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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열의 자기만의 고전 읽기

『손자병법』- 구체성에서 개념화로(2) _ 유동하는 개념

by 북드라망 2022. 3. 11.

군사의 기동성과 개념의 유동성, 『손자병법』(11) _ 
구체성에서 개념화로(2) _ 유동하는 개념 


전쟁과 ‘개념의 유동성’
주석가들 절(節)에서, “삼군의 많은 군대가 반드시 적의 공격을 받게 되더라도 패하지 않는 것은 기정(奇正), 이것 때문이다”[三軍之衆, 可使必受敵而無敗者, 奇正是也./勢篇]라는 글에 장예는 이렇게 설명했다. 기정은 “서로 변하며 순환한다”[相變循環]. 장예의 정의는 기정을 정확히 포착했다. 비유를 거론할 때 형세를 설명하며 환기했던 말이다. 형세는 상보적이어서 배치되는 개념으로 혹은 실체로 고정된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기정도 마찬가지다. 장예가 서로 변하며 순환한다고 한 것은 손자가 쓰는 모든 개념이 고정된 실체로 각자 자기 의미망 안에서 거처한다는 뜻이 아님을 지적한 것이다. 손자는 전쟁이라는 우연과 예측불허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기 때문에 준비가 철저하다 해도 갑자기 닥치는 상황에 따라 역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개념을 생각했고 그게 효율적임을 입증했다. 그 현실대응성을 ‘개념의 유동성’이라 불렀다.


개념의 유동성을 손자가 창안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손자』에게서 읽은 것이 개념의 유동성이란 뜻이다. 유동성이란 개념은 유용하다. 의미문자의 성격이 강한 한자의 특징에서 진화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현실과 고투하면서 얻은 개념이라 소중하다. 추측컨대 후대의 사상과 개념을 논할 때 개념의 유동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이념적인 글을 읽을 때 미로에서 헤매기 십상이다. 유동성은 현실과 상관된다는 공시적인 의미이기도 하지만 통시성을 띠기 때문에 역사적 맥락을 반드시 감안해야 한다. 후대에 갈수록 더욱 그러하다. 손자의 공적은 개념의 유동성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구체화한 것에 있다. 후대에 끼친 영향력 역시 컸다.  

 


‘형세’라는 개념
주요 개념을 살펴보자. 형세라는 말은 원래 지리개념에서 쓰는 말이다. 이 말은 지리를 이용해 싸우는 군대의 진형과 결합해 기세를 설명하는 말로 전용된다. 형과 세는 고정된 말이 아님은 비유에서 설명했으므로 다른 쓰임을 보자. 


형(形)은 형명(形名=刑名)이란 말로 널리 알려졌다. 형명은 한비자가 사용한 주요개념으로 통치자가 신하를 다스리는 핵심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비자는 이전에 쓰였던 형명이란 개념을 심화시키고 정밀하게 다듬어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지만 손자가 최초 사용자이고 그가 사용한 형세의 개념과 관련이 깊다. 형명은 고대의 논리학자들, 명가名家와도 이어진다. 명가의 중요한 공헌은 명사(개념, 名)와 대상(지시 대상, 形) 사이에 일치관계를 의심하면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전제를 회의해 지시하는 말과 지시되는 대상 사이의 관계를 재검토하도록 했다는 데 있다. 이들의 영향은 커서 장자莊子도 깊은 이해를 보여주며(「천하天下편」) 순자(荀子)도 곳곳에서 비판적으로 언급하다(예컨대 「비십이자」(非十二子)편에서 묵적(墨翟)과 송견(宋銒), 신도(愼倒)와 전변(田騈)을 비판하는데 전자는 논리학자로서, 후자는 법가로서 비판의 초점이 놓이지만 두 부류는 모두 언어와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형명과 분리되지 않는다.) 「정명」(正名) 편에서 정면으로 다룬다. 『장자』 「천도」(天道) 편에, “옛글에 ‘형이 있고 명이 있다’라고 했는데 형명이란 것은 옛사람에게도 있었지만 통치의 우선으로 삼았던 것은 아니다”[書曰:‘有形有名’, 形名者, 古人有之, 而非所以先也]라는 글이 보인다. 이때 쓰인 형명은 한비자가 쓴 말과 비슷해서 실제[形]가 있고 그에 맞는 명칭[名]이 있으면 형명(=명실名實)이 일치하도록 해 어긋나는 부분이 있는지 비교해 따져보고 신하가 자신의 실질에 걸맞게 임무를 시행했는가를 결정해 그 결과에 따라 상벌을 내린다는 의미로 쓰였다. 통치술로 변한 말이지만 손자가 썼던 의미, 눈에 보이고 실제로 알수 있는 대상이라는 함의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는 명가에서도 마찬가지다. 한비자는 이런 선례를 모두 종합해 정교하게 다듬었던 것이다. 


