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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선생의 헤테로토피아

[헤테로토피아] 삶을 만드는 헤테로토피아

by 북드라망 2021. 6. 18.

* 『자기배려의 인문학』, 『자기배려의 책읽기』로 '공부'가 어떻게 '자기배려'가 되는지 보여주셨던 '약선생'님께서 새 연재로 돌아오셨습니다! 무려 '서평으로 푸코읽기'라는 기획이고요, 기획의도에 걸맞게 푸코가 '다른 장소', '내부에 생성중인 이질성의 장소'라는 의미로 사용한 '헤테로토피아'가 코너 제목입니다(개념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아래 본문을 참고하세요!) 그럼 앞으로 많은 관심과 기대 부탁드립니다!!

 

삶을 만드는 헤테로토피아

 

『헤테로토피아』, 미셸 푸코 지음,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나는 그다지 특출하거나 특이한 사람은 아니다. 누구나 거치게 되는 생애 주기를 따르며 사는 평범한 유형의 인간이다. 때 되어 학교에 다니고, 사회로 나올 때쯤 직장에 들어갔고, 나이가 차자 결혼했으며, 시간이 지나 아이들이 생겼다. 사회나 가족이 그런 삶을 원하고 있으니, 누군가는 그렇게 살게 되고, 나라고 다를 바 없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한 조각의 야심도 없었다. 내게 그것들은 여름이 돌아오면 선풍기를 틀고, 겨울이 오면 쌓인 눈을 치우는 것과 진배없었다.


그래서인가, 집이나 회사 사무실에 홀로 있을 때 내 존재는 없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왠지 시공간과 내가 따로 분리된 개별자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공간의 한 부분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흘러가는 시간의 한 부분, 지금-여기 이 공간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느낌. 공간의 연속적인 속성으로 내가 뻗어 나왔다는 느낌. 있긴 있는데, 없는 느낌. 어떤 농밀한 부재감. 


그러다가도 잠시 태도변경의 순간이 찾아오는 때가 있다. 나 혼자 이곳에 있다는 적막감이 지금 이곳을 좀 기이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시간과 공간이 낯설어 보이는 순간. 그 순간 이 시간과 이 공간은 순백의 백지장이 아니다. 어둡고 밝은 면, 움푹 패고 불룩 튀어나온 면, 그리고 그 면을 타고 나처럼 뻗어 나온 컴퓨터, 책상, 책들, 내 동지들. 


그런 느낌이 부풀어 오르면 나는 아주 작게 미세해진다. 작아지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그런 감각이 내 살결을 타고 온몸을 뒤덮는다. 더 이상 작아질 것도 없이 미세해지면 그때 공간이 내게 쿡쿡 웃으며 묻는 것이다. “어이, 당신, 내게서 튀어 나가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아?” 글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에 답할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다. 그런 지경까지 생각이 이르면, 뜻밖에도 이 모든 게 연극적인 삶처럼 느껴진다. 어쨌든 죽어버리면 그 이상 잃어버릴 것은 없고, 공간이 말한 대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게 되지 않을까. 연극 무대의 막이 내려지면 아무 일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그러나 이제 회사 사람들이 점심을 먹고 한꺼번에 들어와 오후 일이 시작되면 공간에서 뻗어 나온 나는 공간과 나눈 난해한 대화를 잊고 분주해진다. 우리는 연기의 프로다. 우리는 이 일 저 일을 정말이지 정확하고 간결하게 잘 처리한다. 마치 잘 꾸며진 무대장치 위에서 자기 자신을 잊고 연기하고 있는 명배우인 듯이.
  

