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목소리, 시인의 언어와 철학자의 언어(13)
철학자로서의 노자(1) _ 통치철학으로 읽다
『노자』를 철학으로 읽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왕(혹은 지배계급)을 대상으로 통치철학을 밝힌 책으로 보는 것이다. ‘하상공주’가 그렇게 접근한 대표적인 주석이라고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구체적인 사례로 두 장을 들어 어떻게 정치로 연결되는지 보여 주는 게 최상일 것 같다.
23장을 보자.
왕필본:“말이 적은 것이 본래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사나운 바람은 아침 내내 불지 않고 소나기는 종일 내리지 않는다. 무엇이 이렇게 하는가? 천지다. 천지도 오래 지속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는가.”[希言自然. 故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孰爲此者? 天地. 天地尙不能久, 而況於人乎.]
백서본:“말이 적게 하고 본래 그대로 두어라. 사나운 바람도 아침 내내 불지 않고 소나기도 종일 내리지 않는다. 무엇이 이렇게 오래 할 수 있겠는가? 천지도 오래 지속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는가.”[希言自然. 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孰爲此者? 天地 天地而不能久, 又況於人乎.]
왕필본과 백서본은 약간의 글자 출입이 있는데 노자 천체의 사고틀에서 생각해 보면 백서본이 왕필본보다 명백해 보인다. 왕필본은 “무엇이 이렇게 하는가? 천지다.”[孰爲此者? 天地.]라고 말하는데 이 말에서 천지는 사나운 바람과 소나기를 내리게 하는 주재자로 해석하게 된다. 노자의 사고에서는 천지가 천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관하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일 수 없다. “천지는 도를 본받고 도는 본래 그대로의 모습이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 25장]라고 했으므로 이 말을 따른다면 천지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도[道=自然]를 닮아 생기는 일이지 천지가 따로 주관하는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천지를 인격화하는 유가의 사고와 유사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백서본에 “孰爲此?”라는 말을 왕필본과 다른 각도에서 해석할 여지가 생긴 것도 “천지”라는 말이 빠져면서 가능해졌다. 첫 구절 “希言自然”도 미묘한 차이가 생긴다. 왕필본에는 논리적으로 앞뒤를 연결하는 “고故”자 때문에 “希言自然”을 문장으로 파악하고 다음 문장은 앞 문장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희언=자연의 형태가 됐지만 강조점은 주어 희언에 놓인다. 반면 백서본은 “고故”자가 사라져 희언자연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희언하고 자연하라’는 식으로. 이렇게 되면 희언과 자연의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 새로운 문제가 생기긴 하지만. 일단 백서본을 기준으로 해석하기로 한다.
요컨대 “말을 적게 하고 본래 그대로 두어라”[希言自然]는 언사가 어떻게 정치에 적용되는가하는 점이 관건이다. 이 말은 칸트의 정언명법과 같아서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희언希言과 자연自然 사이의 관계도 모호하고 말을 적게 하라는 게 어떻게 정치와 상관이 되는지 맥락이 곧바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까다롭다. “희언”을 먼저하고 다음 단계로 “자연”하라는 말인가, 희언하는 것이 곧 자연이라는 뜻인가. 아니면 희언과 자연은 같은 의미를 다르게 표현한 것인가.
문장을 다시 읽어 보자. 노자는 사나운 바람과 소나기를 천지의 말[言]로 비유했다. 천지가 표풍(飄風)과 취우(驟雨)라는 현상으로 말을 하긴 하나 오래 그리고 많이 하지 않는 게[不能久] 본래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하물며 인간이 어떻게 천지보다 말을 많이 할 수 있겠느냐라는 게 이 글의 요지다. 천지와 인간은 연결되어 있다는 게 재차 확인된다. 인간의 말은 일상적으로 하는 언어생활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천지의 언어가 표풍(飄風)과 취우(驟雨)이듯, 여기서 인간의 언어는 통치와 관련된 법령이나 명령을 말한다. 법령 따위를 많이 만들어서 백성을 괴롭히지 말고 백성이 세상에 나온 그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라[自然]는 말이다. 고차원의 비유다. 인간이 부여받은 천성인 자발적인 상태(혹은 치유력, 내적인 힘. 또는 잠재력)를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행동은 인위적인 어떤 것(법령)도 가하지 않고 천지를 닮은 상태 그대로 놓아두라는 도가의 기본명제가 다른 방식으로 담긴 표현이다. 그렇다면 노자가 말하는 인간의 언어에는 성인의 교화나 그들의 진심이 담긴 서적도 포함할 수 있을 것인가? 예컨대 유교에서 중시하는 오경을 희언이란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어려운 문제다.
“말을 적게 하고 본래 그대로 두어라”고 해석했지만 ‘희언하고 자연하라’는 말은, 영어식으로 말하자면 and로 연결된 문장이라기보다는 자연이라는 포괄적인 행동 가운데 하나로 희언을 거론했다고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천지 본래의 모습[自然] 가운데 하나가 희언이라 할 수 있으므로. ‘말이 적은(혹은 없는) 천지’라는 사고는 유가와 차이가 있다. 『논어』에서 공자는 “하늘이 말을 하드냐”라고 했다. 공자는 말 없는 하늘을 인지하고 있었다. 맹자에 가면 공자의 말은 다르게 해석되어 변용된다. 맹자는, 백성을 하늘의 목소리로 재해석해 민심이 천심(天心)이라고 했다. 하늘이 정치사상화 되어 전회(轉回)하는 선명한 발언을 볼 수 있다. (백성을 중시한 맹자의 사고를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점은 논쟁거리다. 유가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맹자는 하늘을 민심으로 인격화해 해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중요한 정치사상이라는 문제와는 별개로 인위적인 행동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노자의 사고(노자에게 하늘은 인간이 해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와는 분명 다르다. 노자의 정치성이 자연[인위하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이라면 유가의 그것은 인위에 있다는 사실이 여기서도 대조적으로 드러난다.
