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사물』
에피스테메, 아이러니한 주체탐구의 출발
세계는 취약하고 위태롭다
숨이 콱콱 막힐 듯한 오후의 햇살이다. 고등학교 시절, 고향 집은 바다와 가까웠다. 여름 방학에는 오후 두 시만 되면 해변에 나가 저녁때까지 바다를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별로 하는 일 없이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겼다. 들고 간 라디오를 듣고, 꾸벅꾸벅 졸음이 오면 그대로 돗자리에 누워 잤다.
그러다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깨면 바다에 들어가 실컷 헤엄을 쳤다. 그리고 올라와 모래 속에서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뒹굴었다. 대부분을 그저 멍하니 보냈다. 살갗을 햇볕에 태우고 헤엄을 치고 라디오를 듣고 잠을 잤다. 나미의 ‘빙글빙글’이나 김완선의 ‘오늘밤’ 따위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뒹굴다 마치 하루를 잘 활용한 듯한 마음이 되면 돗자리를 말아 들고 민물에 대충 씻어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고 나면 식욕이 따발총을 쏘듯 굉장해져서 엄마가 해준 기름진 음식을 우걱우걱 모두 배에 집어넣고는 이내 잠이 들었다. 방학 내내 오후면 그렇게 살았으니까, 방학이 끝나고 나면 온몸이 시커먼 사람이 되었다.
그때 그 바다에서 나는 참 많은 상상을 했다. 바다와 하늘이 뒤집히면 바닷물이 폭포처럼 쏟아질 것이다. 그러면 빨리 바다를 뒤따라 가서 헤엄쳐야지. 뒤집힌 하늘을 둥둥 떠다니겠네. 새들은 어떻게 될까. 그들도 날긴 날아야 할텐데...아, 땅 밑을 날겠군.
또 파도가 빠져나가면 파도가 털어놓은 조개나 게를 보고서, 마치 바다가 내게 전언을 남기기 위해 떨구어 놓기라도 한 듯 그것들을 잡아다가 말하라고 다그치기도 했다. 그렇게 상황극이 깊어지면 나는 말들이 시꺼먼 해변 모래 밑에 미라처럼 깊이 파묻혀 있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언어는 한없는 적막감 속에 미라처럼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른 채 바다와 모래에 잠겨 있다. 그러다가 게나 조개나 해파리가 그 말을 하나씩 물고서 해변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걸 알아챈 내가 귀 기울여 그들의 말을 들어보려고 하고.
그러나 그렇게 잘 숨어 있던 것들이 바다가 뒤집히면 바닷물과 함께 폭포처럼 떨어져서 갈길 모른 채 세상을 돌아다니겠지. 대체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언어들도 어쩐지 나와 똑같은 존재일지 모른다. 언어들도 폭포처럼 바다 위에 올라타서 나와 함께 하늘을 둥둥 떠다닐 거야. 그러고 보면 아마도 추상 수준에서 생각했던 것들이 모조리 바위틈, 파도 거품 속, 모래 알갱이들 사이에 숨어 있다. 꿈이며, 사랑이며, 기쁨이며, 철학이며 그런 따위들이 말이다.
그런데 그런 모든 것이 뒤집혀서 자기 위치를 놓쳐버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혹시 뒤집힌 공간이 되돌아갈 수도 있으니 땅에 딱 붙어 있어야 할까. 그러나 별수가 없다. 공간이 뒤집히면 거기 붙어 있던 존재들은 모조리 하늘로 떨어져 버릴 것이다. 얼굴 없는 사람들, 모양 없는 사물들, 의미 없는 말들이 될 것이다. 거대한 허무가 연이어 펼쳐질 것이다. 그만큼 이 세계는 취약하고 위태롭다.다시 공간이 제자리로 돌아와 바뀌어도 그것들은 허무 속을 둥둥 떠다니다가, 그 전 일은 모두 잊어버리고 새 공간에 들어가면 어찌할 줄 몰라 하겠지. 내가 왜 기쁨이지? 내가 왜 사랑이지? 내가 왜 철학이지? 여긴 어디지?
