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다락방에서 니체의 정글로
지식에의 의지와 지식을 만드는 의지
나는 늘 자연스러운 것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해 왔다. ‘자연스러움’ 만큼이나 의심스러운 상태도 없다. 공부와 글쓰기가 대표적인 것들이다. 언뜻 보기에 그건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꺼내서 글로 표현한 것뿐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경험해보건대, 그것은 조금은 억지로 한다는 생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실행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아무리 공부에 대한 로망이 있고, 공부에 대한 집념이 있어도, 책을 잡거나, 자판기 위에 손을 얹고 글을 쓸라치면 어김없이 “이것 참, 쉬운 게 없군, 그래. 어디 좀 쉽게 해볼 방법이 없을까.”라고 생각하고 이내 고개를 돌리게 마련이지 않나. 물론 금세 어쩔 도리가 없군, 하고 다시 머리를 긁적거리며 책을 들거나, 자판기에 손을 얹게 되지만 말이다.
이것은 푸코가 말하는 “지식의 의지”와도 다소간 관련이 있다. 내가 이제부터 다뤄보려고 하는 이 강의록의 제목은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이다. 여기서 ‘지식의 의지’(la volonté de savoir)는 우리가 흔히 아는 ‘지식을 향한 의지’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 경우는 어떤 주체가 있고, 그 주체가 지식에 대해 욕망을 품고, 그것을 획득하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지식욕’이다. 그게 마치 자연스러운 본능으로 내 몸과 정신에 새겨져 있는 것처럼 여기는 방식이다.
그러나 푸코가 이 말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욕망이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욕망 뒤에 그런 욕망을 일으켜 세우는 다른 조건들-당연히 정치, 경제, 역사, 사회적 조건-이 있다는 점이었다. 이를테면 지식을 산출해내고, 그 지식을 향하게 하는 인간 욕망 외부의 의지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 그러고 보면, ‘지식의 의지’는 ‘지식에의 의지’와 ‘지식을 만드는 의지’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보면 공부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자연스럽지 않은 일인 게 분명하다. ‘순수공부의지’ 따위 말은 애당초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책상에 앉아서 글자를 보며 익히고, 글자가 가리키는 내용을 생각하여 이해하고, 다시 그걸 글로 풀어서 써내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며, 하고 싶은 일이겠느냐는 말이다. 공부하고 싶은 의지(그것을 ‘지식에의 의지’라고 해보자)는 공부하게 만드는 의지(그것을 ‘지식을 만드는 의지’라고 해보자)에 의해 몰아 세워져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전체로서의 세계란 무엇인가, 만물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 같은 고리타분한 형이상학이 대체 내가 자연스럽게 의문을 품을 이유 따위가 없었지 않겠는가. 그게 뭐라고.
칸트의 다락방에서 니체의 정글로
푸코는 훗날 『성의 역사』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지식-의지의 정치경제학”이라고 묘파한다.
오히려 지식을 산출하고 담론을 증가시키며 쾌락을 유도할 뿐만 아니라 권력을 생성시키는 실증적 메커니즘으로부터 출발하여, 이 메커니즘의 출현과 작동의 조건을 주의 깊게 추적하고 그 메커니즘과 깊은 관계가 있는 금지나 은폐의 진상이 그 메커니즘과 관련하여 어떻게 배치되는가(distribuer)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우리의 작업은 그러한 지식의 의지에 내재하는 권력의 전략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이다. 즉, 성이라는 명확한 사례를 대상으로 지식의 의지의 ‘정치경제학’(l’économie politique’ d’une volonté de savoir)을 구성하는 것이다.(『성의 역사』 1권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 95쪽 ; Michel Foucault Œuvres Ⅱ, 670p. )