세(勢)도 형(形)과 다르지 않다. 세도 한비자가 강화시킨 개념으로 「난세難勢편」을 따로 독립시켜, 세(勢)를 두고 논란을 벌이며[難] 자신의 개념으로 만드는 과정을 예리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한비자의 세는 법(法)이나 형명, 상벌과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개념으로 세 자체만을 문제로 삼았던 신도(愼倒)의 세계에서 더 진전된 사고였다. 한비자 역시 세를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고 법가에서 특화한 주요개념과 유동성 있게 결합시킨 점이 중요하다.(이 부분은 한비자를 다루는 글에서 자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이렇듯 손자가 중요하게 다른 개념은 후대 제자백가 사이로 스며들어 변하고 확장된다. 

 

 


‘기정’이라는 개념
세(勢)는 기정(奇正)과도 이어진다. 기(奇)는 의외성으로 정의할 수 있다. 기는 상대방의 심리적 요인까지 감안해 행동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역동적인 움직임이자 적이 절대 알 수 없는 의외성이기 때문에 기의 응용과 개념활용은 넓다.

 

  “전쟁의 형세는 기와 정에 지나지 않지만 기정의 변화는 끝까지 알 수 없다. 기와 정이 상생하는 것은 마치 순환에 끝이 없는 것과 같으니 누가 다할 수 있겠는가.”[戰勢不過奇正, 奇正之變, 不可勝窮也. 奇正相生, 如循環之無端, 孰能窮之./勢篇]

 

기와 정. 간단해 보이는 말이다. 손자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기와 정이 순환 변화하는 것은 끝이 없어서 그 누구도 다 응용하거나 사용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전투에서 벌어지는 의외성을 누가 다 통제하고 완벽하게 실행할 수 있겠는가. 상황에 맞게 기와 정을 써야 한다. 정은 어느 순간 기가 되며 한 상황에 맞았던 기가 다른 상황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정도 마찬가지다. 정으로 일관해서도, 한결같이 기만 써도 안 된다. 기는 기발함을 위주로 하기에 쓰임새가 높아 사람들이 선호하지만 (게릴라전을 생각해 보라) 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기는 무용지물이다. 노자 『도덕경』(道德經)에도, “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기로 군사를 부린다”[以正治國, 以奇用兵/57장]라고 했으니 기정의 개념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인데 정을 치국에, 기를 군사에 적용시킨 점이 눈길을 끈다. 군사부문에서는 기가 주요 토픽이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기정은 고정된 개념쌍이 아니다. 노자 역시 기정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썼다. 어느 대상에 어느 것이 위주인지를 말한 것이다. 정이 기본이긴 하나 기로 응용되지 않으면 정은 정체되어 활동성을 잃어버린다. 기와 정은 설명을 위해 잠시 붙잡아본 명칭일 뿐 끝없이 유동한다. 


인용한 손자의 글만 보면 추상도가 높아 이해하기 어려워 보이지만 손자는 이 문장 앞에 오색(五色)과 오미(五味)를 예로 들었기 때문에 본문 전체를 읽으면 추상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손자는 글쓰기조차 추상성과 구체성이 유동하는 것 같다. 묘한 글쓰기 기술이다.

 

 “어지러움은 잘 다스림에서 생기고 겁은 용감함에서 생기며 약함은 강함에서 생긴다. 어지러움과 다스림은 수(數)이며 용감함과 겁은 세이며 강함과 약함은 형(形)이다. 그러므로 적을 잘 움직이는 자는 형을 보여주면 적이 반드시 따르며, 좋은 곳을 주면 적이 반드시 갖는다....그러므로 전쟁을 잘하는 사람은 세에서 이기기를 구하지 사람에게서 구하지 않는다. 때문에 사람을 버리고 세에 맡긴다.”[亂生於治, 怯生於勇, 弱生於彊. 治亂. 數也. 勇怯, 勢也. 强弱, 形也. 故善動敵者, 形之, 敵必從之; 予之, 敵必取之....故善戰者, 求之於勢, 不責於人, 故能擇(=釋)人而任勢./勢篇]

 
수(數)라고 한 것은 분수(分數)를 말하는 것으로 군대의 조직과 편제를 말한다. 군대의 조직체계와 운용에 따라 치란(治亂)이 생긴다는 말이다. 용감함과 겁은 인위적인 세에 따라 결정된다는 말이며 강약의 문제는 형(形)의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거론한 치란(治亂)·용겁(勇怯)·강약(强弱) 역시 고정된 모습이 아니라 유동적임을 알 수 있는데 수나 형, 혹은 세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손자는 세의 유동성을 강조했다. 노자 『도덕경』에, “(상대를) 약하게 하고 싶으면 반드시 강하게 해주어라. 없애 버리고 싶으면 반드시 흥하게 해주어라. 빼앗고 싶으면 반드시 주어라”[將欲弱之, 必固强之, 將欲廢之, 必固興之, 將欲奪之, 必固與之./36장]라고 했다. 노자는 강약·흥폐·여탈이라는 상반되는 말을 역설적으로 썼는데 이 역시 두 상반되는 개념이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유동적이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었다. 노자의 의미 저변에는 세勢의 변화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싶다.

