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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

청년 붓다와 함께 나를 찾아서

by 북드라망 2022. 7. 5.
얼마 전 출간된 고전평론가 고미숙 선생님의 『청년 붓다』를 읽고, 여러 공동체에서 서평을 써주셨습니다. 여섯 편의 서평을 통해 어떤 질문을 가지고 어떻게 『청년 붓다』와 만나게 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답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청년 붓다와 함께 나를 찾아서

조혜영(인문공간 세종)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는 문구에 혹하던 때가 있었다. 어딘가로 여행하고 싶은 욕망을 투영한 것이기도 했지만 ‘나를 찾다’라는 문장에는 오랫동안 내가 열망해 온 무엇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쓸모 있는 일을 해야만 하는 시대를 살면서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잘 하는가’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 것은 아직 나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왜 이렇게 나에 집착하게 된 것일까? 이십 대 청년일 때부터 시작된 질문은 오십 대 중년이 되어도 그칠 줄을 모른다. 노년이 되어도 여전히 나를 찾아 헤매고 있을 나에게 고미숙 선생님의 『청년 붓다』는 죽음 앞에서도 청년이었던 붓다의 생애를 통해 그 해답을 제시한다.


우리 대부분은 ‘나’ 또는 ‘자아’가 있다고 믿으면서도 자아가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한다. 자신이 가진 재산이나 직위를 자아라 여기기도 하고 사회적 역할이나 과거의 경험을 자아라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남보다 더 많이 갖기 위해 노력하고 다양한 스펙을 쌓느라 몸이 괴롭다. 그것들이 자신을 규정한다고 생각해 끌어안고 있지만 언제든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도 있어서 마음은 불안하다. 그런 불안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아’라고 붓다는 말한다. ‘무아’란 자아가 없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 어떻게 마음의 평온을 얻게 된다는 것인지 함께 『청년 붓다』 속으로 들어가 보자.

처음에 『청년 붓다』는 불교에 관한 선입견들을 하나하나 풀어준다. 예를 들면 불교가 허무주의라거나 노년에 적합한 종교라는 편견이다. 특히 나에게는 불교가 신이나 교주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불교에 입문하는 것은 절에 모셔진 부처님을 신처럼 섬기는 것이 아니고 붓다를 스승으로 모시고 열심히 배운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보통 스승으로 모신다면 나이 지긋한 어른을 떠올리는데 왜 하필 청년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한 것일까? 『청년 붓다』는 스물아홉 나이에 출가하여 서른다섯에 깨달음에 도달하고 80세에 열반에 들 때까지도 붓다가 청년이었다고 말한다. 제자들에게 “용맹정진하라”는 유언을 남김으로써 머무르지 않고 진리로 나아가는 스승이자 도반으로 남고자 한 붓다를 청년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또 붓다의 고뇌와 깨달음은 청년이었기에 가능하다고 말한다. 붓다를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는 일에는 고도의 집중력과 같은 청년의 에너지가 필요하며 열반에 이르는 길을 실천함에도 청년의 역동성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럼 청년만 붓다의 제자가 될 수 있고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일까?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면 익숙했던 ‘마음의 방향과 일상의 배치’를 바꾸어야 하며 그것이 중년이나 노년에게도 역동성을 만들어 주고 청춘을 회복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노년의 종교라는 편견을 버리고 불교의 진리에 한 걸음 다가간다면 누구나 청년 붓다와 함께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로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붓다는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하는 근원적 질문을 통해 ‘스스로 깨어난 자’가 되었다. 삶을 괴롭게 하는 무명으로부터 깨어났고 열반을 성취했다. 여기서 무명은 인간의 탐진치 삼독 즉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켜켜이 쌓인 무지의 덩어리다. 『청년 붓다』는 ‘나를 채우기 위한 탐욕, 그 탐욕이 채워지지 않을 때 오는 타자에 대한 분노,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어리석음, 이것이 무명의 구체적 내용’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무명 속에서 탐진치 삼독이 실체화된 것이 자아다. 


『청년 붓다』는 붓다의 ‘무아’ 설법을 통해 자아가 만들어진 허상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은 무명 속에서 탐진치를 ‘내 것’ 즉 ‘자아’라 여기고 그것을 지키려 집착한다. 자아라는 것이 고유한 영속성을 지닌 무엇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욕망이 만들어낸 망상일 뿐이다. 이 망상을 해체하면 ‘무아’가 된다. 나의 원형, 순수한 나, 나의 근원을 찾아 헤매지만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 붓다의 깨달음이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으면 욕망할 필요가 없고 괴로움도 사라진다. 자아가 없다면 괴로움도 없다!


자아가 소멸되는 ‘무아’는 텅 빈 허무일까? 무아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공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나와 타자의 경계가 사라지면 그 마음은 타자와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청년 붓다』는 무아를 통해 ‘욕망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에서 어떻게 타자와 연결될 것인가로 변화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설명한다. 자아가 소멸되면 거기에 타자를 향한 무한한 공감의 파동이 일어나는 데 이것이 자비다. 무아를 실천하면 자비가 따라온다. 

이렇게 붓다는 우리가 찾으려고 애쓰는 자아를 내면의 탐욕이 만든 집착과 허상이라고, 자아라는 허상을 버리고 나에게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무명을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친다. 열반은 생을 얽어매고 있는 모든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반복하지 않는 절대적 자유다. 더구나 열반은 죽어야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생에서도 성취할 수 있다고 하니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키로 삼을 만하다. 마지막으로 『청년 붓다』는 삶의 불안과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기 위해 좋은 벗과 함께 마음을 수행하라는 붓다의 가르침을 친절하고 재미있게 전한다. 


제자들을 위하는 붓다의 따뜻한 마음을 읽고 나니 당장이라도 ‘무아’를 실천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동한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게 쉽다면 누구나 열반에 도달했거나 붓다의 가르침이 마법일 것이다. 습관처럼 몇십 년간 자아를 찾아 헤맸으니 붓다의 가르침 한번으로 무명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다시 탐진치에 휘둘리게 될 것이고 그때 필요한 것이 붓다를 좋은 벗으로 삼아 함께 가는 길이다. 자아에 집착하려는 마음이 들 때마다 붓다의 ‘무아’를 떠올린다면 살면서 열반에 이르는 날이 당겨질지 모른다. 혹시 그게 안 되더라도 마음을 수행하면 다음 생에는 하늘에 태어난다고 하니 저자의 말대로 남는 장사다. 이제부터 나를 찾고 싶을 때는 『청년 붓다』와 함께 마음속으로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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