그런 점에서 내가 보기에 이 강의록의 특이성은, 이제 앞으로 계속 그러할 터인데, ‘지식의 의지’를 정치경제학적인 시선과 연결하여 끌고 가는 푸코식 글쓰기의 서곡이라는 점이다. 사실 푸코 문체의 멘탈리티에 대해 말하자면 끝이 없지만, 나는 이 강의에서 시도하는 지식과 정치경제의 연결, 담론과 비담론의 연결은 그 멘탈리티의 핵심에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화폐의 기원을 이 지식의 의지와 연결해 설명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이 인상적이면서 상징적인 장면 주변에는 20세기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해체적으로 갱신하겠다는 그의 욕망이 서려 있다. 물론 이후 그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생각의 트랙에 갇혀 당황스러운 상황에 봉착할 것이다. 아무래도 푸코는 자신의 연구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피와 살을 가진 비-담론의 영역 몇 가지를 통과해야만 했다. 마치 햄릿이 유령이 된 선왕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무언극으로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의 표정을 살펴보는 것과도 같다. 말을 확인하기 위해 말이 없는 행동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기원전 7~6세기, 지중해 도시들에서 인구 압력으로 극빈층이 더 빈곤해졌다. 여기에다 도리에이스인의 잇따른 침략으로 토지 소유가 불균등해지고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하였다. 이것은 부유층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푸코는 이때 최초의 대규모 화폐 사용이 내수용으로 출현한다고 말한다. 인민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인민 쪽으로 돈을 분배하기 위해서도 화폐는 필수적이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 지배층은 인민의 자산을 평가하고, 돈을 줄 시민과 돈을 받을 시민을 분류해야 했다. 그래야만 보유 자산에 따라 시민이 갖는 권리의 위계가 정해질 수 있었다. 이를 통해서 도시의 균형을 만들어냈다는 것. 이렇게 보면 화폐의 기원은 교환을 위해서라는 중상주의적 주장은 이상하다. 단지 교환은 화폐가 발전할 기반을 마련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교환은 이미 발생한 화폐의 권력을 더 크게 키울 뿐이다.
마르크스도 『정치경제학비판 요강』에서 교환이 화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성된 화폐의 권력을 강화할 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생산자들이 교환에 의존하는 데 비례하여 교환은 그들로부터 독립적으로 되고, 생산물로서의 생산물과 교환가치로서의 생산물 사이의 간극이 커지는 것처럼 보인다. 화폐가 이러한 대립과 모순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이러한 모순과 대립의 발전이 화폐의 초월적인 권력을 초래하는 것이다.”(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25쪽). 이어서 마르크스는 나중에 쓸 책에 대비하여 모든 관계의 화폐 관계로의 전환, 다시 말하면 현물세가 화폐세로 전환되거나, 현물 지대가 화폐 지대로 전환되는 것 같이 화폐가 등장하고 강화되는 사회적 실천들을 상세하게 서술해야 한다고 메모를 남겨놓는다. 마르크스와 푸코는 화폐가 권력 관계 속에서 등장하여 성장한 것이지, 중상주의자들처럼 단순히 교환관계로부터 자연 발생적으로 생성된다는 주장에 비판적이었다.
부르주아 경제학은 이 주제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원활한 교환을 위해 화폐가 필요했다는 식으로만 지적하고 넘어간다. 거기에는 필요한 모든 것들이 깔끔하게 완비되어 있어서, 교환에서 화폐에 이르는 길이 처음부터 패키지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원래 혼란스럽던 현실이 깨끗한 현실로 바뀌는 것이다. 이건 마치 가족 중 한 명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예측하거나 과거의 부정한 짓을 알아맞히는 능력이 있는데도, 사람들이 무당이 될 상으로 알고 불길하게 여길까 봐 아이의 능력을 숨겨놓는 것과 비슷하다. 자신의 부정한 짓이 드러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 두려웠을 것이다. 기원 자체가 확실한 근거가 없으니, 그저 지금 현상에서 보이는 교환체계의 효용성만으로 화폐의 기원을 설명하는 현대 경제학은 이런 은폐의 공로자다. 숨겨진 아이의 입이 가족들에 의해 막힌 것처럼, 마르크스의 입은 현대 경제학에 의해 막힌다.
아니나 다를까, 푸코가 강력히 지지했던 들뢰즈도 훗날 이 문제를 똑같이 꺼내 든다. 들뢰즈는 <천 개의 고원>에서 인류학자 클라스트르를 참조하여 원시사회가 전쟁을 통해 국가에 저항하는 집단으로 보는 것에는 동의한다. 즉 전쟁이 집단의 분산성을 유지하고 권력의 중심을 막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 집단을 ‘전쟁 기계’라고 부른다. 그에 비교해 국가는 이런 리좀적인 원시사회와 긴장 관계에 있는 ‘포획 장치’로 부른다.