 

“전쟁에서 승리한 방법은 다시 쓸 수 없으니 형에 대응하는 것이 무궁해야 한다.”[其戰勝不復, 而應形於無窮./虛實篇]


이 구절에 대한 여러 주 가운데 세 사람의 주가 의미를 잘 설명했다. 조조는, “같은 것을 되풀이 해서 움직이지 않고 상황에 맞게 대응하는 것이다”[不重復動而應之也.]라고 했다. 이전은, “이전에 썼던 계책을 다시 써서 승리를 얻지 않고 합당한 것에 따라 변화를 만드는 것이다”[不復前謀以取勝, 隨宜制變也.]라 했고, 장예는, “승리한 다음에는 이전에 썼던 계책은 다시 쓰지 않는다. 다만 적의 형태에 따라 대응해 기발함을 내놓는 것이 무궁하다”[已勝之後, 不復更用前謀, 但隨敵之形而應之, 出奇無窮也.]라고 했다. 대동소이한 해설이지만 공통점은 반드시 상대를 염두에 두고 그에 맞게 움직이라는 것으로, 고정된 실체로 여겨 그에 따르는 방법을 쓴다는 말이 아니다. 유동성이 핵심이다. 

 


『전쟁과 평화』, ‘정’과 ‘기’의 엎치락뒤치락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 보자. 기정 혹은 허실이란 개념으로 톨스토이의 걸작 『전쟁과 평화』를 다뤄볼 수 있을 것이다. 톨스토이의 이 거대한 작품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입을 주요 테마로 다룬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측 상대자는 쿠트조프(Kutuzov)라는 노장(老將). 나폴레옹을 상대하는 그의 전술이 흥미롭다. 나폴레옹은 역사상 유명한 인물이기에 더 보탤 것은 없다. 전사(戰史)에서 보더라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천재이기에 유럽전쟁을 이전의 역사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만들었다. 나폴레옹이 천재인 까닭은 전쟁을 혁신한 공로에 있다. 나폴레옹 때까지의 전투가 주로 중요한 지점을 두고 상대방과 대치해 포격을 가하고 피해를 입힌 다음 주요 병력을 투입하는 형태였다. 정규군 중심의 방식[正]. 나폴레옹 스타일은 전혀 달랐다.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 그는 기마병을 최대한 활용해 기동전의 중요성을 극대화했다. 속전속결형태. 병참이 문제가 되는데 현지조달형으로 해결했다. 전례 없는 방식이었다. 개념화하자면 이렇다. 이전의 군사운용 방식이 정(正)을 고정된 형태로 두고 그에 따라 움직였다면 나폴레옹은 기발함[奇]으로 응전했던 것. 나폴레옹의 전략은 적수가 없었다. 완전히 낯선 전쟁방식이었고 파죽지세 그 자체였다. 1805년 나폴레옹의 오스트리아 점령전. 오스트리아 군 수뇌부는 사령부에 모여 전략을 짜면서 나폴레옹을 패배시키고 사로잡는 계획을 작성한다. 서류상으론 완벽했다. 그때는 이미 오스트리아의 맥 장군(General Mack)이 전군(全軍)을 이끌고 나폴레옹에게 항복했는데도 말이다. 나폴레옹이 사용하는 기(奇)전술은 아무도 당해낼 수 없었다. 러시아를 상대하기 전까지는. 놀라운 것은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상대하면서 그의 전매특허 전술이 오히려 정(正)으로 변했다는 것. 유럽대륙에서 정(正)들을 상대할 때는 기(奇) 자체였던 것이 러시아로 들어오면서 정으로 변했다. 나폴레옹은 그걸 인식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러시아 군대는 정(正)이었던가. 정이라는 말을 쓰기가 무색할 만큼 러시아 군대는 후진적이어서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는 게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헌데 쿠투조브(Kutuzov) 장군은 이 오합지졸을 이용해 기(奇)가 되는 전법을 펼친다. 러시아의 광대한 지형을 이용한 것. 나폴레옹의 러시아 전쟁은 지형이 필수였다. 최초의 대규모 접전이 벌어진 보로디노(Borodino) 공방전은 애초에 계획했던 지점으로 양군이 집결하지 못하고 다른 자리에 진영을 치게 된다. 지형 미숙. 지도가 지형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형이 지도를 만드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유럽전선과는 다르게 정규전을 펼친다. 겉보기에 프랑스군의 승리다. 눈에 보이는 것을 묘사하는 데 관한 한 톨스토이의 오른쪽에 나설 작가는 없을 것이다. 전투의 전체 조망과 개별 고지의 전투양상을 총체와 구체로 묘사하는 톨스토이의 필력은 명불허전. (그의 대[大]장편에는 독자들이 잊을 수 없는 불멸의 묘사들이 반드시 나오는데 대표적인 것이 『전쟁과 평화』의 여우사냥 장면, 무도회 장면, 『안나 까레니나』(Anna Karenina)의 경마장면, 레브(Lev)의 풀 베는 장면 등등 문학사에서 손꼽히는 명장면들이 수두룩한데.... 여기서 테마는 그게 아니니 자제하는 게 좋겠다.) 나폴레옹의 정(正)이 승리했다. 이게 이후 전쟁의 족쇄가 된다. 러시아군은 무너지지 않았고 나폴레옹은 정(正)을 고집한다. 기(奇)를 쓸래야 쓸 수도 없었다. 광대한 지역에서 기동전은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여러 나라가 다닥다닥 붙은 유럽대륙과 러시아는 비교할 수 없었던 것. 근대전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현대전이라고 다를까. 2차대전 때 막강한 독일군은 러시아에서 패배한다. 지형의 영향이 컸다. 다른 말로 하면 나폴레옹은 실(實) 그 자체로 러시아에 육박해 들어왔는데 쿠투조브는 허(虛)로 받았고 이 허(虛)는 나폴레옹을 집어삼킨다. 기정과 허실이 맞물리고 변화하면서 순환하고 뒤집히는 광경은 손자(孫子)식으로 『전쟁과 평화』를 읽는 재미라 하겠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퇴각할 때 러시아군은 반격에 나서는데 결정적인 한방을 먹이지 못한다. 어째서인가. 이때는 허가 실로 변하지 못했다. 나폴레옹군 공략에 실패하는 러시아군의 난맥상을 읽노라면 절로 한숨이 나오는데 허가 실로, 실이 허로 변하는 게 쉽게 않다는 걸 실감한다. 나폴레옹이 기에서 정으로 변했다가 다시 기로 기민하게 변하기 어려웠던 경우를 떠오르게 한다. 『손자병법』을 읽고 난 다음 『전쟁과 평화』에서 두 나라의 전쟁을 읽게 되면 나폴레옹이 정(正)이자 실(實), 러시아는 기(奇)이자 허(虛)로 읽을 수밖에 없게 된다. 한편으로는 나폴레옹을 근대로, 러시아를 반(反)근대로 읽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 쉽지 않지만.    