그러면 끝이다. 아마 눈 깜짝할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지금 여기 있는 것들과 좀 더 친해져야겠는걸. 누가 알아? 뒤집힐 때 그것들과 친해 두면 서로 같이 살 방도가 또 있을지. 아니면 사라질 때 같이 말동무라도 될지.
에피스테메의 방에 들어가다
『말과 사물』은 에피스테메에 관한 글이다. ‘에피스테메(épistémè)는 그리스어이다. 그리스어에서 에피스테메(ἐπιστήμη, epitstēmē)는 억견(臆見)이라는 뜻의 독사(δόξα, doxa)에 대비하여 ‘참된 진리’를 가리킨다. 독사가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한 말, 보기에 따라서는 억지스러울 수 있는 말이라면, 에피스테메는 그와 달리 참된 진리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믿게 되고 당연시되어 내 몸과 마음이 스스로 따르게 되는 말이다. 어느 순간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어 의식하지 않아도 작동하는 진리이자 우리를 주관하는 진리의 말들. 이런 당연함이 오랫동안 지속하면 말할 때 입술을 잊는 것처럼, 에피스테메는 잊힌다. 생각의 행보가 사람을 끌고 다닌다면, 아마 에피스테메가 딱 그것이리라.
그런데 푸코에게 와서 에피스테메는 그 뜻은 그 뜻인데 좀 다른 각도에서 그 뜻이 된다. 그것은 지식이 활동하기 위한 무대 혹은 공간, 어떤 하나의 진리 질서를 갖추어 돌아가는 공간의 의미가 된다. “하나의 문화에서 어느 특정한 시기에는 하나의 에피스테메만 있을 뿐인데, 그것은 이론으로 나타나는 지식이건 실천에 조용히 스며들어 있는 지식이건 간에 모든 지식의 가능 조건(les conditions de possibilité de tout savoir)을 결정한다”(<말과 사물> 6장)
어쩐지 그 공간은 카프카의 소설에 나올법한 방 같아 보인다. 방구석에 윙윙대며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 한 대, 그리고 별다른 장식도 없이 하얗게 색을 바른 벽에다 서랍 달린 작은 붙박이 장롱이 있을 뿐인 공간. 그리고 서랍에는 생활 도구들과 몇 권의 책이 있다. 작은 창으로는 과일나무 잎사귀가 걸쳐 있고, 그 사이로 보이는 하늘.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도, 창 안에 있는 흰 벽도 마치 표백된 것처럼 청결하다. 얼떨결에 들어갔지만, 여기 왜 들어왔는지 영문도 모른 채, 이제 한동안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할 것만 같은 그런 방이다. 이제 여기서 온갖 사건이 일어날 것이고, 그것에서 전혀 벗어나지는 못할 것 같다. 한동안 여기서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
푸코의 에피스테메 개념에는 푸코가 싸우고자 했던 칸트 개념인 ‘아프리오리(a priori, 선험)’가 깊이 서려 있다. 칸트에게 ‘범주’는 경험에 앞서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아프리오리 조건’이다. 예컨대 목걸이를 바라볼 때 미국에서 바라보든, 한국에서 바라보든 그것은 단지 목에 거는 장식품으로 표상될 뿐이다. 아마 눈을 감으면 미국인이나 한국인이나 똑같은 모습으로 머릿속에 떠올릴 것이다. 이때 목에 건다는 목걸이의 표상 이미지는 자명하다. 이 관점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인정될 목걸이 구성요소와 순도 따위 지식이 가치가 있다. 칸트에게 이 아프리오리는 초역사적이며, 초공간적이다. 여기든 저기든, 그때든 지금이든 일관되게 인간을 규정하는 조건이다.
