢰침마냥 강하게 접속될 수 있다.

 

사회는 청년에게 말한다. 너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하라고. 청년들은 답한다.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고. 원하는 건 치맥과 쇼핑, 맛집 등 오직 감각적 욕망뿐이라고. 부모들은 청년들에게 말한다. 꿈을 가져라~ 꿈은 이루어진다! 청년들은 답한다. 꼭 꿈이 있어야 하나? 꿈을 이루면 정말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나? (『청년 붓다』, 7~8쪽)

 

청년(靑年), 푸른 나이. 새싹이 돋는 봄처럼 생명력의 최고조이며 머물지 않는 바람처럼 끊임없이 요동치며 한 방향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목(木)의 기운이 넘치는 상태이다. 꼬맹이들은 빨리 청춘이 오기를 동동거리며 고대하고 이미 지나간 이들은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는 인생의 정점! 그러나 막상 지금 인생의 봄을 지나고 있는 당사자인 청년들은 어떨까? 드디어 눈치 보지 않고 마음대로 연애도 하고 밤새 술도 마시고 돈도 벌고 그 돈을 마음대로 쓸 수도 있게 되었다. 드디어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분명 하고 싶었던 것을 하는데 즐겁지 않다. 순간은 즐거운 것 같은데 그 즐거움이 한 시간, 길게는 하루 또는 며칠을 못 간다. 그래서 다시 먹방, 술, 게임, 유흥의 반복 그래도 더 커지는 허탈감. 남들이 그렇게 부러워 마지않는 청춘이 이렇게 괴로울 줄이야. 막상 청춘인 그들은 괴롭고, 청춘이 아닌 이들은 그 청춘을 부러워한다. 더 문제는 그 청춘의 터널을 지나간 이들도 그들의 괴로움에 대해서 선뜻 나눌 이야기가 없다 것. 그냥 세월이 자기를 비켜갔을 뿐, 무상無常 그것이 괴로움이라며 뭔가 깨달은 듯^^ 우스갯소리로 넘어 가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붓다의 질문을 매번 비켜가곤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를 진리를 향해 쉬임없이 나아가는 존재로 규정했다. 한 종교의 교조가 아니라 구도자, 스승이자 도반으로. 하여 그는 깨달음에 도달했을 때도 청년이었고, 이후 여래와 세존으로 불린 중년에도, 나아가 죽음 앞에서도 청년이었다. 그의 사상 또한 그렇게 늘 푸르렀다. (『청년 붓다』, 18쪽)

 

저자는 공부공동체에서 만난 청년들이 붓다의 ‘오묘한 비젼과 세밀한 터치’에 거리낌 없이 감응하는 모습이 신선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그 모습을 보면서 ‘영적 내비게이션’ 없이 무기력증에 빠져 헤매는 우리 시대 청년들에게 인류 최고, 최상의 스승을 소개하고 싶었다고. 그런데 ‘청년’은 단지 생물학적 나이 기준이 아니다. 질문을 놓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깨달음을 몸소 드러내 보여준 붓다는 ‘죽음 앞에서도 청년’이었다. 그렇다면 붓다와 같은 질문을 들고 헤매더라도 쉬임 없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떼고 있는 이들은 모두 청년이 아닐까? “왜 청년 붓다인가? 붓다는 청년이다. 청년은 붓다를 좋아한다!” 붓다와의 접속이야말로 생노병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늘 푸르게 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아닐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