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루쉰, 복수, 통치성, 푸코

루쉰, 복수, 통치성, 푸코

 

 

『안전, 영토, 인구』, 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옮김, 난장, 2011. 


언젠가 술에 취해서 시골 밤길을 미친놈처럼 걸은 적이 있다. 해안도로였는데 파도 소리가 오싹한 데도,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는 이상한 밤이었다. 봄날 유채밭에 서 있는 듯한 향마저 나서, 더 이상한 밤이었다. 이 향 속에 있는 뭔지 모를 묘한 기분에 빠졌다. 


아무리 걸어도 주위 풍경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걸으며 신발이 땅에 닿을 때 나는 발걸음 소리만 줄곧 규칙적이며 똑같은 리듬으로 울렸다. 하지만 걸음걸이의 규칙적인 리듬에 비하면 발걸음 소리는 좀 비정상인 듯도 느껴졌다. 고즈넉한 밤길에다 오싹한 파도 소리와 유채꽃 향, 그리고 반복적인 걸음걸이. 그러나 비정상적인 발걸음 소리. 그때 내 생이 주술에 걸린 것 같다고 여겼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이젠 생각마저 그런 주술처럼 느낄 때가 있다. 무언가 생각할 때면, 아니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느낄 때마다 내가 전혀 볼품없다고 여긴다. 그건 온종일 바다에서 별 결실 없는 낚시를 무한히 하는 느낌이다. 머릿속을 바다라고 여기고, 낚싯대라는 추론을 드리운다. 뭔가 휘저으면 낚싯줄이 생각의 물결에 오르락내리락한다. 어떤 작은 끌어당김을 느끼면 바늘끝을 문 생각-물고기를 들어 올린다. 파닥거리는 생각이 바늘턱까지 삼킨 걸 보고, 조심스레 잡아당겨 끌어올려 본다. 
  

그러나 배 갑판 위에 올려놓으면 파닥거리는 그게 얼마나 작고 볼품없는지. 그런 것들은 바다에 다시 던져넣어 더 자라도록 놔두어야 한다. 하지만 잡히면 다시 놔두는 일은 없다. 낚시통에 던져 놓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낚싯바늘 끝에 떡밥을 끼우고 다시 낚싯대를 던진다. 그러기를 반복하지만, 역시나 이 빈약한 구석에선 볼품없이 작은 것들만 내 떡밥을 물고 올라온다. 낚시통 안에 그 볼품없는 물고기나, 그런 낚시를 하는 나나 뭔가 주술에 걸린 것만 같다. 
  

우리의 삶이 늘 무언가 순간의 주술에 걸린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 세상이 너무 열기 어려운 문으로 잠겨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세상 끝에 가보면 두툼한 보강용 철판이 가로세로로 덧대어 묵직하게 만들어놓은 문이 자물쇠로 채워져 암벽 불상처럼 버티고 있을지도 모른다. 문 위에는 날카로운 못들이 바늘꽂이처럼 박혀 있고, 문지기가 필요 없을 정도로 튼튼하게 지은 문이 언제나 단단히 닫혀 있는 상상.  
  

이건 루쉰의 세상이다. 누구나 루쉰을 읽으면 절대 피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쇠철방에 대한 짧은 이야기. 창문이라곤 없고 절대 부술 수도 없는 쇠로 만든 방. 그 안엔 수많은 사람이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그러다 죽어도 혼수상태에서 죽는 것이니 죽음의 비애 같은 건 느끼지도 못한다. 술 취해 미친놈처럼 걸은 밤길을 기억하거나, 볼품없는 생각만 무한 반복 길어 올릴 때면, 그래서 생각도 나도 끊임없이 볼품없어 보일 때면, 늘 루쉰의 이 쇠철방을 조건반사처럼 떠올린다. 이런 조건반사마저 쇠철방 같기도 하다. 
  

사실 루쉰의 쇠철방은 단 한 번에 이 세상을 넘지 못한다는 절대적 유한성을 분명히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오히려 그래서 희망이나 절망 모두를 헛되게 바라지 않는 아주 담담한 정신을 품게 해준다. 그러니 적막이라는 것도 다르게 이해된다. 적막의 순간이야말로 기존의 쇠철방을 벗어나서 새로운 쇠철방을 맞이하는 순간이니까. 루쉰은 이 적막 속에서, 그러니까 전환의 순간에 소리 높여 외치며 친구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 적막을 어떻게 걸어갈 것인가.
  