하루키의 소설 『댄스 댄스 댄스』에 보면 ‘나’가 열세 살의 미소녀 유키를 데리고 공항에 가는데, 폭설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게 되자 드라이브에 나서는 장면이 있다. 차에서 ‘나’는 렌터카 사무실에서 빌린 올드 팝 카세트테이프를 튼다. 그때 흘러나오는 노래는 샘 쿡의 <원더플월드>. 주인공 ‘나’가 말한다. “좋은 곡이다. 샘 쿡.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총에 맞아 죽었지!” ‘나’는 중학교 때만 해도 세상에 로큰롤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처럼 열심히 듣지도 감동하지도 않는다. 그때는 시시한 것에도 사소한 것에도 마음의 떨림 같은 것을 허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는 그렇지가 않다. 그때 그 열망들이 다 시시해 보이는 것이다. 너무 시시해서 내가 왜 저랬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지금은 모든 게 시시해 보인다. 그러나 나도 그때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무슨 일이었는지, 일주일 정도 가출한 적이 있다. 친구 자취방에 소주 한 병, ‘솔’ 한 갑, 새우깡 한 봉지를 들고 들어갔다. 우리는 주다스 프리스트 테이프(아마 정식 판매본도 아니고 친구가 녹음한 테이프였을 것이다)를 반복해 틀어놓고 온종일 “조까라 뿌셔라” 소리를 질러 댔다. 격정적인 감정이 오르고, 몸과 마음속에 잠겨져 있던 소리가 모두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주다스 프리스트

 

그런데 그렇게 살짝 취해서 목이 쉬어라, 소리를 질러 대고 나니까, 온몸이 기묘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학교, 집, 그리고 아까 걸어오며 봤던 사람들과 공간들이 그저 배우들이고 연극 무대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 것이다. 그들이 모두, 심지어 나까지 위선이 아니라, 연기하고 있다는 느낌. 어쩐지 세상이 조금은 말랑말랑해 보이는 것도 같았다. 나도 모르게 묘한 미소가 입가에 스몄다. 기묘한 자신감과 함께 말이다. 나는 그 감각을 주다스 프리스트와 함께 그 엉망진창인 자취방에서 느꼈다. 모든 게 시시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그 시간, 그 공간은 지금-여기와 완전히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이다. 

 


헤테로토피아, 지금 여기에 있는 유토피아

 

푸코의 유족과 연인이었던 다니엘 드페르는 생전에 책으로 펴내지 못하고 곳곳에 흩어져 있던 푸코의 파편 글, 강연, 그리고 인터뷰를 모아서 『말과 글』(Dits et écrit)이라는 책을 펴낸다. 나는 푸코가 공중에다 대고 흩뿌려 놓은 말이 오, 육십 년이 지나 글로 다가온 것을 언제나 신기하게 여겼다. 공허로 흩어진 소리가 공중을 떠돌다 비로소 자신의 육체를 가지고 돌아오다니. 부활이 있다면 이게 부활 아니냐.  
  

그러나 푸코 몸에 붙어 있던 언어들이 몸과 함께 분해되어 공중으로 긴 여행을 갔다가 돌아왔지만, 온전한 육체로 돌아오진 못한다. 그것들은 절단된 육체로 우리 앞에 선다. 내가 머릿속에 상상하는 푸코의 실제 육체는 대머리에다 냉철하고 지적인 눈매, 그리고 늘 현대적인 패션을 걸친 이미지인데, 이 글들을 읽을 때면 완전히 딴판이 된다. 마치 팔, 다리가 뜯겨서 글을 걸치고 나타난 것 같으니까. 그것은 푸코가 아닌 것 같은 푸코이다. 「헤테로토피아」도 15페이지 정도의 짧은 강연 원고이다. 이 글도 『말과 글』에 수록되어 있다. 마치 뜯긴 팔, 다리처럼 연대순으로 나열된 원고들 틈에 박혀 있다. 이 강연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그러니까 장소 없는 지역들, 연대기 없는 역사들이 있다. 이런 저런 도시, 행성, 대륙, 우주. 어떤 지도 위에도 어떤 하늘 속에도 그 흔적을 복구하는 일이 불가능한 이유는 아주 단순히 그것들이 어떤 공간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도시, 이 대륙, 이 행성 들은 흔히 말하듯 사람들 머릿속에서, 아니 그들 말의 틈에서, 그들 이야기의 밀도에서, 아니면 그들 꿈의 장소 없는 장소에서, 그들 가슴의 빈 속에서 태어났으리라. 한마디로 감미로운 유토피아들.”


푸코는 유토피아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한다. 원래 유토피아(utopie)는 그리스어에서 ‘장소’라는 뜻의 단어 토포스(τόπος) 앞에 부정을 뜻하는 접두어 우(οὐ)를 붙여 만들어졌다. 장소 아닌 곳. 그러니까, 그것은 모든 장소 바깥에 있는 곳이다. 그런데 푸코는 바로 이어서 이 유토피아와는 다른 것을 상상한다. 

