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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선생의 헤테로토피아

[헤테로토피아]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거부

by 북드라망 2022. 1. 21.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거부

 

 

미셸 푸코, 『칸트의 인간학에 관하여-『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 서설』, 김광철 옮김, 2012, 문학과지성사.

 

푸코는 18세기 말 이전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인간은 지식의 조물주가 고작 200년 전에 만들어 낸 아주 최근의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이제 그 인간이 사라지고 있다고 예언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쓴 『말과 사물』 첫 줄부터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문장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읽었지만, 푸코의 이 말들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굉장히 기묘한 일이다. 내게 ‘인간’이란 머리와 팔과 다리, 그리고 몸통으로 움직이는 생물이고, 세상 고민을 다 뒤집어쓰고 우울해하거나 기뻐하는 존재이다. 이런 존재가 18세기 이전에는 없었다고 하고, 더군다나 이제는 사라질지도 모른다니, 아무리 논리적인 설명을 들어도 감각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이건 뭐랄까, 오랫동안 멀쩡히 같이 살아왔고, 어릴 적 추억도 함께 공유하던 형이 원래는 네가 알고 있는 그 형이 아니고, 그 전 추억도 네 기억을 조작해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런 스릴러를 마치 전 인류적으로 펼쳐 전개하고 있는 꼴이랄까. 과학책에 보면 우리가 별을 올려다볼 때마다 저 별빛 중 하나가 몇백 년 전에 출발해 이제 막 도착한 거라고, 그리고 그 몇백 년 전 빛이 내가 보는 순간 통과해 저 멀리 떠나가고 있다고 말하던데, 마치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소름이 끼치던 감각이 푸코의 저 말과 함께 다시 돋아나는 듯했다. 


그러니까, 푸코는 지금 내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그 인간은 한 200년 정도 지구에 있다가 곧 떠나갈 저 빛과 같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인간은 여권과 신용카드, 지갑을 잃어버릴까 봐 끙끙거리며 여기저기 바삐 돌아다니는 관광객처럼 지구에 머물고 있었다. ‘인간’이 신기하고 화려한 것들, 하나라도 놓칠세라 탐욕스럽게 휩쓸고 다니다 이제 곧 떠나갈 존재라고 생각하니까, 괜스레 가엽기도 하다. 

 


인간이 출현하고 사라지는 이 장면은 SF 영화에서 갑작스럽게 웜홀이 열렸다가 나타나, 다시 웜홀을 열어 다른 세계로 떠나는 우주선의 모습과도 같다. 저 웜홀이 열리고 닫히는 장면을 반짝거리며 갈증에 찬 빛을 뿜으며 바라보는 푸코. 웜홀을 통과해서 이제 막 출현한 ‘인간’이란 팔과 다리, 몸통을 가진 존재이지만, 푸코에겐 그전과는 다른 형태로 출현한 존재이다. 즉, 푸코는 그전과 똑같은 형상을 지녔으되, 내용물은 완전히 달라진 존재로서 인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바라보고 당연시하던 네 형은 네 형이 아니라고 말하는 스릴러처럼, 팔과 다리와 몸통을 지닌 생물인 건 여전하지만, 지금 그 생물은 여태 알던 그 생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칸트적 인간’ 출현

 

우리는 어떤 문제를 직접 말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그다지 정확하지 않았다는 것을 곧잘 깨닫는다. 친구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서 찾아갔으면서, 친구의 슬픔이 대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위로 비슷한 시늉만 하고 돌아온 나를 발견한다. 친구와 위로 사이에 슬픔만 더 슬퍼진다. 위로에는 위로의 과학이 필요한데, 그 대상이 되는 슬픔을 정확히 알지 못하니 혼탁한 말만 남는다. 푸코가 인간이 200년 전에 출현했고, 다시 사라질 것이라고 말할 때, 그가 말하는 그 ‘인간’에 대해 분명히 이해하지 않으면 그의 서술은 그냥 중얼거리다 말 가십거리가 되고 만다. 우리가 정확해지기 위해서는 18세기 칸트의 정신으로 잠시 여행이 필요하다.