그러나 푸코는 이 개념을 특정한 공간, 특정한 시간으로 한정시키며 ‘역사화’한다. 그러니까, 경험에 앞서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는 점은 칸트와 똑같은데, 그게 언제 어디서나 똑같지는 않으며, 어떤 특정 역사 국면에서만 그런 조건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 의미에서 푸코의 에피스테메는 ‘역사적 아프리오리’이다. 미국 해변 어느 인디언족에게는 일반적인 미국인과 달리 어떤 목걸이는 공동체를 묶어주는 평화의 상징으로 표상되어 구성원들은 감히 만지지 못하는 물건으로 인식된다. 똑같은 대상이어도 시대마다 다른 의미, 다른 지식을 지닌다. “아프리오리(선험적 조건)는 어느 특정한 시대의 경험에서 가능한 지식의 장(champ de savoir possible)을 잘라내어 거기에 나타나는 존재 방식을 정의하여 일상의 시선을 이론의 역량으로 무장시키고, 사물에 대해 진실로 인정되는 담론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을 정의한다.”(『말과 사물』 5장 번역은 인용자가 수정)
이 ‘잘라낸 지식의 장’이 바로 우리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아프리오리한 공간이다. 그곳은 카프카의 방이 여러 개가 있을지언정, 모두 모여서 회합을 할 수 있는 홀은 없는 아파트다. 누가 들어오고, 누가 나가는지, 심지어 들어온 사람도 왜, 어떻게 들어왔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아파트의 여러 방. 아마 그 방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단지 사건이 일어나고 있으니 눈을 치우듯 살아내는 중이다. 서랍에서 도구들을 꺼내거나, 책에 쓰인 말들에서 영감을 받아가며 어쨌든 살아내고 있다. 내가 다른 방 사정은 전혀 알 바도 아니고, 알 수도 없다.
담론의 공간, 괴물들의 무언극 무대
『말과 사물』의 푸코는 칸트의 인식 가능 조건을 인간 밖에서 찾는다. 인간 두개골 안에 어떤 인식 구조가 있다고 여겼을 칸트와 달리 푸코는 인간 밖에 있는 공간으로 에피스테메를 상상했으니까, 칸트와 달라도 아주 다르다. 그런데 앞에서 본 것처럼 칸트의 인식 가능 조건을 구성하는 요소와 프로세스를 명시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칸트에게 시간과 공간은 감성의 형식이다. 이 형식 아래에서 지각이 이루어진다. 물론 이 형식이 인간 내부에 있다고 여긴다. 푸코는 이 형식 요소들과 프로세스를 인간 밖에 있는 ‘담론’으로 바꾸어 놓았다. 초기 고고학 단계에서 언급되던 개념 ‘에피스테메’가 결국 나중에 계보학 단계로 가면 ‘장치’라는 개념으로 바뀌긴 하지만, 그것이 칸트식의 요소와 프로세스를 모두 버리고 새롭게 구축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푸코는 칸트주의를 이용한 반(反) 칸트주의자, 뒤집힌 칸트주의자이다.
이 지점에서 푸코의 상상은 기묘하다. 지식을 지식으로서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가능 조건, 그것은 바로 인간 밖을 휘젓고 다니는 ‘담론’이다. 주체 밖에서 주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규정하는 무엇이 작동한다는 생각은 데카르트나 칸트 같은 인간주의자들에겐 참을 수 없는 생각이다. 인간이 주체적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움직이고 있지 않다니. 내가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다니. 오히려 우리가 만들어낸 담론이 거꾸로 나를 움직인다니. 어떤 이상한 되먹임이다. 이렇게 밖에서 작동하면서 우리를 움직이고 있는 지식 담론을 그는 에피스테메라고 부른다.