푸코, 늘 벽에 부딪히다


『안전, 영토, 인구』는 강의 녹취록이다. 이 강의 녹취록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나는 푸코가 국가이성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고 나서, 강의 끝부분에 뭔가 항의를 하듯 연속적으로 누군가를 향해 격렬히 반문하는 다음 이 장면을 꼽겠다. 

"국가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들, 국가의 역사와 발달을 얘기하는 사람들, 국가의 자부심을 얘기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역사를 통해 어떤 실체를 만들어내고, 국가라고 하는 이것의 존재론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국가라는 것이 일종의 통치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국가라는 것이 통치성의 유형 중 하나일 뿐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층적이고 다양한 절차에 입각해 차츰차츰 형성되어가고, 마찬가지로 차츰차츰 응결되어 특정한 효과를 만들어내는 이 모든 권력관계, 이런 통치의 실천에 입각해 국가가 구축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안전, 영토, 인구』 9강)

 


이런 격한 반문들을 쏟아내고 나서 홉스가 리바이어던이라고 했던 그 이미지를 상기시키듯, 국가가 그런 ‘냉혹한 괴물’ 같은 것은 아닐지 모른다고 뒤튼다. 즉, 국가가 어떤 중력처럼 없애지 못하는 그런 괴물은 아니고, 단지 “통치화된 사회”의 한 유형일 뿐이고, 단지 통치되면서 만들어진 것 중 하나일 뿐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썰물 같은 반문들이 이어지고 나서 강의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국가는 통치의 돌발사건에 불과합니다. 국가의 도구는 통치가 아닙니다. 아무튼 국가는 통치성의 돌발사건입니다." 


어쩌면 국가를 중심으로 사고했던 모든 선배, 후배들에게 반문을 던지는 듯한 장면. 앞서 강의에선 당대 좌파 선후배에게 새로운 혁명가 모델이었던 마키아벨리도 단지 구시대 사람으로 치부했다. 마치 국가를 중심으로, 혹은 국가에 근거하여 사유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격렬하게 항의하는 듯한 말투, 폭포수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반문들, 그리고 푸코의 격정적인 성정과 철학적 지향점이 밑바닥까지 모조리 다 드러나는 것 같은 이 한 장면. 1978년 3월 8일에 쏟아졌던 이 발언들은 『안전, 영토, 인구』 강의가 빠져들어 간 블랙홀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장면이다. 
  

『안전, 영토, 인구』라는 강의는 이상한 강의였다. 전해에 강의를 진행하지 않았던 푸코는 1977~78년에 강의를 재개하여 ‘안전, 영토, 인구’라는 제목으로 국민을 관리하는 안전 테크놀로지에 대해 탐구를 전개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은 나중 그의 커다란 전환을 두고 이 시절을 바라보면 아주 결정적인 변곡점이 시작된 것이기도 했다. 강의 도중에 푸코는 청중에게 올해 강의 제목이 잘못되었다고 고백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고, 실제로 지금 하고 싶은 것은 ‘통치성’의 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사실 푸코는 작업 도중에 방향 자체를 바꾸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다. 『지식의 고고학』 서문에서도 “위험을 무릅쓴 채 뛰어들고, 말을 바꾸고, 지하통로를 열어젖히고, 더 깊숙이 들어가, 이 여정 자체를 요약하고 변형시키는 돌출부를 찾아내곤”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 『성의 역사』 2권 서문에서도 “위험? 그것은 내가 예고했던 출판계획을 지연시키고 뒤엎는 것이었다”라고 하면서 『성의 역사』의 계획 자체를 완전히 바꾸고 다른 지대로 달아나 버린다. 그는 자신의 입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언제나 입장 바꾸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안전, 영토, 인구』 강의에서는 심지어 강의 도중에 이 변화가 일어난 것이었다. 3강 중반까지도 푸코는 안전장치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3강 끝에 인구에 관해 이야기하고, ‘통치’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4강에서 푸코는 마키아벨리를 끄집어내더니, 기어코 통치성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강의 주제를 ‘통치성의 역사’라고 정정하고 본격적으로 통치성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한다. 
  