그러나 들뢰즈는 클라스트르와 다르게 원시사회에는 국가로 향하는 메커니즘도 있다고 하면서 다소 다른 이야기를 한다. 원시사회는 항상 국가를 거쳐서야 서로 관계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 없이 원시공동체가 자급자족하고 자율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꿈에 불과하다는 것. 국가와 원시공동체들은 복잡한 네트워크 속에서 공존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국가는 점점 발전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원시사회 때부터 원시공동체들과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국가는 일시에 제국 형태로 출현하는 것처럼 보이며, 따라서 점진적으로 진화하는 요인들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어떤 장소에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마치 천재의 일필휘지처럼 보인다.”(들뢰즈-가타리, 『천개의 고원』 687쪽)
이런 국가론은 화폐를 보는 눈도 바꾸어 버린다. 들뢰즈는 국가가 원래부터 존재했고, 세금이 화폐를 만들었다고 묘파한다. 그러면서 그리스의 폴리스, 특히 코린트의 폭정과 관련해 화폐가 교환이나 상품 또는 상업의 요구가 아니라 세금에서 생겨났다고 설명한다. 코린트에서 금속화폐는 처음에는 생산자로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되었는데, 이들은 토지에 대한 권리를 사기 위해 이것을 사용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다시 토지를 팔면서, 화폐는 다시 부자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화폐는 언제나 권력 장치에 의해 분배되고 회수되면서 순환되었다. 교환은 외관상의 모습일 뿐이고, 화폐는 권력 장치의 한 수단이다.
푸코가 이 문제를 1970~1971년 강의에서 꺼내 든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한데, 먼저 하나는 60년대 <말과 사물> 이래로 푸코는 명백히 담론의 철학자였다. 경제나 정치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기보다, 문서고로부터 언어적 담론이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지를 탐구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물론 그게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론적 결과물만 놓고 본다면 비-담론적이고 실천적인 주제들과는 분명히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이 강의를 통해서 지식의 문제와 정치경제적 실천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며 연결하기 시작했다. 좀 새삼스럽게 말하면 이 강의 이후 지식과 권력이 맺는 관계에 관한 오랜 탐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제 의문 시 되는 것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지식이 실천 과정에서 순환하고 기능하는 방식, 그리고 권력과 맺는 관계이다. 훗날 그는 이것을 대상화하여 ‘지식의 제도’(régime du savoir)라고 부른다(미셸 푸코, <왜 권력을 연구하는가 : 주체의 문제>, 1982).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제 그는 동태적인 것에 시선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말과 사물』과 『지식의 고고학』까지 그는 에피스테메 공간을 상정하고 정태적인 구조에 더 관심을 기울여 왔다. 푸코는 내부에 유폐된 칸트적 주체 구조를 ‘인간학적’ 사유라고 부른다. 그가 칸트와 다르게 접근하려면 ‘바깥’으로 나와야 했다. 그 결과 인간은 외부의 언어적 담론 공간에 의해 구성된다는 주장을 도출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다른 공간으로 변화해 움직여 가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즉, 바깥으로 나간다고 해서 세상이 바뀔 방도를 찾은 것은 아니다. 이제 외부에 의해 내부를 탈구축하기 위해서 비-담론적이고 정치경제적 실천들을 탐색하고, ‘변환’를 추적해야 했다. 그 전까지 작업을 ‘칸트의 외부화’라고 한다면, 이제 그는 ‘칸트의 니체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지식의 제도’ 탐구와 ‘칸트의 니체화’, 이 두 가지가 바로 앞에서 말한 “지식의 의지의 ‘정치경제학’”이라는 말로 수렴되고 있었다. 그는 고고학의 조율을 끝내고, 본격적인 계보학 연주를 향해 서서히 건너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변화를 실행하려고 하면 좀 난감하기도 했을 것이다. 지식의 구조를 찾아 서술하는 것은 발품을 팔아 문서고를 뒤지면 될 것이다.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면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일정한 성과를 가져올 수는 있다. 자료와 싸우는 일이니까. 그러나 지식의 구조가 제도 안에서 비-담론적으로 구성되는 과정을 확인하는 작업이라든지, 구조가 탈구축되고 다른 모습으로 변환하는 과정을 힘-관계를 통해 역동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치과에 가서 치료를 받을 때, 가끔 마취가 치료 도중에 풀리는 경우가 있다. 풀리자마자 아주 과격한 아픔이 몰려오는데, 정신의 영역에서도 관념적인 상태에서 실제적인 상태로 변화하는 순간 바로 이런 아픔을 동반하지 않겠는가. 칸트의 다락방에서 니체의 정글로 들어가는 것, 그것은 치료 중에 마취가 풀리는 것과 비슷하다.
