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하이데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 글은 문탁네트워크에서 진행 중인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읽기> 세미나를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존재와 시간』을 읽기 전에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박찬국, 그린비)를 읽고, 하이데거의 사상을 개괄하는 형식입니다. 본문의 쪽수는 모두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의 본문 페이지입니다. 


하이데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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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길의 사상가’라는 제목에 관해 생각해 보자. ‘들길’을 본 적은 있는가? 본 적은 있지만, 언제 보았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들길’은 ‘세계 전체가 가장 분명하게 경험되는 장소이고 세계 전체를 파악하려는 철학이 행해지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234쪽). 또한 그곳은 ‘단순 소박한 것’이고 ‘머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들길’의 이미지와 극적으로 대조되는 것이 있다면, 매일 볼 수밖에 없는, 복잡하고 머무를 수 없는 ‘차도’가 아닐까. 말하자면, 하이데거가 다루려고 하는 것은 근대 이래로 인류가 잃어버리거나 망각한 어떤 것이다. 우리는 ‘들길’을 잃어버렸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사유는 모종의 ‘회복’을 바라고 있는 듯 보인다. 1930년 이래로 그의 사유는 커다란 ‘전회’를 겪지만(154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자 하는 이러한 모티프는 그의 사유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유지된다. 그의 초기 주저로 꼽히는 『존재와 시간』 역시, 철학사에서 망각된, ‘존재자’에 관한 물음들에 묻히고만,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철학사적 배경


하이데거는 19세기 말(1889년)에 태어나 20세기 중후반(1976년)까지 활동한 철학자다. 그러니까 그는 20세기의 시작을 알린 철학자인 셈이다. ‘20세기 철학자’를 특징짓는 속성 두 가지가 그에게도 있다. 첫째는 그가 사유하는 내내 유럽이 ‘전쟁’의 영향 속에 있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의 활동 무대가 ‘대학’이라는 점이다. ‘전쟁’은 1914년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과 1939년에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을 말한다. 이 두 전쟁이 인류사에 끼친 영향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사태는 ‘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이 전쟁들이야말로 이른바 ‘탈근대’ 사유의 배양접시였기 때문이다. 주체와 타자를 철저하게 구분하는 이성주의는 (극단적으로 말해) 홀로코스트를 낳았고, 그로부터 발달한 근대 과학기술은 더 강력한 포탄을 더 멀리 더 정확하게 날려 보내는데 동원되었다. 다시 말해 한 세계가 끝장나버린 셈이다. ‘철학’은 그러한 사태에 대한 반성을 요구 받았다. 따라서 이성주의적 ‘주체’를 극복하는 ‘실존’, ‘계산적인 사유’(231쪽) 대신 ‘고려와 염려’(77쪽)를 제시하는 하이데거의 사유도 같은 동기를 갖는 셈이다. 그렇게, 하이데거는 ‘탈근대’ 사유의 선구가 된다.


두 번째 그가 활동한 곳은 대개 ‘대학’이었다. 18세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철학자가 ‘교수’인 경우는 드물었지만, 근대 교육의 체계가 완성되면서 ‘철학’의 주무대는 대학이 되었다. 그의 전집의 상당부분이 ‘강의록’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읽을 『존재와 시간』은 ‘강의록’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대학 체제’ 안에서 생산된 저작이다. 하이데거는 1917년부터 후설의 조교로 일하게 되는데, 『존재와 시간』은 그 후설이 발행하던 잡지 <철학과 현상학 연보>의 별책부록으로 발간되었다. 이후 그는 단숨에 철학계의 총아로 떠오르게 된다. 이를테면 『존재와 시간』 안에서 하이데거는 당대의 주요한 담론이었던 현상학(후설), 해석학(딜타이), (이른바) 생철학(또는 실존주의)(니체)을 종합해 냈다. 말하자면, ‘근대 철학’을 넘어서려고 했던 여러 흐름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모아낸 셈이었다.
 
칸트가 17세기의 사유들(합리주의, 경험주의)을 종합해냄으로써 18세기의 문을 연 철학자가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이데거는 칸트 이래의 사유들을 종합하여 20세기의 문을 열었던 것이다.
 


사유가 향하는 곳

 

“이 시대에 ‘우리가 존재한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회사에 나가 열심히 일하고 그 일의 대가로 얻은 돈으로 연명을 하고 더 여유가 있으면 오락과 게임을 즐기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이 경우 우리는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물론 우리는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점에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적인 삶에서는 사실상 존재는 빠져나가 있으며 공허밖에 남지 않았다고 우리는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존재하되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생존하고는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존재는 ‘빠져 달아나 있다’.” (60쪽)   