벽에 부딪히는 방법이랄까, 푸코에게는 그런 게 있다. 언젠가 유럽 어딘가에 갔는데, 조그만 광장이 있고, 그것을 겹겹이 에워싸듯 벽돌로 지은 작은 건물이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져 있었다. 그 안에서 길을 잃었는데, 벽돌들은 이렇다 할 특징도, 표시도 없다. 문들은 모두 닫혀 있고, 사람도 보이지 않아서, 마치 내가 무덤 안으로 들어온 거 아닐까 오싹해질 정도였다. 정처 없이 조그만 광장을 돌다가 내 몸 하나 지나갈 만한 틈이 보이길래, 그 틈으로 끼어들어 가야 할지 어떨지 망설이다가, 그래도 좀 무리를 해서 부딪혀 들어가 보려고 해보았다. 그랬더니 그 옆에 조그만 문이 보이는 게 아닌가. 틈으로 손을 뻗어 오래된 놋쇠 손잡이를 잡고 살며시 돌리자, 문은 소리 없이 바깥으로 열렸다. 더 큰 길이 나오고, 지형이 완전히 달라지는 신기한 경험이 펼쳐졌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막히면 부딪힐 줄이라도 알아야 하는 거구나. 어떤 벽에 다다르면 부딪힐 줄 알아야 그 벽을 통과하는구나. 푸코는 언제나 부딪힐 줄 아는 사람이었다. 늘 벽에 다가가서 그 벽에 부딪혀 보는 사람. 부딪혀 난 상처로 벽을 타 넘는 자, 그가 푸코였다. 

 


국가계보학과 통치성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인간 사회는 세 가지 메커니즘으로 대응한다. 법률 메커니즘, 규율 메커니즘, 그리고 안전 메커니즘. 이 세 가지를 안전 테크놀로지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을 전염병의 사례로 하나씩 대응시켜볼 수 있다. 먼저 중세의 나병 환자. 나병에 걸린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구분되고 도시에서 추방된다. 법적 조치를 가하는 것이다. 이게 법률 메커니즘. 깔끔하게 공간에서 배제해버리는 방식이다. 
  

 

그런데 페스트인 경우는 다르다. 이제 도시와 지역은 철저하게 감시를 받는 상태에 처한다. 접촉이 금지되고, 사람들이 언제 집에서 나오고 들어가는지, 무얼 먹는지 등등 모든 것이 철저히 통제된다. 이게 규율 메커니즘. 안에 있게 하되, 철저히 감시당하며 격리된다. 
  

마지막으로 천연두 접종에 이르자 완전히 다른 양상이 찾아온다. 이제 몇 명이나 걸렸고, 몇 살에 병에 걸렸는지, 그리고 죽은 사람은 몇 명인지 등등 집단을 숫자로 관리하면서 연구되고 분석된다. 이 경우에는 배제도 격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로지 통계적 숫자에 의해 움직임을 포착하고 순간순간 대응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게 안전 메커니즘. 더군다나 이제는 아예 병에 걸리게 한다. 천연두라는 비정상을 정상화시키기 위해서 예방접종을 하는데, 아주 기이한 형태의 대응이 발명된다. 천연두 접종은 천연두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약한 천연두에 걸리게 하는 것이다. 작은 병으로 죽을 정도로 큰 병을 막는다. 병에 걸리게 하여 병을 막는다는 희한한 방법이 생겨난 것이다. 
  