디카이온의 탄생, 지식을 끌어당긴다
그렇다면 화폐의 출현이라는 정치·경제적 사건이 어떻게 강의의 제목인 ‘지식의 의지’와 연관되는 걸까. 담론적인 것과 비-담론적인 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실제가 구성되는 것일까.
푸코는 이를 호메로스 혹은 소피스트의 세계와 헤시오도스 혹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의 대비 속에서 서술한다. 소피스트의 세계에서는 진실을 파악할 때 사실 자체를 굳이 규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진실은 서약 된다. 어떤 사건을 둘러싸고 맹세와 저주로 진실이 확정된다. 그러다 보니 참된 발언이라는 것이 실증적으로 봤던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거나, 다르게 보이더라도 결국 미래에 신들이 분노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좌우된다. “안틸로코스여! 그대 제우스의 양자여! 어서 이리 나와 관례에 따라 대지를 떠받치고 대지를 흔드는 신에게 맹세하시오. 그대가 꾀를 써서 일부러 내 전차를 방해하지 않았다고 말이오.”(호메로스, 『일리아스』, 636쪽)
이 세계에서는 세상사 대부분이 결론 따위 없다. 특히 중대한 사태일수록 더 그렇다. 진상은 갈수록 혼탁해지고 어지러이 내달린다. 결론은 점점 멀어지고 이리저리 갈린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이 세계에서는 위험을 감수하는 자에게는 참된 발언이 나타나지만, 위험을 거부하는 자는 참된 발언으로부터 멀어진다는 믿음이 형성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표면적으로 제3자의 개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신은 결정하는 자가 아니다. 당사자들의 맹세로 미래에 참된 것으로 증명될 뿐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옳지 않은지 점점 더 알 수는 없지만, 진실은 결코 앞서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지대에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투성이다.
그러나 소피스트의 세계를 위험하다고 여기는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세계는 이를 몰아내기 위해서 새로운 유형의 판결, 소송 절차, 선고를 이전의 원초적인 형태 옆에 출현시킨다. 즉, 어떤 사안에 대해서 제3자가 결정하는 ‘크리네인(κρίνειν, krinein, 결정하다, 판단하다)의 체계’가 출현한다. 이제 제3의 재판관이 무대에 등장한다. 재판관은 진실을 이야기해야 하고, 이제 그는 소송인들과 똑같이 신들의 복수에 노출된다. 바로 제삼자의 언표행위가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이제 사법 담론과 실천의 전혀 새로운 배치가 발생한다.
여기서 크리네인과 함께 공정한 것, 즉 디카이온(δίκαιον, dikaion)이라는 새로운 관념도 동시에 출현한다. 어떻게 제3자가 공정하게 결정할 것인가. 또 어떻게 결정된 것을 공정한 것으로 이해시킬 것인가. 소피스트 혹은 호메로스 시대에 진실을 결정하는 ‘맹세-결정’의 재판이 헤시오도스 시대에 와서 무엇이 진실인지 사태를 측정하고 확인하는 ‘측정-판결’의 재판으로 대체된다. 동시에 맹세를 통해 도전하여 진실이 아닌 경우 신이 내린 시련을 감수하겠다는 ‘시련 재판적 진실’을 측정 가능한 진실을 통해 파악하는 ‘진리-지식’이 대체한다. 쉽게 말하면 신들이 벼락을 치거나, 신들이 보호해주는 진실에서 벗어나, 우리가 ‘보고 알고 있는 지식’에 따른 진리가 판결을 내린다. 이제 크리네인은 디카이온(정의)에 속해야만 공정한 것이다. 이 지대에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란 없다. 사람들은 깔끔하게 수용할 수 있는 정보를 기대하고, 기대한 만큼 명쾌한 결론이 기다린다.