“한데 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장소, 우리가 지도 위에 위치 지을 수 있는 장소를 가지는 유토피아들, 그리고 명확한 시간, 우리가 매일매일의 달력에 따라 고정시키고 측정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유토피아들이-모든 사회에-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인간 집단이든 그것이 점유하고 실제로 살고 일하는 공간 안에서 유토피아적인 장소들을 구획하고, 그것이 바삐 움직이는 시간 속에서 유크로니아적인 순간들을 구획한다.”


그것은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이다. 푸코가 말하는 헤테로토피아는 ‘다른’이라는 뜻의 헤테로(heteros)와 ‘장소’라는 뜻의 토포스(topos)가 합쳐져 만들어진 푸코의 조어다. 다른 장소. 그러니까, 그것은 장소이지만 기존 장소와는 다른 공간을 말한다. 장소 아닌 곳과 다른 장소는 지향하고 있는 방향 자체가 다르다. 장소 아닌 곳, 즉 유토피아는 우리가 실제 보고 느끼는 장소를 넘어서서 장소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장소 바깥에 있는 곳이다. 단적으로 그곳은 지금-여기에 없다. 반면, 다른 장소, 즉 헤테로토피아는 여전히 지금-여기에 있는 곳이면서 우리가 알고 느끼던 그 장소들과는 이질적인 장소이다.
  

이렇게 보면 헤테로토피아는 지금-여기를 벗어나 세상 밖에 있는 유토피아와 달리 이 안에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헤테로토피아는 ‘현실에 존재하는 유토피아’이다. 정상적인 사고 경로로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장소가 유토피아인 반면, 헤테로토피아는 현실 안에 어떤 배치가 바뀌면서, 혹은 숨겨진 다른 배치를 찾아내면서 실제로 있을 수 있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위치를 가지는 유토피아(utopies localisées)이다. 지금-여기라고 하더라도 지금-여기 같지는 않은 지금-여기. 지금까지 태도로는 접근조차 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지금까지의 판단을 중지하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즉, 그것은 남다른 태도변경에 의해서라야 나타나는 현상학적인 장소라고 할 것이다. 
  

푸코는 헤테로토피아를 ‘대항 공간’(contre-espaces)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헤테로토피아는 반드시 지금-여기의 장소 안으로 들어와 있어야 한다. 장소 안에 들어와 있어야 기존 장소에 대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저기 저 별이 이 공간에 대항하려면 이 공간으로 다가와 지옥 같은 이 공간과 함께 중첩되어 우리와 함께 싸워야 한다. 그것은 유토피아일수도 있고 헤테로토피아일 수도 있다. 갈수 없는 곳으로만 상상한다면 유토피아이지만, 별빛이 드리워진 강물 위에서 이질적인 삶을 소원하는 자에게 그 공간은 헤테로토피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현실적인 장소에서 실제로 현실화된 유토피아이다. 그러면 이렇게 된다. 헤테로토피아는 우리들의 장소 안으로 들어와 있고,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헤테로토피아와 접해있다. 

 


과학, 헤테로토피아를 찾아가는 모험

 

푸코는 언젠가 신체와 쾌락에 대해 아주 다른 체계가 있는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얼마나 낯선 존재인지 알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지금-여기에서 우리에게 익숙하던 말과 행동들을 어떤 다른 사람들은 경악스럽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게 이 말은 이렇게도 들렸다. 그곳과 이곳은 언제나 서로에게 경악스러운 대상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헤테로토피아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푸코는 ‘과학’을 기이하게 정의한다. 과학은 서로 헤테로토피아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 과학은 절대적으로 다른 공간들, 즉 헤테로-토피아들(hétéro-topies)을 연구하는 것이다. 즉 과학은 헤테로토폴로지(hétérotopologies)이다.
  