아마도 고대인의 생각부터 여정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고대인은 일단 앞에 있는 사물들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고대인은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을 ‘있는 것’, ‘존재하는 것’, ‘존재자’라고 여겼다. 그러다가 생각이 깊어지고 보다 효과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해서 이 존재자들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인 존재자를 상정하게 되었다고 가정하고, 그게 아마도 ‘신’(神)이라고 해보자. 이리되면 두 가지로 나뉜다. 눈앞 사물들로서 존재자들과 그것들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근원적인 존재자. 


여기까지만 이야기해도 우리가 다가가려는 거의 모든 내용이 흘러나온다. 존재자들은 눈앞에서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려면 ‘나’ 앞에 있고, 그게 온전히 생각으로 떠올라야 한다. 그러니까 내 눈에 보이고, 그것이 내 머리에 생각으로 떠올라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뭘 어찌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토마토라는 존재자가 있으려면 내 눈에 토마토로 보이고, 또 내 머리에 ‘현상’(Erscheinung)으로 떠올라야 한다. 그냥 빨강, 둥그런 모양으로 분열되어 잡다하게 나타나면 안 되고, 그런 잡다한 모습들이 결합해서 ‘토마토’로 머리에 떠올라 ‘대상’(Gegenstand)으로 서야 한다. 존재자가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나’의 머리에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그런 ‘나’가 없으면 어떤 사물도 존재자가 되지 못한다. 바로 그 ‘나’가 ‘인간’이다. 


좀 이상하긴 하다. 무슨 도돌이표 말장난 같기도 하다. 언젠가 명동 어디선가 커피를 사 들고 어느 벤치에 앉아서 사람들이 오고 가는 것만 두세 시간 지켜본 적이 있다. 눈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았다. 이어서 멍청하게 서 있는 빌딩들을 바라보고, 하얀 여자들이 나오는 광고판을 바라보았다. 그저 멀거니 바라보았다. 처음엔 내가 뭐하나 싶다가, 이상하게도 기분이 점점 평온해졌다. 뭐랄까, 비가 오고 나서 하늘이 맑아지는 것처럼, 세상이 청명해지면서 사물과 나만 남는 그런 단순함으로 푸근했다. 내 안에서 사물과 나 사이가 수평적으로 위치 지워지는 느낌은 실로 오랜만이다.

 
‘현상’을 객관적으로 타당한 대상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해보자. 좀 거칠게 이야기하면 눈앞에 진짜 있는 것이 내 눈으로 직접 보고, 그게 내 머릿속에 진짜 모습 그대로 떠오르는 것이라고 해보자. 그런 대상 중 가상(Schein)이 아닌 현실의 진짜 대상을 현상이라고 부르고, 그 현상이 정돈되어 토마토의 형상으로 내 머릿속에 떠오르면 그것이 표상(Vorstellung)이다. 그렇게 정리하여 생각하면, 내가 그 벤치에서 청명해지고 포근해진 느낌은 이 표상의 기능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표상이 있으니까,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분리되어 청명해지고, 평온해졌달까, 아무튼 그렇다. 어떤 한계는 있지만, 우리는 신이나 어떤 초월적 괴물이 없이도 표상을 통해서 사물과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칸트의 이런 접근은 그 전과 무엇이 다른 걸까. 좀 뜬금없지만, 데카르트가 신을 사유하는 경로를 우회해보자. 그에게 신은 무한한 실체이다. 그런데 무한한 실체만 무한한 실체를 생각할 수 있으므로 한낱 미물(微物)인 내가 그 무한한 실체를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현실의 우리는 신을 상상한다. 이 지점에서 데카르트는 칸트와 벡터가 완전히 다른 경로를 걷는다. 유한한 내가 무한한 신의 관념을 가지게 된 것이 오로지 무한한 신이 실제로 현존하기 때문이라고 사고한다. 그러니까, 나는 미물이므로 유한한 것이지만, 오로지 신이 있으므로 미물인 내가 존재하게 되고, 그 미물인 내가 무한한 신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아마도 칸트 이전에도 표상을 알고는 있었겠지만, 그 표상은 오로지 신이 나누어준 형상들이었다. 그것은 수평적이지 않고 수직적이다. 무한한 신이 전제되고, 그 신이 표상들을 나누어 준다. 표상은 점심시간 급식처럼 전적으로 분배받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와 ‘내 생각’은 전적으로 신에게서 나온 것이 된다. 즉, 표상은 신이 분배해준 당연한 것이 되어, 표상 그 자체를 의문시하거나 고민할 필요가 없다.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일 뿐, 대상이 무엇이고, 현상이 무엇이고, 표상이 왜 그렇게 출현하는지 의문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그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니까. 신 이외 다른, 이를테면 의식의 작용과 같은 다른 원인을 통해 표상의 의미 작용을 설명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조차 성립하지 않는다. 내 눈이 내 눈을 직접 볼 수 없는 것처럼, 고전주의의 표상은 표상을 직접 보지 못한다.