호메로스 시대의 맹세-결정 재판에서는 규칙이나 관습, 제우스의 법령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했다. 공정하다는 것은 그 규칙들을 적용하고 진실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헤시오도스 시대의 크리네인에서는 계절이 돌아오는 시기마다 반복되는 낮의 길이, 우기의 기간 같은 기억이 중요하다. 계산이 가능한 기억과 기록이 중요해졌다. 왜냐하면, 객관적으로 눈에 보이거나, 척도를 통해 증명 가능해서 명쾌한 결론을 내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척도와 질서에 대한 지식이 결정적이다. 사물의 순환, 달력의 순환 속에서 반복되는 진리를 알아야 하고, 그 반복된 진리를 잊지 않기 위해서 기록하는 것은 중대한 행위가 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날과 날짜의 진리, 적절한 때의 진리, 별의 이동과 합의 진리, 기후, 바람, 계절의 진리, 다시 말해 어떤 우주론적 지식 전체이다. 이 지식은 세 가지 커다란 유형의 지식을 발전시킨다. 날과 별을 관찰하고 주술에 활용하는 지식, 양 및 측정에 관한 전문지식, 기원에 관한 신화-종교적 지식. 이 세 지식은 국가기구가 비교적 발전한 사회에서 권력 행사와 연결됐다. 디카이온과 크리네인은 서로에게 의존한다. 개념들도 작업 동료처럼 호흡을 맞추는 게 쉽지는 않다. 아마 이 두 개가 사람들처럼 궁합이 잘 맞는다는 말일 것이다. 크리네인이 알아서 해달라고 맡기면 디카이온은 상황에 딱 맞게 맞추어 준다. 서로 일 처리는 전혀 삐걱거리지 않는다.
화폐의 탄생, 폭력을 잠재우다
그런데 여기에 중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만일 인간의 정의가 사물의 진리를 세세히 따르는 것이라면, 이 질서는 호메로스 시대의 제우스 법령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 다를 바 없다는 점, 이게 매우 핵심적이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을까,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런 눈속임이 세상을 바꾸기는 하는 건가, 하고 머리를 긁적이게 될지도 모른다. 같은 것을 다르게 작동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호메로스의 정의에서 헤시오도스의 정의로 변환되는 데에는 어떤 작업이 필요한 걸까?
같은 것으로 세상을 다르게 만들어내는 방식은 무얼까. ‘제우스의 법령’이 원리상 등가인 ‘세계의 질서’로 향하기 위해서 헤시오도스의 정의는 최고권의 완전한 양도를 요구한다. 즉, 천상의 제우스 법령을 세속적이라고 할 ‘세계의 질서’로 바꾸는 데는 정치적 권력을 양도하는 것이 필요했다.
아마 지중해의 권력자들은 공동체를 관리하고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그 공포 속에서 하늘과 바다가 뒤섞이는 정도의 변환을 상상해야 했다. 이 공포 속에서 화폐가 등장한다. 선물이나 증여 형태로 화폐를 분배함으로써 빈자들이 지나치게 궁핍해지는 것을 피하게 한다. 동시에 기준을 세워서 부자들이 일정한 한도 이상의 탐욕과 과잉소유를 막는다. 이 의미에서 화폐를 도입하는 자는 사회 갈등을 조절하는 자이다. 솔론처럼 당파들 사이에 경계처럼 버티고 서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조절하는 자. 화폐를 통해 질서와 정의가 공동체를 지배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화폐는 빈자와 부자의 정치적 폭력을 피할 수 있게 해주었다. 화폐는 부자들에게 약간의 경제적 희생을 하게 하고, 대중들에게 정치 권력을 분산시켜줌으로써 토지와 부의 대부분을 지킬 수 있도록 보장한다.
