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의 기동성과 개념의 유동성, 『손자병법』(8)
- 『손자병법』의 주석가들
『손자』 주석서를 십일가주(十一家注)라고 말하는 데 십일가(十一家)는 열한 명의 주석가들을 말한다. 『손자』 주석의 역사는 길어서 열한 명은 시대별로 나눌 수 있다. 열한 명의 프로필을 간단히 작성해 보자.
1) 조조(曹操): 삼국시대 위(魏)나라 무제(武帝).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주인공 바로 그 조조다. 뛰어난 시인이자 정치가, 군사전략가이면서 인재를 보는 안목이 남달랐던 대단한 인물이다. 소설 속에 오도된 이미지로 판단해서는 곤란하다. 자신 뛰어난 무장으로 용병에 능해 이론과 실전을 겸비한 사람으로 『손자』 주석에 이만한 적임자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현재 읽는 『손자병법』은 조조의 손을 거쳐 정리된 책이다. 조조는 『손자』를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주석까지 붙여 읽기 편하도록 도와준 공이 크다. 다만 주석이 간략한 편이라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조조가 『손자』를 주석한 책이 『손자약해』(孫子略解)다. 원본은 상실되고 십일가주 안에 그의 글이 남았다. 조조는 병법에 일가를 이룬 사람이라 당시까지 전해지던 병서(兵書)를 정리하고 자신이 깨우친 바를 책으로 자신만의 저서로 남겼는데 후대에 『조공신서』(曹公新書)로 알려졌다. 이 책 역시 전해지지 않는데 송나라의 장예張預가 『손자병법』의 「작전편」(作戰篇)을 주석하면서 “曹公新書云”이라며 인용한 부분이 남아 있어 일부나마 볼 수 있다. 조조의 주석은 손자의 주석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졌다. 조조가 남긴 서문이 있어 참고가 된다.
“내 듣건대, 먼 옛날(『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활과 화살[弧矢]’의 이로움이 있었고 『논어』(論語)에 ‘군비가 충분해야 한다[足兵]’고 했으며 『상서』(尙書)에 ‘여덟가지 정책’[八政] 가운데 ‘군사’[師]를 말했으며 주역에도 ‘군사는 올바르게 되어야 하니 훌륭하고 강한 사람이 군사를 훈련해야 길하다’[師貞, 丈人吉]라 했으며 『시경』(詩經)에 ‘왕이 분노하여 군대를 이끌고 정벌하셨네’[王赫斯怒, 爰征其旅]라 했고 황제(黃帝), 탕(湯) 임금, 무왕(武王)이 모두 군사를 써서 세상을 구하였다. 『사마법』(司馬法)에, ‘어떤 사람이 고의로 다른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는 죽여도 된다. 무력[武]을 믿는 사람은 멸망할 것이며 문화[文]를 믿는 자는 사라질 것이다’라고 했는데 (춘추시대 오[吳]나라 왕) 부차(夫差, 무력을 믿다 멸망한 경우), 서(徐)나라 언왕(偃王, 문화를 믿다 사라진)이 이들이다. 성인(聖人)의 용병은 군사를 거두어 들였다가 때에 알맞게 움직였으니 어찌할 수 없어 사용한 것이다.
내가 병서(兵書)와 전쟁의 계책을 많이 보았는데 손자가 저술한 것이 심오했다. 계책을 심사숙고하고 움직임이 신중하며 기획이 명확하고 구도가 깊어 속일 수가 없었다. 다만 세상 사람들이 가르침을 깊이 깨우치지 못한데다 글이 번거로울 정도로 많아 세상에 유통되는 책은 그 핵심요지를 잃었다. 그러므로 따로 엮어 『약해』(略解)라 하였다.”[操聞:上古有“弧矢”之利, 論語曰“足兵”, 尙書“八政”曰“師”, 易曰“師貞, 丈人吉”, 詩曰“王赫斯怒, 爰征其旅”, 黃帝湯武咸用干戚以濟世也. 司馬法曰“人故殺人, 殺之可也. 恃武者滅, 恃文者亡.” 夫差偃王是也. 聖人之用兵, 戢而時動, 不得已而用之. 吾觀兵書戰策多矣, 孫武所著深矣, 審計重擧, 明劃深圖, 不可相誣. 而但世人未之深亮訓說, 況文煩富, 行於世者失其旨要, 故撰爲略解焉.]