 

푸코가 주목하는 것은 이 지점에 와서 갑자기 떠오른 아틀란스 섬인데, 그것은 무한한 신을 전제하지 않고 대상과 표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유한한 인간’이다. 내가 명동 벤치에 앉아 멀거니 사람들의 얼굴과 우뚝 솟은 빌딩과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던 그 ‘인간’, 그 ‘나’가 우리들의 의식 속에 옹그리고 조용히 잠자코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아주 갑작스럽게 출현한 존재이다.

 


푸코의 ‘칸트적 인간’ 해석

 

『칸트의 인간학에 관하여-『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 서설』(이하 『서설』)에서 푸코는 칸트 텍스트에 대한 일종의 고고학을 수행해서 칸트 저작들의 지층에 묻혀 있던 새로운 인간상을 발굴해낸다. 푸코는 칸트 철학을 근본적으로 추동해 온 구체적인 칸트만의 인간상은 무엇인지를 밝히려고 한다. 흔히들 알고 있는 칸트의 저작들은 명시적으로는 “비판하는 인간”(homo criticus)의 탄생을 알려주는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그 안에는 이전까지 인간 실존과는 다른 인간상의 구조가 숨겨져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전 시대의 인간상은 데카르트의 신 증명이 보여주듯이 무한한 신의 존재를 전제해서만 규정되는 인간이고, 인간이라는 표상조차 분명하지 않은 시대의 인간이다. 그저 주어져 있는 것들로서 인간이고 표상이라서 그것들이 있는지조차 중요하지 않았다. 맨 위 신으로부터 위계적으로 구성된 도표에 한 자리를 차지하여 그저 있을 뿐, 모든 원인은 신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칸트 이후 표상은 더는 모든 사고의 최종 근거가 아니다. 그 아래에 신 아닌 더 근본적인 요소들이 있고, 그 요소들이 결합해서 표상들을 출현시키고 있어서, 표상은 파생적인 산출물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이제 중요한 것은 표상의 토대와 근거를 찾는 것이다. 칸트적 인간의 새로움은 그 토대와 근거를 무한한 신이 아니라, 인간 그 안에서 찾는 다는 사실이다.  

 

 

그저 신에게서 부여받을 뿐이라고 생각하여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표상이 이제 그 자체로 ‘대상’이 되고 그 자체로 ‘표상’이 될 수 있다. 이제 표상을 갖는 인간을 대상으로 사유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우리는 인간과 표상을 연구할 수 있게 된다. 그 전 시대는 눈이 눈을 못 보고, 눈이 어떤지 질문하지 못했지만, 이제 그 눈을 떼어내어 살펴보고 질문할 수 있게 된다. 비로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할 수 있게 되었다. 전혀 질문하지 않아도 되는 인간이 이제 눈앞에 서 있는 대상이 되고, 그 인간이 떠올리는 표상들도 하나씩 검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생각해보면 기묘한 상황이다.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이 찍은 사진처럼 여기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이다. 신이 있어서 내가 있다면, 다른 고민을 할 것도 없이 신이 만들어낸 나만 있다. 그리고 그 나가 떠올린 표상도 신이 때때로 던져준 이미지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신이 없이 사물들만 있고, 다시 그 사물의 형상을 이미지로 떠올려 표상이 되고, 다시 그 표상 자체를 떠올려 또 다른 표상이 된다면, 후자의 표상은 누가 보고 있는 것일까. 나 뒤에 나가 있고, 다시 나 뒤에 또 다른 나가 있는 모습이 무한 반복되는 기묘한 사진. 칸트는 절대 유일신을 지우고, 무한히 반복되는 기기묘묘한 ‘나’를 만들어냈다.