이제 중요한 변화, 지식의 의지가 지배하는 변화가 시작된다. 참주든 입법자든 권력을 보유한 자는 도시의 측량사가 되어야 했다. 희랍의 측정 역량은 대상을 산정하고 양화하고, 등가 체제를 구축하고, 비율을 탐구하고, 적정하게 분배하는 대규모의 사회적, 다형적 실천이 된다. 이 측정 실천의 핵심에서 화폐 제도가 출현하고 있었다. 즉, 화폐는 질서와 정의가 지배하도록 하며, 얼마를 지불해야 하는지,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에 관한 ‘진리’를 세울 수 있게 해준다. 그 진리는 조세나 징수, 축적과 배분의 정도를 정해주는 국가 제도를 만들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계급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참 당돌한 순환이 아닌가. 토지 불균형이 생겼다.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긴장이 발생했다. 부자들은 생각했다. 자신의 재산은 유지하되, 상대를 진정시키기 위해 나눠줄 게 뭐가 없을까. 정치 권력이 있다. 정치 권력을 나누어 주자. 대신 재산은 아주 조금만 희생하면 큰 틀에서 밑지는 장사는 아니야. 그렇게 하려면 무슨 장치가 필요하지? 그래 화폐를 이용해서 재산을 나누었다가, 다시 거두어들이면 되지. 그렇게 거두어들인 화폐로 사실은 정치 권력도 다시 거두어들이는 꼴이 되는 거지. 부자들의 사유는 삶의 끄트머리에 있는 빈자들을 권력과 부의 게임 안에 들어서도록 화폐를 고안해낸다. “화폐 아래에서 발견되는 것은 추상적이고 기호학적인 기호의 형상이 아니라 권력과 부 사이에 작동하는 모상의 광채이다.”(강의록 228쪽)
양도의 관점에서 새로운 유형의 정치적 권위가 세워지고, 화폐 측정이 보편화하며, 사물과 시간의 지식에 관한 탐구가 중요해지기 시작한다. 이윽고 과학적 인식이 서서히 탄생했다.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실천이 결합하면서 새로운 공간이 구성되고 있었다. 화폐의 출현이 새로운 유형의 권력을 구성하게 된다. 화폐는 늘 정치 권력의 비상한 형태와 동시에 출현했다. 사실 화폐의 효용성은 여기에 있다. 그것은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은폐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광채를 발한다.
사실 기원전 화폐 이야기는 과거의 일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사버리고 여분의 에너지는 돈으로 할 수 없는 것에 집중한다는 것. 자본주의는 그런 일을 해결해준다. 그런데 무시무시한 일이 그 순간 비로소 벌어지는데, 이 화폐의 전면화는 그 여분의 에너지를 다시 회수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재생산한다. 자기계발이나 레저, 그리고 엔터테인먼트란 게 그런 귀결인데, 화폐의 초월적 권력이란 바로 그런 실증적 조건 속에서 현대에도 다시 탄생한다. 이제는 누가 하라고 하지 않아도 화폐에 의해서 그런 권력이 작동하게 되었다. 정치경제적 배치가 화폐를 탄생시키고, 동시에 그것을 깔끔하게 하는 지식을 산출하는 의지를 구축한다. 그리고 그 결과들인 과학적 진리가 방향지워진 정치경제적 배치를 증폭시켜서 완전한 순환체계를 완성한다. 이 능청스럽고, 치열하며, 철면피의 움직임은 끝없는 미로 같아서 은폐에 은폐를 거듭하여 마침내 우리의 본능이 되어버렸다.
지식의 의지를 거스르는 공부
일요일 오후, 오랜만에 긴 산책을 했다. 땀으로 범벅인 채 음료수를 사서 야외테이블에 앉았다. 그런데 뒤 테이블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나이 지긋한 부부가 약간 다투는 투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다정해 보였다. 다투는데 다정해 보인다니. 남자는 머리가 벗어져 머리카락이 몇 가닥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남은 머리카락을 연신 위로 올리며 상대 말을 반박했다. 반박하는 소리가 벗어진 머리와 함께 전해져와 인생 자체가 닳아 가는 느낌이 들었다. 점점 더 가벼워지는 존재처럼 그의 말도 조곤조곤 조용했다. 여자도 약간은 무미건조한 톤의 목소리였는데, 이를테면 상대가 열심히 이야기하면, 그러던가 말던가, 나는 뭐든 당신 하자는 방식은 좀 이상해, 하는 태도였다. 멀리 구름을 보며 자기 이야기를 별일 없다는 듯 이어갔다. 그러나 남편 이야기를 무시하거나 싸우자는 투는 아니었다. 그냥 할 일이 없으니 내가 상대해주마, 하는 정도의 놀이, 그러니까 시간을 보내는 놀이처럼 보였다.