모든 사유는 특정한 ‘맥락’을 갖는다. 그런데 그와 같은 맥락은 대개 사유 이후에 덧붙여진 것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사유하는 자 자신도 그와 같은 맥락을 의식한 채 사유를 전개해 갈 수 있다. 앞서 말한 ‘대학’에서 이루어진 사유라면 특히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적史的’ 맥락만이 ‘사유’를 주조하는 것은 아니다. ‘사유’에는 사유하는 자, 자신이 가진 개별적인 배경 또한 존재한다. 이를테면 광학과 유대교라는 배경은 스피노자로 하여금 『신학정치론』과 『에티카』를 쓰게끔 이끌었고, 경건주의 기독교라는 배경은 칸트로 하여금 『실천이성비판』의 사유를 가능케 하였다. 그의 고향 메스키르히의 소박한 삶과 사실상 그의 작업실이었던 토트나우베르크의 오두막과 같은 목가적 환경은 하이데거를 사유를 일정하게 방향짓는 역할을 한다. 그와 같은 배경이 없었다면 근대 기술문명과 도시적 생활양식에 대한 비판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어떤 사유를 사유자의 배경으로 몽땅 환원하여 해석하는 것은 늘 합당한 일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여러 환원적 해석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유용함이 있다. 특히 하이데거와 같이 사유의 배경(들길, 고향의 상실)과 목표(들길, 고향으로의 복귀)가 겹쳐지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어쨌든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의 문제를 다룬다. 그것은 철학사적으로는 망각된 물음이고, 하이데거의 동기에 따르자면 ‘진정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이와 같은 물음은 여전히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소비한다는 것이고, 그러한 삶을 지탱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닦달’(167쪽)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한 생활양식 속에서 우리는 늘 ‘눈앞의 존재자’(154쪽)에만 몰두한다. 그렇게 ‘진정한 의미의 존재는 빠져 달아나 있다’.


하이데거가 던지는 ‘진정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이 물음 속에는 종래의 서양 형이상학, 현대 기술문명, 역사성을 상실한 주체(세인)와의 ‘대결’이 함축되어 있는 셈이다. 물론 전기와 후기의 사유에 일정한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사유의 동기를 모티프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그의 사유는, ‘존재’에 관하여 물음을 던짐으로써 ‘근대인’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환기시키고, 되살려내는 쪽으로 방향지워져 있다.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

 

『존재와 시간』은 원래 2부 구성으로 기획되었으나 미완성인 상태로 남게 되었다. 우리가 보게 될 텍스트는 1부 2편까지만 쓰여 졌다. 쓰여지지 않은 2부는 ‘존재 시간성의 문제를 실마리로 한 존재론 역사의 현상학적 해체의 개요’( 소광희,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강의, 문예출판사, 24쪽)라는 제목으로 쓰여질 예정이었다. 이 책이 미완성인 상태로 남게 된 원인은 이른 시간 내에 작성하여 출간해야 했던 하이데거의 경력상의 사정이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와 시간』이 이후 철학에 미치는 영향은 결정적이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하고자 했던 작업은,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근대 이후 잃어버린 ‘보편성’을, ‘신’을 끌어들이지 않고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는 ‘철학’의 고유한 영역을 재정립하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19, 20세기에 이르러 철학의 존재의의에 대한 심각한 회의가 일어난다. ‘자연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었던 자연에 대한 탐구는 과학의 영역이 된지 오래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의견을 조정하고 행동규범을 수립하는 문제는 정치학과 사회학의 영역이 되었다. 인간의 의식과 인식에 관련된 문제 역시 심리학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전통적으로 철학의 분과학문으로 여겨졌던 존재론, 윤리학, 인식론이 모두 개별학문으로 분화된 결과였다. 이 때 철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당대의 철학은 이 문제에 답해야 했다. 하이데거가 ‘존재자’와 ‘존재’를 구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분화된 분과학문이 다루는 것은 ‘존재자’에 관한 것이고, 철학은 인간의 실존과 결부된 ‘존재’ 그 자체를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와 시간』은 바로 그렇게, ‘존재론’을 어떻게 재정립할 것인가 라는 당대 철학에 제기된 물음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잃어버린 ‘보편성’을 철학 안에서 재정립하는 문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존재와 시간』은 이른바 ‘현대 철학’이라 불리는 20세기 철학의 시발점이 된 저작이다. 이 작품 이후로 ‘철학’은 (존재자를) ‘근거지우는 학문’이라는 의미를 재정립하게 된다. 더불어 이때부터 영미철학과 대륙철학은 이름만 비슷할 뿐 아예 다른 학문이 된다.
 
 
하이데거 사유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


앞서 본 바와 같이 하이데거의 사유는 여전히 작동할만한 여력이 남아 있다. 그의 사유가 소비지향적이고 자연에 대한 배려가 결여된 ‘현대적 삶’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구 가열에 따른 ‘기후 위기’로 특징지어지는 오늘날의 세계를 다시 돌아볼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사유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에는 여전히 무리가 있다. 이를테면 ‘고향’, ‘대지’, ‘소박한 농부의 삶’ 등으로 대표되는 특유의 회귀적 성질과 ‘역사 운명’, ‘죽음을 선구하는 결단’과 같은 반동성 때문이다. 나는 그의 사유에 깃든 그러한 특유의 성질들이 그를 나치 활동에 참여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하이데거 사유에 내재한 그러한 요소들이 오늘날의 ‘생태주의’의 언어와 놀랍도록 비슷하다는 점이다.
 
긍정적인 점과 부정적인 점이 분명하면서 양자의 간극이 클수록 사유는 ‘문제적’이 된다. ‘길’은 어쩌면 그 간극 사이에 있을지도 모른다. 간극이 넓을수록 더 다양한 길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하이데거를 지금 읽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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