정치철학으로 읽을 수 있는 두번째 예로 47장을 들 수 있다.
“문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를 알고 창밖을 보지 않고도 천도를 안다. 멀리 나갈수록 아는 것이 더 적어진다. 이 때문에 성인은 나가지 않아도 알고 보지 않아도 명명하며 인위적으로 행하지 않고도 이룬다.”[不出戶, 知天下;不闚牖, 見天道. 其出彌遠, 其知彌少, 是以聖人, 不行而知, 不見而名, 不爲而成. 백서본:不出於戶, 以知天下;不闚於牖, 以見天道. 其出也彌遠, 其知彌少, 是以聖人, 弗行而知, 不見而名, 弗爲而成. 글자 차이가 있긴 하나 의미 차이는 없다.]
마지막 구절에 성인을 언급하는 부분을 보면 이 말이 곧바로 통치철학을 얘기한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무위사상과 연결될 수 있으니 말이다. 앞부분의 말도 사물과 행동, 사고의 많은 갈래와 현상도 핵심(도)을 간파하고 장악하면 지엽말단은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언설(왕필의 해석)로 이해하면 성인의 행동은 알기 어렵지 않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통치가 가능하려면 인위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말은 수긍할 수 있다. 그렇다면 통치행위가 무위이건 유위이건 방도가 없을 수 없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어떻게 “행하지 않고도 이룬다”는 게 가능한가. 어떻게 “문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를 알고 창밖을 보지 않고도 천도를 안다”는 게 가능한가. 이런 것이 현실적으로 실현되는 정치를 후대에서는 황로학(黃老學)이라고 불렀다. 황로학의 요체는 이렇다. 임금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신하들이 ‘문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를 알 수 있도록 정보를 주어서 창밖을 보지 않고도 천도를 알 수 있게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임금이 신하를 통해 핵심을 파악하고 요점을 간추려 숙지하기 때문에 임금은 가만히 있기만 해도[無爲] 신하들이 한껏 힘써서[有爲] 천하가 잘 유지되도록 한다. 황로학은 거대 제국을 운영하는 논리적 기반이 된다.
어쩌면 이런 통치철학은 유가에서 이상으로 삼았던 요순시대의 모습일 수도 있다. 공자도 요순을 언급하면서 무위라는 말을 썼고 공자의 무위는 황로학의 함의와 거리가 멀지 않았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후대 특히 성리학의 경우 공자의 무위를 해석하면서 신하들의 역할을 크게 확대해 사대부의 임무가 증대됐다는 점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겠다. 다른 측면에서 따져 보자. 노자는 큰 나라[大國]를 작은 생선[小鮮] 요리하듯 하라고 했는데 이 말은 황로학과 관련이 있을까? 알 수 없다. 작은 생선 요리하듯 한다는 말은 더욱 조심하라는 의미로 읽을 경우 황로학과는 거리가 생긴다. 큰 나라일수록 일이 많고 건사할 게 번다할 수밖에 없는데 그럴수록 개입하려는 의지와 욕망을 자제하고 더 조심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생선 요리 운운한 것은 노자의 이상세계인 “소국과민”(小國寡民)에 견주어 생각할 때 그 연장선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황로학이 한나라 통일 이후 위력을 발휘해 큰 영향력을 끼쳤던 역사적 전례를 떠올린다면 황로학의 정치사상은 제국 운영의 논리였던 셈인데 이는 작은 나라―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개 짖는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는 원시공동체―를 꿈꿨던 노자의 생각과는 차이가 크다. 『노자』의 이 구절을 두고 황로학과 연관 지으면서 후대에 늦게 첨가된 부분이 아닐까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역사적 근거를 두고 지적했던 것이다.
짧은 두 구절을 훑어 정치사상으로 설명했지만 정치철학 중심으로 『노자』를 읽는 방법을 정리하면 이렇다. 노자는 많은 부분을 도(道)에 대한 설명한다. 심오한 원리와 근본준칙으로서 도를 제시하면서 한마디로 자연으로 요약했다. 도를 본받는 것이 올바른 정치라고 할 때 정치는 백성을 본연 그대로 두고 인위를 적게 하라는 말[자연]이었다. 자연을 통치의 뿌리로 두었기에 정치의 토대를 사유했다는 점에서 철학이란 이름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도를 체득하고 실천한 인물로, 정치의 주체로서 성인(聖人)을 설정했다고 거칠게 그려 볼 수 있다. 『노자』를 통치의 책으로 일관되게 읽을 수 있는 틀은 이렇게 마련된다. 그러나 철학으로 한정해도 정치철학에서 그치지 않고 남는 부분이 크기 때문에 『노자』는 다르게 읽힐 가능성은 여전히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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