십여 분 듣다 참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의 조용한 이야기와 상대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정처 없는 시선과 맞물려 별 내용도 없이 흩어졌다. 그 테이블에는 사람이 사라진 것처럼 텅 비어 보였다. 닳아 가는 에너지, 무미건조함, 구름처럼 이리저리 떠밀리며 부유하는 대화. 머리카락만 몇 가닥 남아서 조곤조곤한 대화를 붙잡고 있었다.
나는 이것을 ‘언어의 물질성이 과잉인 대화’라고 명명해 보고 싶다. 이를테면 대화자들이 서로 언어를 주고받지만, 상대의 이해나 진실의 공유 같은 그 흔한 ‘대화의 목적’은 없고, 단지 말들이 이리저리 티키타카를 하는 모습. 도무지 참된 결론에 도달하려는 목적은 애당초 없고, 그만둘 때가 되어 한쪽이 그만하자 할 때까지 할 일 없이 논박하고 있었다. 정작 말하는 주체 자체는 대화의 언어로부터 떨어져 나가 있었다. 언어가 무대의 주인공이고 주체는 사라진 상태였다. 그래서 더욱 주체는 사라져가는 것 같고, 말들은 갈수록 활기차가는 대화. 대화가 이어지기를 바라는 대화의 가면극. 다툴 주체가 없으니, 다투지만 다투는 게 아닌 대화.
딱히 그들의 얘기를 들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애당초 너무 지쳤기 때문에 들리든 안 들리든 무관한 일이었다. 그러나 말이 계속 다가와 내 귀를 잡았다. 정작 이야기를 한 사람들은 사라진 듯한 엉뚱한 상황인데도 말이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 이야기를 나름 집중해서 들었는데, 그 이야기의 줄거리며, 세밀한 뉘앙스를 재현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다만 그 말에는 마치 육체를 가진 듯 꾸밈이 없었고, 탁구공처럼 활기찼다.
혹시 내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글쎄, 그건 아닌 것 같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남자가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당신은 걱정하지 말고. 그게 문제가 되면 내가 가서 책임질 건 책임지고, 따질 건 따지지. 큰 문제 없을 거야”라고 말하고 대화는 끝이 났다. 그들은 툴툴 털고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듯이 천천히 걸어 화창한 거리로 걸어 나왔다. 그들은 손을 함께 잡고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다정함이 서려 있었다. 저들은 서로를 논박하면서 누군가 옳다고 결론을 내린 걸까. 그러지 않은 것 같다. 아니, 옳다, 그르다, 그런 게 문제이긴 했을까. 그들은 그저 상대와 이야기하고, 때가 되면 누군가 알아서 대화를 마무리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 같았다.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딘가 모르게 진실이란 모양이 정해지지 않은 채 말들과 함께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군가가 정해서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중에 만들어지고 스며드는 진실. 어느 한쪽이 책임질 건 책임지고, 따질 건 따지면 되는, 그걸로 끝이 나는 진실. 두 사람 사이에 모든 것이 끝나고 손을 잡고 걸어 나가는 진실. 그러나 누군가 저들 사이로 들어가서 진실의 이름으로 판단하고 옳고 그름을 정하려는 순간, 아주 다른 냉정한 세계가 펼쳐질 것이 분명했다.
푸코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저 두 세상 사이의 변환이 정치경제와 지식 사이 연합 속에서 치밀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서두에서 말한 공부도 지식의 의지가 어떤 조건에서 생성되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공부가 되는 것 같다. 누군가 정해놓은 규칙을 공부하는 의지인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진실을 향한 모험의 의지인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놀이 같은 논박을 통해 우리 몸으로 스며드는 진실인가. 그게 무엇이든, 우리에게 어떤 모양의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억지로 공부한다’가 분명 맞는 것 같다. 왜냐하면, 기존에 나를 다스리던 ‘지식의 의지’를 거스르며 공부하는 것이 진짜 공부일 테니까.
글_약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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