간결하게 잘 쓴 서문이다. 잘 쓴 이유는 이러하다. 첫째 옛글의 격식을 잘 지켰다. 책의 중요성을 유구한 전통을 끌어와 근거를 댔다. 역사적 선례를 동원해 논지를 보관했다. 용병이 긴요한 일임을 저절로 드러나 독자가 설득되도록 하는 방법이다. 『손자』가 왜 뛰어난 책인지 설명했다. 앞에서 빼어난 책들을 열거해 자신의 지식을 보였으니 『손자』에 대한 논평은 신뢰가 간다. 거기에 자신이 느끼는 문제점을 밝혔으니 자신의 저술의도와 목적이 뚜렷해진다. 글의 흐름이 유려하다. 둘째 짧은 글 안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남김없이 다 했다. 간결하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법이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글자 하나 낭비하지 않았다. 허투루 쓴 말이 없다는 건 대상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뜻이니 멋을 내는 수식이나 미문(美文)에 대한 강박이 없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150자가 채 안되는 짧은 글 안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글쓴이의 성격까지 엿보게 했으니 훌륭한 글이다. 조조의 주석을 읽을, 기대하고 신뢰하는 근거가 된다.
2) 맹씨孟氏: 생애며 이름이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기록에 남조(南朝) 양인(梁人)이라고만 보인다. 문화가 번성했던 양나라 사람으로, 이른 시기에 손자 주석서 『해고』(解詁)를 썼다고만 되어 있다. 간략한 주석이다.
이상 두 사람은 당나라 이전에 주석을 단 사람들이다. 길을 개척해 방향을 제시한 조조의 공로가 으뜸이고 간결한 주석도 최고라 할 수 있다.
3) 이전(李筌): 당나라 개원(開元)·천보(天寶) 연간 사람이란 기록이 보인다. 당나라 전성기 때 사람으로 도교(道敎) 연구가 깊어 그에 대한 저술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역사에서 얻은 관점에서 주석을 달았다.
4) 두목(杜牧): 만당(晩唐)을 대표하는 저명한 시인이다. 두보(杜甫)에 견주어 소두(小杜)라 불린다. 역사에 조예가 깊어 역사를 소재로 한 유명한 시를 남겼다. 그런 관점이 『손자병법』 주에도 그대로 드러나 역대 역사를 종횡하는 박식이 잘 드러난다. 주석 자체는 조조의 생각과 다르지 않으나 전사(戰史)로 증명하는 방식에서 예기치 않은 혜안이 드러나기도 한다. 성취도 크고 후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주(注)로 단행본(13권)으로 유통되었다.
두목이 쓴 「주손자서」(注孫子序)에는 문인의 결기가 잘 드러난다. “어느 시대 어떤 사람이 두 길로 나누어 문(文)이니 무(武)니 하면서 분리되어 평행으로 가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이 때문에 벼슬하는 선비들은 감히 군사문제를 말하지 않게 되거나 말하는 걸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군사를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세상에서는 거칠고 난폭한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 사람들은 동료로 끼워주지 않았다. 아아 근본을 잃은 것이 가장 심한 경우라 하겠다....내가 스무살이 되어 비로소 『상서』(尙書)·『모시』(毛詩)·『좌전』(左傳)·『국어』(國語)··『13대 사서(史書)』를 읽으면서 한 나라를 세우고 한 나라를 멸망시키는 일이 처음부터 군사[兵]와 관계되지 않은 게 없다는 걸 알았다. 군사를 주관하는 사람이 성현이나 재능 있는 사람, 아는 게 많고 박식한 사람일 경우 반드시 한 나라를 세웠고 건장한 모습에 칼을 쓸 줄만 알지 배우지 못한 사람은 반드시 나라를 망하게 했다. 그런 후에야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군사가 가장 중요하며 현명한 경대부가 아니라면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음을 진실로 알았다.”[復不知自何代何人分爲二道, 曰文曰武, 離而俱行. 因使搢紳之士不敢言兵, 或耻言之;苟有言者, 世以爲粗暴異人, 人不比數. 嗚呼, 亡失根本, 斯最爲甚....及年二十, 始讀尙書·毛詩·左傳·國語·十三代史書, 見其樹立其國, 滅亡其國, 未始不由兵也. 主兵者, 聖賢材能多聞·博識之士, 則必樹立其國也;壯健擊刺·不學之徒, 則必敗亡其國也. 然後信知爲國家者, 兵最爲大, 非賢卿大夫, 不可堪任其事.]