 

아무튼 칸트는 이 표상을 수립시키는 근원적인 조건을 감성과 지성의 선험적 형식(시공간과 범주)이라는 형태로 ‘인간’ 안에 위치시키는데, 푸코는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가 아는 그 ‘인간’이 탄생한 것이라고 본다. 신이 없이 무한히 반복되는 ‘나’ 안에서 감성과 지성의 선험적 형식이 추동하는 표상을 지니고 생각하는 존재. 푸코가 18세가 말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기껏해야 200년 전에 만들어진 인간이란 칸트적 인간, 신 없이 표상하는 인간, 바로 그것이다. 

 


푸코의 ‘칸트적 인간’ 비판

 

사실 칸트의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이하 『인간학』)은 경험적인 선집일 뿐이다. 그것은 단지 사례들의 선집이고 모음집이다. 그래서 오히려 더더욱 『인간학』은 무한 실체에 대한 가설을 헛된 것으로 만든다. 현실의 인간 사례들을 끊임없이 참조하여 보여줌으로써 신의 부재를 더욱 크게 부각하고, 그 무한자가 남긴 빈자리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렇게 하여 인간의 경험적 본성이 한계에 있고, 유한하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해지게 된다. 여기에 이르면 그의 질문은 명확해진다. “무한자의 존재론을 거치지 않고 절대자의 철학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는 성찰 속에서 어떻게 유한성을 사유하고, 분석하고, 정당화하고, 정초할 것인가?”(『서설』 144p)

 

물론 칸트가 창안한 근대 인간학은 인간을 단지 감각에 주어지는 경험적 대상으로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경험을 구성하고 규정하는 ‘주체’로도 다룬다. 즉, 인간은 기계 법칙에 종속되는 경험적 자아로서 수동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초월적 주체로서 그런 경험적 현상들을 종합하여 경험적 인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빨강색, 동그란 형체, 달콤한 향내 등 잡다한 감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험적 주체이기도 하지만, 그것들을 ‘토마토’로 인식할 수 있게 하나로 종합하는 초월적 주체이기도 하다. “시간의 형식 안에서 감각에 주어지는 대상으로서의 자아는 규정하는 주체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대상으로서의 자아는 스스로에 의해 촉발되는 주체와 결국 다르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서설』 47p) 경험적이면서 초월적인 주체는 신에서 벗어나 웜홀을 통과하고 홀로 우주를 지나가는 우주선이다. 

 

이 주체는 실천적인 층위에서도 똑같이 관통된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실제 경험 속에서 구체적인 법률을 지켜야 하는 법률적 대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법률을 넘어 초월적인 차원에서 그 도덕 법칙을 구성하는 자유를 지닌 주체이기도 하다. 이리 보면 칸트에게서 자유와 도덕은 연결되어 있다. 초월적인 층위에서 자유는 경험적 층위에서 도덕을 위한 조건이다. 칸트는 이 구조 위에서 ‘인간’을 새로이 발명한 것이었다. 사실 칸트의 『인간학』은 경험 속 구체적인 실천 관계망에서 인간이 여러 법규에 종속되면서도, 자신의 자율성에 따라 행위를 하려는 자유를 함께 정리한 사례집이다. 그러므로 실천적인 차원에서도 인간은 경험적-초월론적인 주체 모습을 한 새 우주선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웜홀을 빠져나온 ‘인간’은 허겁지겁 신의 세계에서 벗어났지만, 이상하게도 또 다른 굴레에 뒤집어씌워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어쩐지 버려진 개처럼, 아니면 뱀이 벗어 던진 허물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는 그런 존재 같다. 