이런 과학에는 우리가 흔히 아는 매끈한 합리성만 존재하지 않으리라. 1960년대 푸코는 광기를 “위반인 동시에 이의제기인 경험”이라고 말한 바 있다. 어떤 시공간에서는 사람들의 행동에 한계를 부과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것을 배제하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 다른 편에서는 그런 한계와 배제, 분할에 대해서 위반하고 이의제기를 격렬하고 분명하게 하는 행동들도 함께 있게 마련이다. 그것을 추동하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 숨은 광기다. 헤테로토피아의 과학은 매우 고도로 계산된 합리성이 존재하는 것이면서, -우리 안에 우리의 낯선 모습이 있다는 존재론적 사실을 분명히 알고서 행하는 것이니까- 또한, 그 합리성을 넘어서서 사고하고 행위하는 광기를 함유하면서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지금-여기를 지금까지의 지금-여기로 바라보지 않고 다른 형태로 이해해야만 새로운 규칙을 드러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므로 헤테로토폴로지는 광기를 품은 과학이다. 그리고 광기의 바다를 건너서 더 넓은 합리성의 세계를 찾는다. 지금-여기와 그때-거기가 서로 완전히 다른 체계 속에서 각각의 합리성을 가지고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파악한다. 현재의 과학을 배반하여 새로운 합리성을 찾아 모험하는 과학. 자기 자신을 배반하는 과학. 
  

 

이를테면 나는 마르셀 그라네가 중국의 수(數)에 대해서 파악해 나가는 작업은 헤테로토폴로지의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여기가 바로 헤테로토피아임을 고대 중국인들은 건축으로 증명해 보여준다. 중국 건축은 두 가지 기본적인 요소를 갖는다. 그것은 하늘의 표상인 지붕과 땅의 표상인 지반. 지붕이 원을, 그리고 지반이 정방형을 연상시킬 때, 그 건물은 우주의 모습을 띨 수 있게 된다. 사각형의 대지 위에 지어진 둥근 초가지붕의 집.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다. 고대 중국인들은 기존 공간에 하늘-땅이라는 지금-여기에 없는 우주 형상을 지금-여기에 그려내고 있었다. 지금-여기에 현실적으로 보이는 기존 공간과 함께 절대적으로 다르게 만들어 낸 공간인 집, 그것은 중국식 헤테로토피아이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결정적인 묘미가 숨어있다. 바로 그 헤테로토피아가 지금-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연극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동아시아는 헤테로토피아가 지금-여기에 존재한다는 일종의 존재 일의성에 따라 구성된다. 예, 악, 건축, 미술 모든 것이 이런 일의적 존재론이 펼쳐진 현장이다. 눈 밝은 그라네는 서구 과학 혹은 서구 수학의 눈을 버리고, 고대의 눈으로 동아시아 고대가 수를 사용하는 방식의 합리성을 탐험한다. 그들이 존재자들 틈에 존재의 형상, 즉, 우주의 형상을 지금-여기에다 심어 놓는다는 생각, 그리고 그것을 동아시아만의 독특한 수(數)의 효능성을 통해 그것을 연극적으로 현실화시켰다는 사실을 말이다. 
  

명당이라고 일컫기 위해서는 지붕 둘레는 216, 대들보는 144, 지붕까지의 높이는 81을 표준치로 해야 한다. 일단 여기서 지붕과 지반의 비율은 3/2[즉 지붕이 3, 지반은 2]이다. 마침내 아름다운 우주가 내 옆에 구성된다. 그렇게 구성된 곳에서 동아시아인들은 ‘24절기 연극’을 하는 것이다. 우주적인 집을 짓고, 절기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거두는 때가 되면 돌아가야 하는 그런 우주적인 연극. 어쩌면 왕조차 이것이 연극임을 알고서, 왕 노릇을 했을 것이다. 건축과 예악과 미술이 이 헤테로토피아로부터 산출되어 세상에 퍼진다. 이질적이어서 헤테로토피아이고, 헤테로토피아이기 때문에 평범한 삶의 연극이 완성된다. 

 


푸코-헤테로토피아, 우리 안으로 침입하다

 

나는 푸코가 자기배려의 지대로 들어오면서 ‘바깥’에 대한 시각을 크게 바꾼다고 생각해왔다. 생명 정치의 단계까지만 해도, 여전히 ‘바깥’은 절대적인 외부였다. 즉, 내부와 외부가 구분되고, 그는 절대적인 외부를 상상하고 지향했다. 그러나 후기의 자기배려 지대로 들어서면서 ‘바깥’은 상대적인 외부로 바뀐다. 즉, 내부, 외부라는 형식적인 구분은 사라지고,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적인 외부가 생성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곳에 권력 관계가 존재하기에 절대적인 외부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중요해진 것이 신체의 가소성(可塑性)이다. 어떤 권력 관계에서든 내 안에 공백을 만들어 신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재배치가 가능하도록 하는 것. 그것은 일종의 변신이다. 외부는 내 안에 공백을 찾아내 배치를 바꾸는 일이다.
  