두목은 문무(文武)의 분리를 문제 삼으면서 지식과 결부시킨다. 두목의 태도는 주지주의(主知主義)라고 할 수 있지만 역사가 역대왕조의 거울이었다는 유가의 전통을 상기하면 지식인의 일반적인 태도라 하겠다. 그러나 문사(文士)의 관점이라 실전감각이 부족해 실수한 부분이 눈에 띄는데 이를 공격한 사람이 진호다.
5) 진호(陳皥): 만당 사람으로 행적이 자세하지 않다. 송나라의 유명한 문인이자 학자인 구양수는 「손자후서」(孫子後序)를 썼는데 자신의 친구이자 당시 최고의 시인이었던 매요신이 쓴 『손자주』에 붙인 글이다. 그 글을 시작하며, “세상에 전하는 13편은 대부분 조공, 두목, 진호의 주를 쓰는데 삼가(三家)라고 부른다 … 진호는 가장 뒤에 나온 사람으로 그의 설명은 왕왕 두목의 단점을 공격했다.”[世所傳孫子十三篇, 多用曹公, 杜牧, 陳皥注, 號三家…皥最後, 其說時時攻牧之短.]라고 했다.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의 관점에서 이전시대를 돌아보며 쓴 글이니 당시의 정황을 잘 알려준다 하겠다. 하물며 구양수는 『신당서』(新唐書)를 쓴 사람이니 누가 당나라의 역사를 그보다 더 정통할까. 진호의 주가 확실히 두목의 단점을 보충하긴 했으나 두목에 비해 성취가 크지 않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6) 가림(賈林): 덕종(德宗) 때 사람으로 가은림(賈隱林)으로도 불린다. 절도사 이포진(李抱眞)의 문객으로 알려졌는데 실전에도 관여했던 경력이 보인다. 간략한 주를 썼다.
7) 두우(杜佑): 두목의 조부다. 두목이 공부가 깊었던 것은 집안 내력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바로 두우의 존재 때문이다.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알려진 『통전』(通典)의 저자로 불후의 이름을 남긴 두우를 통상적인 주석가로 분류하긴 힘들다. 두우는 따로 손자주를 지은 게 아니라 『통전』의 병부(兵部)를 작성하면서 『손자』를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두우의 주라고 한 것은 실상 『통전』의 문장을 말한다. 송나라에서 『무경칠서』(武經七書)로 정리하면서 『손자십가주』(孫子十家注)라고 했다. 여기에 두우의 글이 들어가 십일가주(十一家注)가 완성된 것이다. 송대 판본을 두고 십가주라 하기도 하고 십일가주라 하기도 하는데 둘은 같은 의미다. 우선 『통전의 성격 때문에 다른 호칭이 생겼다. 둘째로 송나라 판본에는 송나라 정우현이란 사람이 쓴 「십가주손자유설병서」(十家注孫子遺說幷序)가 부록으로 실려 있는데 주석에 실리지 못한 몇몇 설명을 붙인 글로, 제목에 쓴 십가주라는 말 때문에 십가니 십일가니 혼동이 생겼던 것이다. 현재는 대체로 십일가주로 통용된다.
이상 네 사람이 당나라 때 주석가들이다. 두목이 가장 유명하지만 두우의 주석이 가치가 높다.
8) 매요신(梅堯臣): 송나라를 대표하는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구양수의 친구이기도 한데 문인이 쓴 주라는 점에서 두목과 통하는 점이 있다. 매요신이 쓴 주석 단행본은 남아 있지 않고 십일가주에 실린 것을 볼 수 있다.