이렇게 상대를 자연성(naturalité)으로 파악하는 것은 대응하는 방식도 완전히 바꾼다. 사법기술은 배제하고 금지한다. 규율기술은 세부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정한다. 그러나 안전장치는 대상의 자연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대상의 움직임을 일단 인정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대로 놔둔다. “사람들을 방임하고, 사건을 일어나는 대로 맡겨두며, 사건을 내버려 둔다는 것, 하게 내버려 두고 일어나도록 내버려둬라는 자유주의 유희는 본질적·기본적으로 현실이 그 자체의 법칙, 원리, 메커니즘에 따라 발전하고 굴러가고 그 자체의 경로를 밟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세 가지 테크놀로지가 각각 시대에 맞추어져서, 시대마다 하나의 테크놀로지가 작동하고, 그게 끝나면 다른 테크놀로지가 오는 식은 아니다. 지금 시대에는 사법과 규율과 안전은 함께 작동한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접하고 있는 코로나 시대라는 게 바로 그것을 가장 극명하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매일 확진자 수와 사망률 통계치가 다양한 형식으로 전달되고, 어떤 기준에 충족되지 않거나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으면 격리되도록 하며, 방역의 관점에서 어떤 특정 국가의 국민은 입국이 불허되는 배제가 실행된다. 법률, 규율, 안전 테크놀로지가 혼합되어 한꺼번에 작동한다. 즉, 주권, 규율, 안전이 한꺼번에 작동하는 공간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이르자 푸코는 이상한 벽을 만난다. 대상을 자연성으로 상대하면서, 그러니까 사건을 내버려 두는 방식으로 관리하는 안전 테크놀로지 위에서 인구를 대상으로 하는 ‘경제적 통치’를 말이다. 원래 통치라는 것은 공적인 권위 혹은 주권의 행사였다. 그런데 푸코는 18세기 권력 테크놀로지를 분석하면서 ‘통치’를 점점 ‘경제적 통치’로 의미 변환을 시키고, 마침내 인구관리에 특유한 기술을 가리키는 특별한 의미로 바꾸어간다. 즉, 통치란 경제의 형식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기술이다. 이제 통치술은 ‘안전-영토-인구’에서 ‘안전-인구-통치’로 바뀐다. 여기서 그는 국가보다 훨씬 큰 벽, 통치성을 만난다. 아니, 더 넓은 광장에 이른다. 
  

이 개념으로 완전히 새로운 영역이 열린다. 근대 국가의 계보학. 이 새로운 영역의 놀라운 점은 지금까지와 달리 국가 영역이 미시권력의 분석영역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안전 테크놀로지 하에서 주권자는 영토만을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사회적 종이자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인간과 그 환경을 자연성으로 대하여 관장하는 자이다. 국가는 이 통치성 안에서 돌발적으로 발생한 여러 가지 중 하나일 뿐인 거다. 푸코는 국가라는 작은 광장에 둘러싸인 벽을 돌파하여 통치성이라는 큰 광장으로 나온 것이었다. 

 


신(新)복수론, 욕망을 지우다


통치성(gouvernementalité)은 ‘통치적’(gouvernemental)에서 파생한 단어다. 권력 관계의 전략적 영역 혹은 통치 활동의 특수한 성격을 지칭한다. 국가에게 통치성이란 정신의학에서의 격리기술, 형벌체계에서의 규율기술, 의학 제도에서의 생명관리정치와 같은 것이다. 즉, 통치성이 정의하고 있는 것은 근대 국가의 형성을 하부에서 지탱하는 통치기술이다. 국가 이전에 통치성이 존재한다. 
  

그런데 푸코는 어느 순간 이것을 국가의 통치적 실천 양식을 넘어서서, “인간들의 품행을 인도하는 방식”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국가 문제 안에서 작동하는 용어였지만, 이제 권력 관계 일반에 대한 분석 격자로서, 인간들의 품행을 이끄는 기술이나 절차라고 하는 넓은 의미로 이해된다. 국가의 통치일뿐 아니라, 아동의 통치, 영혼이나 양심의 통치, 집, 국가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자신의 통치라는 의미로 넓어진 것이다.
  

이건 좀 기묘한 우회다. 이를테면 국가라는 작은 벽을 만나자, 통치성이란 큰 벽을 보여주고, 국가는 그저 여러 언덕에 불과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니까. 더군다나, 이 언덕들에는 국가라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아동, 양심, 영혼, 집, 심지어 자기 자신이라는 언덕까지 마구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언덕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순간 못 넘을 것 같은 벽이 걸어 올라갈 만한 언덕들로 바뀌고, 심지어 우회하여 갈 다른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자칫 간과하기 쉬운 요소인데, 낯선 여행을 하려면 반드시 좋은 지도를 준비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장소여도 좋은 지도가 없으면 좋은 여행이 될 리가 없다. 푸코는 완전히 다른 지도를 마련하면서 여행의 지평 자체를 바꾸어 버린 것이다.  
  