이것은 괴물들의 무언극을 보는 느낌이다. 내가 말을 한다. 말들이 공간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내가 모르는 틈에 조용히 뭉쳐서 괴물이 된다. 말들의 괴물이 공간처럼 내 머리를 둘러싸서 내 생각과 지식을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텅 비었던 카프카의 방에 어느 순간 내가 뱉어낸 말들이 괴물이 되어 나와 동거를 시작하고, 마침내 나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 방을 휘젓는다. 이제 그 말들이 공간 그 자체가 된다. 말의 공간이자 에피스테메의 방. 그리고 텅 빈 나.
이 지점, 언어의 괴물이 방안에 우글거리기 시작한 이 지점은 완전히 새로운 지점이다. 당시 구조주의자로서 푸코에게 언어 없이는 세계도 없다. 다시 말하면 언어가 없으면 사물도 없다. 언어의 괴물이 담론이고 그 담론으로부터 되먹임처럼 내 생각과 지식이 생성된다. 급기야 내가 이 방의 주인이라는 소유권도 잊어버린다. 이 지경에 이르면 우리는 그 방이 속해 있는 실증성들의 체계(système de positivités)에 의해 매우 두텁게 뒤덮여 있어서 원래 내가 이 방에 들어왔다는 생각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방이 부여한 생각대로 나와 세계를 이해하고 살아간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굉장히 기묘하고 아름다운 장면이기도 하다. 텅 빈 카프카의 방, 내가 말을 하기 시작하고, 그 말들이 괴물같이 공간 그 자체가 되며, 그 공간이 내 앎을 만들어내고, 그 앎들이 나를 그 방에서 살아내게 하는 것이다. 심지어 말들이 만들어낸 사물들로 그 방이 발 디딜 틈 없이 복잡해지고 아름다워진다. 서랍 생활 도구로 창문 밖 과일을 따고, 잎사귀를 뜯어내 이불을 만든다.
아이러니한 주체탐구의 출발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당시 푸코는 왜 저 아프리오리 조건을 인간 밖에서 찾고, 그리고 특별히 그것을 언어라고 생각했을까. 공간적 형상이라면 실체적으로는 건축도 있고, 자연도 있다. 만일 추상적 공간 형상을 들었어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었다. 과학, 국가, 공동체, 사회, 자본 등등. 그런데 하필이면 언어였을까. 다음 글을 읽어보자.
“인간을 이 세 학문에 ‘노출시키면서’ 언어학은 인간이 스스로 인식의 대상이 되도록 돕는다. 이렇게 우리 눈앞에서 인간의 운명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꾸로 달려가고 있다. 이상한 방추(紡錘)에 감긴 채 그것은 애초에 자기가 태어났던 형태로, 또는 자신의 존재를 가능케 했던 고장으로 다시 인되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종말로 그를 인도하는 방법이 아닐까? 왜냐하면 언어학은 정신분석학이나 민족학이나 마찬가지로 더 이상 인간 그 자체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말과 사물』 9장. 강조는 인용자)
『말과 사물』을 주체의 탐구라고 이야기하면 다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 것이다. 르네상스로부터 시작하여 고전주의를 거쳐 근대에 이르는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에 어디 주체의 ‘주’자라도 있느냐고 할 것이 분명하다. 더군다나 인간주의자이자 주체 중심의 철학자인 사르트르와 일전을 불사한 이 책이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만일 『말과 사물』을 현재의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되었느냐를 추적한 책이라고 말하면 어느 정도 수긍한다. ‘지금의 나’가 왜 이렇게 살게 되었느냐고 묻는 책. 이 관점에서 이 책을 이렇게 비평하면 어떨까. 주체 밖에서 주체에 가하는 힘에 관한 탐구가 이제 막 서장을 열었고, 그 첫 장면이 바로 에피스테메였다고 말이다.