구양수는 「손자후서」(孫子後序)에 매요신의 견해를 잘 담았다. “나중의 학자들은 그 책(『손자병법』)을 보기만 하거나 또 각자 자기 견해에 견강부회해서 이 때문에 주석을 붙인 사람들이 많기는 하나 합당한 견해는 적다. 내 친구 성유(매요신의 자[字])만은 그렇지 않은데 그가 손무의 책을 논평한 적이 있다. ‘이 책은 전국시대 서로 경쟁하던 시기의 견해다. 하은주 삼대 훌륭한 왕들의 군사(軍師)나 『사마법』의 ‘아홉 가지 죄를 정벌하는 법’에 손무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문장이 간결하고 의미가 깊으며, 병사를 이끌고 용병하며 적을 헤아려 승리의 기틀을 만드는 것에도 모두 법도가 있으며, 그 언어가 매우 질서정연한 것을 아낀다. 그러나 주석을 붙인 사람들이 손무의 글을 혼란스럽게 해 그 뜻을 잃기도 하였다. 이에 내가 주석을 붙였다....’”[後之學者, 徒見其書, 又各牽於己見, 是以注者雖多, 而少當也. 獨吾友聖兪不然, 嘗評武之書曰:‘此戰國相傾之說也, 三代王者之師, 司馬九伐之法, 武不及也. 然亦愛其文略而意深, 其行師用兵·料敵制勝亦皆有法, 其言甚有次序. 而注者汨之, 或失其意. 乃自爲注...’] 손자의 책이 삼대의 왕사(王師)나 『사마법』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에 무게를 둘 필요는 없다. 전통의 원천이 되는 책에 어떻게 『손자』를 견주겠는가. 어떤 글도 『논어』에 비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매요신이 『손자』를 아끼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문장이 간결하고 의미가 깊다는 것[文略而意深], 둘째 용병 등에도 법도가 있다는 점[行師用兵·料敵制勝亦皆有法], 셋째 언어에 매우 질서정연하다는 사실[言甚有次序]. 첫 번째 장점은 매요신이 문인으로서의 안목을 드러내 손자의 문장력을 칭찬한 것이다. 둘째는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짜임새를 갖추고 체계적으로 진술했다는 의미로, 세 번째 아끼는 이유와 맞물린다. 셋째는 글쓰기 방식에서 접근한 것으로, 전쟁을 계획하는 기본토대에서 실행하고 특수전에 도달하기까지 전체가 논리적으로 구성됐다는 말이다. 손자의 저술을 꿰뚫어 본 수준 높은 안목이다. 구양수가 칭찬한 말은 빈소리가 아니었다. 매요신의 언어는 구양수의 예리하면서 기품 있는 글과 잘 어울린다. 언어의 달인답게 매요신의 주는 간결하고 핵심을 찌른다. 뒷날 주희(朱熹)는 구양수가 매요신을 칭찬한 글을 두고 약간의 수정을 가한다. 주석을 보면 두목의 주가 더 좋다고. 두목의 주가 더 유명한 게 사실이다. 두목과 매요신 둘 다 최고의 시인이라 명성에 걸맞게 그들의 손자주도 오래 명성을 유지했다.
9) 왕석(王晳): 인종(仁宗) 때 사람으로 알려졌는데 자세한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10) 하씨(何氏): 하연석(何延錫)으로 알려졌다. 주석이 많지는 않으나 종종 역사에서 가져온 긴 주석을 붙였다.
11) 장예(張預): 남송 때 사람이다. 가장 후대의 사람으로 십일가주의 막내다. 그의 주석은 명쾌해서 조조의 간결한 주석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전사(戰史)에 대한 풍부한 지식도 그의 주석이 가진 장점이다. 송나라 때 주석으로 매요신의 주가 가장 유명한데 그에 필적하는 좋은 주석이다.
이상 네 사람이 송나라 때 주석가들이다. 매요신이 돋보이지만 장예의 주는 새로운 발견이다.
십일가주를 총괄하면 조조와 두우의 주를 가장 높이 평가한다. 후대의 주석은 대부분 조조가 제시한 길을 넓히고 수정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읽는 재미로 보자면 두목의 주가 으뜸이지만.
글_최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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