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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선생의 헤테로토피아

[헤테로토피아] 마네, 푸코를 정치화하는 동행자

by 북드라망 2021. 11. 19.

마네, 푸코를 정치화하는 동행자

미셸 푸코 외 지음, 『마네의 회화』, 마리본 세종 엮음, 오트르망 옮김, 그린비, 2016



마네, 회화를 낯설게 만들다

프랑스에서 철학과 지적 문제는 언제나 정치적 상황과 함께 맞물리며 돌아갔다. 푸코도 1950년 공산당원이 되었다. 그러나 학교 다니는 동안 푸코는 아무런 정치적 참여를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한 해 만에 공산당을 탈당하는데, 그 이후 모든 사람이 그는 반공주의자였다고 말했다. 자신이 몸담은 클레르몽페랑 대학에 들뢰즈를 교수로 추천했다가, 로제 가로디라는 공산당 이론가에게 자리를 넘겨주게 되자, 그를 야유와 저주로 못살게 굴어 내쫓기도 한다. 이 말이 맞든 틀리든, 그는 한동안 공산주의자에 대해서 그다지 우호적이진 않았던 것 같다. 공전의 히트를 한 『말과 사물』이 나오고, 그 책이 사르트르 진영의 대대적인 공세에 직면하기도 한다.

그러나 『말과 사물』이 나온 1966년부터 1969년까지 푸코는 정치적 격변의 삶을 산다. 66년 잠시 몸담고 있던 튀니스 대학에 학생 소요가 시작되었다. 67년 6월 사태는 더욱 악화하여 아주 격렬한 반유대주의 데모로 발전한다. 68년이 되자 튀니지 정부는 강력한 조치로 학생들을 억압하며 감옥에 가두었다. 이때 푸코는 몸을 피신한 학생들을 도와주고 자기 집에 숨겨 주었다. 집 정원에 등사기를 숨겨놓고 유인물을 찍도록 하기도 하고, 제자들을 위해 법정에 나가 증언도 한다. 사복경찰 감시를 받거나, 길에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튀니지에서 2년 반은 제3세계의 실상, 그리고 그곳에서의 투쟁상황을 알게 된 계기였다.

어떤 실질적인 투쟁에는 쓸데없는 궤변이나 다변 또는 총체성 같은 거대 이론이 필요한 게 아니다. 구체적이고 분명하고 단일한 정치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이런 생활을 거쳐 68년 말 프랑스로 돌아와 들어간 벵센대학에서 그는 더욱 급진적으로 변했다. 그의 인생에서 이 기간은 정말 파란만장했던 시기였다. 불안정한 정세와 함께 푸코의 정신도 현재 속에서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고 중첩되었다. 『말과 사물』의 푸코는 정치적 격변을 체험하면서, 『지식의 고고학』과 『감시와 처벌』의 중간지대를 지나고 있었다.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

그런데 이 과정을 거치는 한 복판에서 푸코를 사로잡은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담론들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그 풍경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풍경들이 어떻게 생성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어야 했다. 그때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 흥미롭게도 바로 ‘회화’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튀니지에서 정치적인 것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탐구가 지식과 권력의 관계로 향하고, 동시에 그림들을 분석하면서 담론에 개입하는 비담론적 실천으로 관심이 이행하게 되는데, 이것이 전적으로 푸코를 급진적으로 이끌었다는 점이다. 에리봉은 68년 이후 바뀐 푸코의 극좌적 입장을 종교적 개종이라고 표현한다. 튀니지의 학생들이 푸코의 의식화를 이끌었고, 푸코는 그 의식화와 더불어 사유가 정치적 전회를 이루는데, 그 한복판에 이정표처럼 마네가 있었다. 1975년 푸코는 “저를 매료하고 제 마음을 완전히 끄는 것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마네입니다”라고 말한다. 나무를 깎는 목수는 깎여진 나무가 고택 일부가 되어 그 집 사람들의 운명을 깎고 또 깎아낼 것을 예감한다. 마치 목수가 깎아내린 나무가 고택에 박히듯, 마네는 푸코의 철학적 사유에 사랑니처럼 깊숙이 박혀 있다.