그런데 1966년의 푸코가 말하는 헤테로토피아는 절대적인 외부의 관점에서도 기묘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곳은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장소이면서 기존의 질서와는 다른 반(反) 배치이자 실제로 현실화된 유토피아의 장소들이다. 유토피아라는 점에서 모든 장소의 바깥에 있는 장소이므로 그것은 여전히 절대적인 외부이긴 하다. 그러나 현실화된 장소라는 점에서 그것은 내부 안으로 침입한 외부이다. 그렇다. 헤테로토피아는 내부로 침입한 유토피아이다. 그러고 보면 그것은 상대화된 절대 외부, 내부로 진입 중인 외부, 내부에서 생성 중인 외부이다. 
  

푸코의 말들을 오랜 시간이 지나 글로 돌아와 만나는 일은 마치 연극 무대 뒤에서 분장 중인 배우들을 만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연극이 시작되기 전이나 후의 어수선한 모습을 보는 것만큼이나 신선하다. 이런 글은 오히려 다른 전후좌우 맥락을 깊게 고려하지 않고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경주의 어느 길가에서 주운 유구의 파편처럼 우리에게 다른 상상력을 발산하는 것이니까. 그 에너지를 지우지 않으려면. 
  

그러고 보면 글의 파편으로 되돌아온 푸코의 말들은 푸코의 외부가 내부로 진입하는 일인 것도 같다. 책이라는 출판물로 탄생하지 않고 말로 떠돌던 것들이 글이라는 현실적인 장소를 찾아 내려앉은 새로운 푸코-헤테로토피아. 푸코-헤테로토피아들을 만나면 내가 연기를, 그것도 형편없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는다. 
  

고등학교 시절 자취방에서 느꼈던 그 연극적 속성을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로 다시 만나는 것이다. 헤테로토피아가 별것 아니고 자취방에서 “조까라 뿌셔라” 해댄 그 순간이었던 거다. 그렇게 하고 나면 학교와 가족이라는 구성체의 연극적 속성을 너무 잘 이해하게 되는데, 놀라운 것은 토대의 허약함과 견고함이라는 양립 불가능한 성질도 온몸으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이 조금은 말랑말랑해지면서, 살아갈 만한 용기가 한 줌 정도 생기는 거다. 
  

 

우리가 만든 헤테로토피아를 경유하면 우리에게 삶의 용기가 생겨난다. 그것은 나를 살아가게 한다. 그렇게 헤테로토피아란 사회체계의 연극적 속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환상인데, 우리 시대에 그것은 가장 억압이 강했던 시기에 출현하여 우리를 살게 해주었다. 헤테로토피아는 억압을 뚫고 우리 안에 침입한다. 그 난장판에서라야 우리는 평소 보지 못했던 우리들의 연극, 우리들의 연기를 보게 되고, 다시 살게 해준다.  

 

글_약선생


※ 학술 수련을 받은 적이 없어서 내 글은 아마 논리 비약과 결함이 가득하고, 때론 수사학적 과장으로 덮여 있을 것이며, 철학서의 깊은 의미를 건들지 못하고 피상적인 문구나 사례 인용으로 점철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런 내 글이 사랑스럽다. 오히려 세월이 지나고 나면, 바로 그런 이유로 내 주변 사람들에게, 특히 오랜 세월이 지나 그 글을 읽는 ‘나’에게 다의적인 효과를 만들어 줄 것이니까. 텍스트의 중대성은 엄밀함이 아니고, 그것을 사용하는 것에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나는 빈집이다. 학술적 엄밀함이라곤 전혀 없어서 고증하거나 탐색할 가치나 필요가 없는 빈집. 그런데 바로 그러하므로 열쇠가 있어도 열 수 없는 빈집이다. 엄밀하게 잠근 곳이 없으니 말이다. 이제 푸코와 함께 북드라망에 다시 찾아 왔다. 한동안 나의 빈집에 찾아올 친구들을 상상하면 내 몸은 새로운 쾌락으로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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