푸코는 이 첫 장면을 기어코 언어와 함께 연다. 그는 ‘나는 말한다’라는 발화와 연결하여 주체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에피스테메를 아주 묘한 곳으로 옮겨 놓았다. ‘나는 말한다’고 말하는 발화 주체는 매우 모순되게도 담론의 책임자가 아닌 것 같다는 의문이다. 그러지 않겠는가, 주어 동사가 있으니 맞는 문장인데, 의사소통할 아무런 정보나 의미를 갖고 있지 않으니까. 단지 나는 말한다고 독백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니다. 이건 마치 고대에 ‘나는 거짓말한다’와 같은 상황이다. 이 말을 하는 사람이 거짓말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진실 그 자체를 뒤흔들어버리므로 이 말은 진리가 비어 있음을 증명한다. 마찬가지로 ‘나는 말한다’는 발화하는 주체가 이런 말을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므로 대체 ‘나’는 뭔가라고 의심하게 된다.
푸코는 이 관점에서 주체가 하나의 ‘비존재’(inexistence)로서 언어가 무한정하게 유출되는 ‘공백’(vide)일 뿐이라고 말한다(『미셸푸코의 문학비평』, ‘바깥의 사유’). 주체는 텅 비어 있고, 이 주체를 둘러싼 바깥에 언어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바깥의 언어들이 텅 빈 주체로 진입해서 그를 통해 유출된다. 말함으로써 주체는 비어 있음이 증명된다.
푸코는 주체 중심의 인간주의를 비판했다. 칸트니 사르트르니 하는 인간주의 관점에서는 내면에 아프리오리 조건이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푸코가 보기에 인간-주체는 단지 텅 비어 있다. 그 텅 빈 주체를 통해 언어가 유출될 뿐이다. 여기에 아주 이상한 아이러니가 발생하는데, 주체를 통해 발화되는 순간, 주체는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발화함으로써 텅 비었다는 게 드러나는 주체의 아이러니다. 그렇다면 언어는 주체가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것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 뒤편에 조그만 폐가가 있다. 그런데 그 폐가 옆으로 등산로가 있고,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다. 그 주위로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피는데, 이상하게도 꽃이 피면 그 집이 더 폐허처럼 보였다. 주체가 그런 느낌이다. 말을 발화하면 할수록, 만발하는 언어의 아름다움이 커지면 커질수록, 주체는 더욱 비어 있음이 드러난다. 햇볕이 잘 드는 벽에 씻은 유리를 꺼내 말리면, 너무 투명해져서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마치 주체는 물을 만난 소금이 소멸해서 흐트러지듯이, 언어에 의해 소멸하여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언어는 발화 주체가 사라지는 바깥으로 이끌어간다. 그래서 서구 사유는 오랫동안 언어의 본질을 검토하는 것을 피해왔다. 적나라한 언어, 특히 ‘문학’은 ‘나는 존재한다’는 확신과 자명성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내 현대에 이르러 언어학의 세계가 열렸다. 마치 주체의 존재를 깨뜨리기 위해 다가온 망치처럼. 언어라는 에피스테메는 인간-주체가 텅 비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푸코가 찾아간 길이다.
내게 주어진 방은 어떤 방일까. 에피스테메의 괴물들은 어떻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을까. 바로 앞에 무덤이 있는 야산이 보여서 그리 전망이 좋지 않지만, 그래도 한끝에 나무들이 울창하게 있고, 가끔 아침 일찍 일어나면 아침놀이 보인다. 오래도록 그대로 둬서인지 구석에는 찢긴 벽지가 보이고, 군데군데 얼룩져 있다. 창틀에는 닦이지 않는 먼지들이 쌓여 있다. 낡은 침대와 오래된 커튼. 당시의 푸코는 주체를 소멸시키고, 방이 되어버린다. 아마 나는 이 방의 벽지일 테고, 창틀일 테고, 커튼일 테다. 그러고 보면 내가 바뀌는 것은 이 방을 바꾸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바다에서 위태롭다 여겼던 하늘과 바다의 뒤집힘이 이제는 필요하다. 에피스테메의 푸코는 어떻게 미래의 푸코가 될 것인가. 그의 주체탐구는 소멸로부터 시작해서 이제 막 등정을 시작하였다.
글_약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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