이것은 1966년부터 1973년에 걸쳐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던 것으로서, 마네 분석의 관점에서 한마디로 정리해보면 그것은 ‘재현의 해체’이다. 다음 푸코의 말을 들어보자.

“마네가 한 일은 말하자면 그림에 재현된 바 안에서 서구 회화의 전통이 그때까지 숨기고 피해 가려 했던 캔버스의 속성·특질·한계가 다시 튀어나오게 한 것이었습니다. 사각형의 표면, 커다란 수평축과 수직축, 캔버스를 비추는 실제 조명, 감상자가 그림을 이 방향 저 방향에서 바라볼 가능성, 이 모든 것이 마네의 그림에 현존하며, 마네는 자신의 그림들 안에 이것들을 다시 부여하고 재현했습니다. 그리고 마네는 오브제로서의 그림(tableau-objet), 물질성으로서의 그림, 외부의 빛을 받고 감상자가 그 앞에 서거나 주변을 돌게 될 채색된 사물로서의 그림을 재발명합니다.”(『마네의 회화』 「미셸 푸코·마네의 회화」 25~26페이지)

오페라 극장의 가면 무도회

물론 마네는 재현 그 자체를 없애지는 못한다. 그는 여전히 재현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마네는 재현을 약간 삐딱하게 만들어 버린다. 먼저 그림 내부에 재현 회화의 물질적 조건들을 폭로해 버린다. 재현 작업을 통해서 재현 자신의 토대를 폭로하는 것. 마치 장르 영화로 장르 영화의 토대들을 드러내고 다른 식으로 해체해버리는 쿠엔틴 타라티노 같은 수법이다. 그림 <오페라 극장의 가면 무도회>의 내부로 들어가 보면, 공간 뒤쪽이 폐쇄되어 있다.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그다지 의미는 없고, 더군다나 벽으로 막혀 있어 공간 자체의 입체감이 상실되어 있다. 심지어 인물들도 검은색의 옷을 입고 있어서 그들도 앞을 막아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좁은 공간에 입체감도 없이 그저 그려져 있다. 뒤쪽 벽 위에 통로가 있고, 사람들이 내려다보는 것을 암시하듯 다리들만 보인다. 그림이 뒤쪽 벽에서 시작되어 앞쪽 검정 인물들로 끝난다. 뒷벽에 붙은 벽지에 사람들이 그려져 있는 느낌이랄까. 다시 말하면 이 장면이 그저 그림일 뿐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깨닫게 한다. 그래, 이것은 그림이었구나. 이런 효과는 <막시밀리아의 처형>에 가면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뒤편의 커다란 벽에 처형자와 병사들이 비현실적으로 가깝게 서 있고, 총을 쏘는 모습이 캔버스의 그림처럼 그려져 있다.

막시밀리아의 처형

이런 공간의 폐쇄성과 수직과 수평의 캔버스를 다시 그림 안으로 그려놓는 것은 왜인가. 그것은 회화에서 재현이란 단지 캔버스의 물질성에 의해서 표현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즉, 재현이 액자에 끼워진 공간에 한 장면으로 주어진다는 것. 재현된 것이 자신이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를 스스로 말하게 한다. 그러나 마네 이전 회화의 재현은 입체감을 높여서 마치 그림이 아닌 듯이, 대상이 진짜 존재하는 듯 묘사한다. 심지어 신의 세계조차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처럼 그려놓는 것이다. 이때의 재현은 실제와 유사한 깊이를 가진 것처럼 착시 효과를 일으키며 존재한다. 그러나 마네는 그 깊이를 없애버리고, 자신이 그리고 있는 그림은 캔버스에 그린 그림일 뿐임을 분명히 한다. “거기에도 입체감을 낳는 모든 공간을 제거하고 소거하고 압축하며, 반대로 수직선과 수평선을 부각시키는 작용이 있습니다.”(『마네의 회화』 「미셸 푸코·마네의 회화」 41페이지)

이건 뭐랄까, 마치 이 그림만 그림인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자체가 그런 그림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라는 감각을 일으키게 하려는 것 같다. 이 세계는 다시 그릴 수 있다는 듯이. 저 그림을 계속 반복적으로 다시 그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마네는 브레히트처럼 그림에 소격효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관객에게 ‘당신은 지금 연극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면서 연극을 진행시키는 브레히트의 소격효과(Verfremdungseffekt)처럼, 마네는 그림에서 “당신은 지금 그림을 보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지적하고 있다. 이로부터 감상자는 그림을 보다 비판적으로, 나아가서 정치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감각을 지니게 한다. 그림은 감상자에게 그림 밖 세계로 나가 이제 세계 자체를 낯설게 보고 비판적이고 정치적으로 대할 것을 요구한다. 마네의 그림은 낯선 연극이다. 그것도 매우 정치적 시야를 갖게 하는 낯선 연극.