 

경험적-초월적 주체는 우리를 인식과 자유라는 새로운 차원을 선물로 주지만, ‘나’라는 이상한 존재를 남겨놓았다. 데카르트와 달리 칸트의 인간론에서는 ‘나는 생각한다’로부터 그 생각하는 ‘나’가 존재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나’를 경험적으로 인지(통각)할 수는 있지만, ‘나는 생각한다’라는 초월적 통각은 텅 빈 채로 무한히 반복될 뿐이다. 나는 나를 생각하고, 그런 나를 나는 생각하고, 하면서 그런 과정이 무한히 계속되지만, 정작 ‘나는 생각한다’는 통각 자체를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그저 뒤편에서 그렇게 연속적으로 그리되리라는 기대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생각한다’와 ‘나는 존재한다’가 일치할 어떤 확증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데카르트에서는 신이 모든 것을 확인해 주던 것이, 칸트에 오면 수평적인 인식과 자유를 얻는 대가로, 존재의 보증을 잃어버린다. 결국 표상과 존재가 일치하지 않는다. 나는 근거 없이 나이다!

 

여기에 이르면 푸코가 인간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 것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푸코는 『서설』에서 근대 지식을 탄생시킨 이 놀라운 주체, '인간'이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라는 전체하에 이루어지는 사유들이 '인간학적 환상'에 빠져 있다고 진단한다(『서설』 146p). 이것을 『말과 사물』에서는 '인간학의 잠'에 빠져들었다고 바꿔 말한다. 칸트는 신의 세계를 탈출하면서 다시 인간이라는 행성에 불시착한 꼴이었다. 보기 좋게 웜홀을 통과해 우주를 지나간다고 생각했던 우주선은 버려진 개처럼 끙끙대며 인간이라는 행성에 기어들어 갔다. 

 

칸트는 신이 사라진 자리에 표상을 담지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출현을 알렸다. 인간은 그 표상력으로 인간 과학의 지식을 생산해왔고, 자유를 향한 모험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 모험은 아주 작은 인간-주체에 갇혀서 찬란하다고 여겼던 그 지식과 자유마저 허위로 만들 위험에 처했다. 심지어 신이 사라졌다고 자신했던 사람들 앞에 정치와 사회의 모습으로 새로운 신들이 환영처럼 되살아나는 일도 생겨난다. ‘인간’은 너무 높이 날아올라 자신의 그림자를 미처 보지 못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환상이 되어 소멸로 향한다.

 

칸트는 흄을 통해서 독단적 잠에서 깨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을 받아 푸코는 니체를 통해서 인간학의 잠에서 깨어야 한다고 패러디한다. 칸트가 신의 세계에서 벗어났다고 여기자마자, 다시 인간-주체의 세계에 갇힌 것은, 오히려 철저히 신의 죽음을 마무리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다. 결국 신의 죽음은 절대자의 존재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지만, 더 철저하게 진행하여 동시에 ‘인간’ 그 자체도 살해해야 완성되는 것이었다. 즉, 신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 안에서 완성된다(『서설』 148p). 그런데 그것은 『서설』의 마지막 문장이 알려주듯이 칸트의 문제의식이었던 “인간이란 무엇인가”(Was ist der Mensch?)를 거부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자리, 니체의 표현대로라면 초인의 자리에서라야 가능하다. 

 

이쯤 되면 오히려 우리에게 다른 흥분과 편안함이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200년간 잠시 출현했던 인간-주체는 정거장일 뿐이었고, 그 자리엔 이제 다른 웜홀을 통해 다른 세계로 가리라는 흥분, 동시에 역설적으로 지금-여기가 맨 끝이어서 생기는 편안함이 서려 있다. 옛날 고향 제주에서 친구들과 길을 걷다가 밭 아무 데서나 보이는 무덤에 더러 기대어 눕곤 했는데, 그때 느끼던 그 기묘한 편안함과도 같다. 그것은 최후의 인간들이 느끼는 편안함이다. 

 

 

글_약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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