 

 


변증법과 유동성
유동성이란 말로 설명했으나 좀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변증법적 사고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변증법이라 하면 으레 헤겔이나 마르크스를 떠올리고 서양 근대철학의 어떤 아우라를 연상하기 쉽다. 짧은 견해다. 변증법이란 서구에서 발명한 특별한 논리학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사고방식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펼쳐졌던 사유 가운데 하나가 변증법의 방법으로 논리를 구사하는 것이었고 소크라테스가 능숙하게 썼음은 널리 알려졌다. 손자는 적이라는 상대방, 지형이라는 변동하는 조건과 끊임없이 교섭하고 영향을 받으면서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유를 형성하고 발전시켰다. 손자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운데 하나가 관념 속에서 만든 논리가 아니라 현실과 쉼없이 부닥치면서 자기 사유를 벼렸다는 데 있다.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손자는 오나라의 병력을 이끌고 초나라를 공략해 초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다. 이는 손자의 이론이 현실적인 적합성을 지녔음을 역사가 증명한 것이다. 『손자병법』을 두고 두목이 「주손자서」(注孫子序)에서, “손자가 지은 것은 13편으로 손무가 세상을 떠난 뒤 천 년 동안 병사를 거느린 자 가운데 성공한 사람도 있고 실패한 사람도 있다. 그들의 사적을 살펴보면 모두 손무가 지은 책과 하나하나 다 들어맞아 도장틀 안에서  글씨본에 따라 도장을 새기는 것과 같이 하나도 어긋나는 것이 없다”[其孫武所著十三篇, 自武死後凡天歲, 將兵者有成者, 有敗者, 勘其事跡, 皆與武所著書一一相抵當, 猶印圈模刻, 一不差跌]라고 평한 것은 뻔한 찬사로 읽을 수 없다. 두목은 현실적합성을 높이 산 것이다. 


손자의 변증법은 경험변증법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으로 독일 관념론에서 정점에 이른 관념 변증법과는 다른 종류다. 손자의 경험 변증법이 훗날 중국적 사유의 주요한 부분을 이룬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중국사상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손자의 업적 가운데 변증법적 사고를 높이 평가하는데 근거가 충분한 판단이다. 

 

글_최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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