회화, 비담론적 실천의 실험체

그러나 그림 안에 캔버스를 그려 넣었다는 것만으로는, 그리고 그것이 브레히트처럼 그림을 정치적으로 만들었다는 주장만으로는 그것이 논리적 서술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만으로 우리는 아직 어디에도 도달하지 않는다. 조금 더 나가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해보자. 요즘은 SNS가 광범위해졌기 때문에 영화나 그림 등 예술작품을 보고 비평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제는 해당 작품을 직접 보기 전에 먼저 비평을 접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는 비평을 확인하러 영화와 그림을 본다는 착각마저 들 때가 있다. 영화와 그림이 자신 밖의 담론으로 장악당했다고 해야 할 정도다. 지적 대화에서 이 그림의 이 장면은 누가 이렇게 평했고, 저 그림의 저 부분은 누가 저렇게 설명해주었다, 따위가 영화나 그림 그 자체로부터 획득한 느낌보다 더 중요해져 버린 것이다.

과연 과거에는 그러하지 않았을까. 단지 SNS가 발달하니까, 이제야 비로소 비평 담론이 넘쳐나기 시작하여 담론들이 예술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이런 담론의 작품에 대한 우위는 꼭 현대적 현상만은 아니다. 과거에는 교회나 궁정에서 생산된 담론들 때문에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이 해석되었다고 해야 한다. 수많은 성서화(聖書畵)는 아예 교회가 지시하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을 임무로 그려진 그림이다. 그때는 교회체제라는 소셜네트워크(Social Network)에서 산출하는 의미가 이미 고정적 비평 담론으로 존재하고, 그 담론이 비담론적 형식인 그림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해야 한다. 결국, 담론이 비담론적 형식인 예술작품을 지배한 것은 오래된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술의 본질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문자 언어로 표현할 수 있었다면 그림이나 음악이란 형식이 왜 있어야 한단 말인가. 작품 그 자체 안에서 직접 작동하는 것, 그 작동 때문에 감상자와 사이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 그것은 결코 담론적으로 개시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마네는 작품을 통해서 예술에 본질적인 것을 작동시키면서 새로운 그림을 그리려 한다. 즉, 마네의 회화와 함께 예술은 자신의 본질로 회귀한다. 오랫동안 지성 중심주의적 비평 담론이 예술이 지닌 본질, 좀 더 욕심을 내어 말해본다면 전복적인 힘을 빼앗아 버렸다. 권력 관계에 포로가 되어 버린 담론들 때문에 예술은 자기 자신의 충만성을 잃고 그저 말의 수단이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마네는 예술을 장악하고 있는 담론의 유령들과 푸닥거리를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가시적인 것들을 담론적인 것으로부터 뜯어내는 게 문제라는 듯, 마네는 담론의 유령들 밖을 그리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 마네는 그림의 배경이 되는 서사를 최소화하고, 감상자에게 의미를 상상하지 않게 만들어 버린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서 등장인물들은 왜 모여 있는 것일까? 저들이 여기 와서 식사하고 물에 발을 담그게 된 데는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그러나 그들은 전혀 의미를 지니지 않고 여기저기 앉아 있을 뿐이다. 이 그림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문화적인 교양이나 배경이 되는 지식체계를 동원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해석해야 할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원래 그림은 의미할 필요가 없었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서 오른쪽 남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장면은 사실은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의미의 마네 그림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담론에 지배되고, 그 담론의 재현에 불과한 그림은 진정한 그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나는 가끔 내가 받은 교육이나 훈련들을 회고한다. 나는 8~90년대에 걸쳐서 학교에 다녔다. 우리 때 학교에서는 무엇이든 의미가 있다고 가르쳤다. 무엇을 하든 의미를 찾아야 할 것처럼 설명해주었다. 이를테면 신설 고등학교여서 일주일 한두 번은 운동장의 돌을 고르는 작업을 했는데, 그걸 시키는 선생은 우리에게 미래의 선배로서 자부심을 품게 될 학교의 돌을 고르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미래의 학교가 내게 무슨 의미가 있나. 돌을 줍는 내가 너무 끔찍했다. 어쩌면 여전히 그렇게 가르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무슨 망각병에 걸린 것처럼 나도 똑같이 내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였다. 책상에 앉아 고통을 참고 닥치고 공부하는 것은 미래의 너를 새롭게 만드는 것이라고. 이런 끔찍한 담론들은 비담론적적인 것들의 생생함을 무참하게 만들어 버린다. 아마도 ‘의미’는 권력 관계에서 ‘명령’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