 

17세기 군주의 군림이 통치로 대체되면서 근대적인 의미에서 비로소 정치가 시작된다. 17세기 중상주의에게 인구는 주권자의 의지에 복종해야만 하는 온순한 의지들의 집합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인구는 자연적인 절차들의 집합이다. 인구는 다양한 변수에 의존하는 소여이다. 혼인, 상속, 양육, 식량 사정 같은 자연적 현상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자연성을 지닌다. 다시 말하면 그저 내버려 둬야 잘 굴러가는 대상이다. 그렇게 내버려 두기 때문에 상대를 추적하고 서로 전략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이제 기묘하게도 모든 것이 정치가 되어 버린다. 
  

푸코는 정치적인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다고 갈파한다. 즉, 모든 것은 정치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따로 정치적인 것이 있지는 않다는 뜻이다. 모든 것이 정치화가 가능하다는 것. 통치성이란 넒은 과장에서 정치란 단지 통치성에 대한 저항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광인, 아동, 감옥, 가족, 경제, 그리고 자기 자신이 모두 정치의 장이 되고, 그것은 통치성에 저항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된다. 나에겐 나의 통치성에 저항하는 정치가 있다. 
  

루쉰의 잡문 중에서 「복수」라는 글이 있다. 두 페이지 남짓 되는 아주 짧은 글. 두 사람이 발가벗은 채 비수를 들고 마주 섰다. 행인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어 살육을 감상하려고 한다. 앞으로 있을 생생한 살육과 피맛이 너무 기대된다. 
  

그런데 글쎄, 무대 위에 마주 선 두 사람은 서로 보듬지도 죽이지도 않는다. 그뿐이랴, 보듬을 생각도 죽일 생각도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 둘은 그렇게 한없이 서 있다. 그러자 화끈한 살육과 피 맛을 기대했던 행인들이 무료함을 느꼈다. 그 무료함이 심장에서 털구멍을 뚫고 나와 광야를 가득 메운 채 기어가서 다른 사람들 털구멍을 파고드는 듯하였다. 행인들은 흥미를 잃고 서서히 흩어졌다. 광야에 남은 두 사람. 그들은 죽은 사람 같은 눈빛으로, 행인들의 메마름을 감상한다. 피가 없는 대살육. 광야의 두 사람이 행인에게 복수한 것이었다. 
  

침묵의 복수. 행인의 욕망, 즉 장치를 구성한 욕망의 회로 자체를 닫아버려서 장치를 무너뜨리는 방식. 루쉰의 복수 이야기는 또 있다. 「검을 벼린 이야기」. 언제나 적은 내가 무너지지 않고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복수는 ‘나’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복수의 역설이다. 
  

이 소설은 그 싸움 뒤를 매우 감동적으로 그려 넣는다. 미간척의 복수가 끝나자 솥 안에는 미간척과 검은빛의 사나이, 그리고 왕의 머리가 물 밑으로 같이 가라앉아 있다. 세 개의 두개골을 들어 올리자 왕비가 묻는다. “우리 상감마마는 머리가 하나뿐인데 어느 것이 우리 상감마마의 것이오?” 왕이 왕으로서 식별되지 않는 것이다. 복수하는 자, 미간척조차 무너졌기 때문에 미간척과 왕은 구분되지 않는다. 복수한 자와 복수 당한 자가 뒤섞여 한 덩이가 되어 버린 상태. 루쉰은 복수 이후에도 승리라는 통념적인 쾌감을 지워버린다. 
  

장치를 구성한 욕망의 회로를 닫으면, 그 회로 속에서 움직이던 기존의 나도 무너진다. 푸코가 국가를 넘고, 통치성에 다다른 것은 루쉰의 저 복수를 닮았다. 장치와 싸우지 않고 장치를 구성하는 욕망의 회로를 찾는 방식, 그리고 그와 함께 기존의 나도 무너뜨리는 방식. 『안전, 영토, 인구』 강의는 바로 푸코의 마지막 복수가 예비되는 서장이다. 
 

때로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우리는 모두 그전에 다른 공간, 다른 시간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다가 여기 온 것은 아닐까 하고. 어쩌다 그 다른 삶을 잊고 여기 와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어쩐지 쇠철방이 여러 개가 있고, 그 쇠철방의 풍경도 아주 여러 개가 있는 것이니, 살아볼 만하다고 여기게 되기도 한다. 

 

글_약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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