구조주의가 언제나 언어학적 관점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푸코의 이 돌파는 매우 중대한 지점을 표시한다. 언어학적 관점에서만 대상을 바라보는 것은 권력 관계의 형상 중 언어적 구조, 그러니까, 아까 내가 말했던 ‘의미’가 내포하고 있는 지배적 담론 구조를 보게 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벗어나는 길을 열어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림은 담론과 달리 언제나 자기 고유의 소재, 그러니까 비담론적 소재가 없으면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 그 비담론적 소재에다 비담론적 실천에 의해서야 실재화된다. 마네는 회화 밖의 담론과 의미들에서 벗어나서 회화 그 자체의 고고학, 그러니까 비담론적 소재와 실천의 전범을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이다. 때마침 정치적 격변 때문에 의식화되던 푸코가 그것을 콕 집어 풀어내고 있었다. 푸코는 정치적 의식화와 함께 마네로부터 비-의미의 세계를 발견하고, 담론에서부터 비담론의 세계로 넘어가고 있었다. 회화는 비담론적 소재와 실천의 실험체이다.


회화, 감상자들을 움직이게 하다

비-의미로부터 오히려 다양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다는 이 프로세스는 이 세계를 무대 위에 펼쳐지는 연극으로 바라보는 것과도 같다. 이 연극성을 극적으로 표출한 압도적 작품은 바로 그 논란 많은 <폴리-베르제르의 바>이다. 역시 이 그림도 거울이 그림의 뒷부분 전체를 점유하고 있고, 거울 하단이 테두리 지워져 있어서, 마네는 평평한 표면으로 공간을 폐쇄한다. 앞에서 보았던 <막시밀리앙의 처형>이나 <오페라 극장의 가면 무도회>와 똑같다. 그런데 그 벽이 거울이라서 그 거울에 캔버스 앞쪽, 그러니까 주인공 여인이 바라보고 있는 앞쪽을 재현해 놓았다. 그러다 보니까, 아주 묘하게도 입체적 공간이 이 한 면에다 모조리 표현되어, 입체적 공간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거울도 앞을 비추어 보여 주고, 실제 여종업원도 앞을 향하고 있으며, 심지어 여종업원의 뒷모습조차 앞으로 당겨져 평면인 거울에 비추어져 앞에 보인다. 모든 것이 한 평면에 그려지는 것이다. 깊이가 사라져 버린 세계. 니체가 이 그림을 보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깊이을 싫어했던 니체가 보았다면 바로 내 철학적 구현체라고 외쳤을 법한 이 그림은 <막시밀리앙의 처형>이나 <오페라 극장의 가면무도회>의 극단을 보여 준다. 여기서도 마네는 “이 그림은 그림일 뿐이다”라고 외치고 있다.

폴리-베르제르의 바

그러나 이 그림의 매우 중대한 묘사는 여인이 거울에 비친 뒷모습이다. 중앙에 있는 여인을 거울에 비친 모습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감상자나 화가는 오른쪽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렇지만 여인은 중앙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으므로 오른쪽으로 움직일 수 없다. 대상은 움직이지 않지만, 대상의 뒷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가 오른쪽으로 움직여야만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가 중앙에 있는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는 그녀 정면에 위치해야 한다. 완전한 양립불가능한 모순에 빠진다. 자, 그러면 이렇게 된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정면에 있다. 그러나 동시에 거울에 비친 그녀의 뒷모습을 그리기 위해서 화가는 오른쪽으로 이동해야 한다. 따라서 화가는 연달아 또는 동시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두 자리를 점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에 따라서 화가가 본 그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감상자의 상상도 그림의 정면 중앙과 오른쪽 측면 자리를 동시에 점유하도록 요청받는다.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른쪽 끝을 보면 여인에게 말을 거는 한 사람이 거울에 비친다. 그런데 그 자리는 화가가 여인을 정면에서 바라보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어야 할 자리다.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여인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이걸 보면 그림은 화가가 부재하다고 말하고 있다. 화가는 그리는 장소로서 중앙과 오른쪽 동시에 있을 수 없다. 게다가 여인 앞에 서 있는 어떤 남자 때문에 화가는 아예 없는지도 모른다. 이 이상한 남자 때문에 화가는 중앙에서 현전하다가 오른쪽에서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푸코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오른쪽 끝 남자의 시선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이다. 그는 여인의 정면에서 애초에 화가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여인을 바라보고 있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아마도 그 시선이라면 이 그림은 이렇게 그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화가가 그 남자의 시선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았으면 아주 다른 시야가 펼쳐졌을 터이지만, 맨 앞 테이블의 대리석과 거울 하단의 테두리 사이의 거리가 매우 좁은 것으로 봐서는 그림은 그 시선(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그려지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오히려 여인의 시선을 보면 여인과 같은 높이이거나, 차라리 밑에서 위로 올려다보면서 그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리석과 거울 사이가 매우 좁게 그려진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서보시라.

푸코는 이를 두고 세 가지 양립 불가능성의 체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화가는 중앙에 위치해야 하고 또 오른쪽에 위치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있어야 하고 또 아무도 없어야 합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이 있어야 하고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시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대로의 광경을 보기 위해 어디에 위치해야 할지를 알 수 없는 삼중의 불가능성, 즉 감상자가 위치해야 하는 안정적이고 정해진 장소의 배제가 <폴리-베르제르의 바>의 근본적인 속성이며, 이 그림을 볼 때 체험하는 매력과 거북살스러움을 설명합니다.”(『마네의 회화』 「미셸 푸코·마네의 회화」 70페이지)

"푸코는 마네가 감상자에게 당신은 그림을 보고 있다고 끊임없이 말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심각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그릴 수 있는 실험체에 불과하다고 전한다. 그 관점에서 마네는 그림의 평면 위에 SF에 가까운 시공간을 창출해낸다. 그림 속 주체들이 양립불가능한 위치에 있게 만들어 버리고, 그 동시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감상자는 이동해야 한다. 감상자가 이동한다는 사실은 그림이 그림 밖 주체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다. 그저 보고 느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내 상상의 신체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뭔가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면, 틀림없이 아이가 아니라 어른인 척, 다 알고 있는 척 이야기할 것이다. 마치 영화라면 존 웨인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세상일 모두 겪어보고 뻔한 거 아니냐는 식으로 연기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나는 그냥 있어 보일 것이고 그럴듯한 이야기가 더 그럴듯해 보일 것이다. 언어적 탐구를 통해 담론적 구조를 파악하는 것은 그런 뻔한 이야기를 거들먹거리는 것으로 귀결되고, 다시 그 담론적 구조에 포섭되어 동일체가 되어 버릴 위험이 도사린다.
푸코의 마네 분석은 그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지식의 고고학을 넘어 비담론적 실천에 관한 탐구로 가는 길목을 절묘하게 보여 준다. 마네는 회화를 통해서 그것을 실현했고, 푸코는 그와 정신적으로 동행하며 정치적 의식화 과정을 통과한다.

정말 이상한 것이, 마치 푸코가 1984년에 죽었는데, 다시 1966년에 멀쩡히 다시 살아나 탐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어떤 원환(圓環)처럼 푸코의 정신사는 시작과 끝이 연결되어 영원히 되돌아간다. 80년대 후기 푸코가 1966년에 깨어나 자기배려의 연구 이후를 이어서 탐구하는 것 같다. 마네는 양립불가능한 주체들이 함께 존재하는 공간을 그림으로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글_약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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