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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열의 자기만의 고전 읽기

노자의 목소리, 시인의 언어와 철학자의 언어(12) 시인, 보는 사람(見者, Seer) ③ - 다른 세계를 보다

by 북드라망 2021. 6. 25.

노자의 목소리, 시인의 언어와 철학자의 언어(12)
시인, 보는 사람(見者, Seer) ③ - 다른 세계를 보다


감각기관 너머의 어떤 것


현실 너머 다른 세계를 보는 노자를 이야기할 차례다. 다른 세계의 존재는 노자에게 뚜렷했던 것 같다. 14장을 보자. “보아도 볼 수 없으니 이(夷)라 하고 들어도 들을 수 없으니 희(希)라 하고 잡아도 붙들 수 없으니 미(微)라 한다. 이 세 가지는 따져 물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합쳐서 하나라고 한다.”[視之不見, 名曰夷; 廳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백서본:視之而弗見, 名之曰微; 廳之而弗聞, 命(=名)之曰希; 抿之弗得, 名之曰夷. 三者, 不可至計(=致詰), 故混而爲一. 의미상 별 차이 없다.] 

이(夷)·희(希)·미(微)라는 말은 운(韻)을 맞추는 글자이기도 하고 의미상 모두 부정하는 말이기 때문에 개념어로 천착할 필요는 없다. 하나[一]라는 말은 도(道)를 가리킨다. 하나라는 말도 일반적인 말을 가져다 쓴 것이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게 아니다. 도(道)라는 언어 역시 임의적이고 포괄적인 지시어로 고정된 함의를 가졌다고 보긴 어렵다. 1장에서 제시한 원칙을 염두에 둔다면 재삼 거론할 것도 없다. 도는 인지불가능하다는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고 도가 없는 것도 아니다. 감각할 수 없고 언어로 설명해도 남는 부분이 있으며 설명할수록 원 모습에서 멀어지며 훼손될 수밖에 없다는 사고에서 나온 구절이다. 핵심은,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라는 역설. 알기 어려운 것,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말하려는 지난한 노력이 시를 만들었다. 한계를 알면서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몸부림이 간결한 언어를 낳았다. 압축된 언어로 된 시가 가리키는 지점은 현실 너머의 다른 세상이다.   


14장은 12장과 짝을 이룬다. “다채로운 색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현란한 음악은 사람의 귀를 멀게 한다. 복합적인 맛은 사람의 입을 상하게 한다. 마구 뛰놀기와 사냥은 사람 마음을 미치게 한다. 얻기 어려운 물건은 사람의 행동을 어지럽힌다.” [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口爽, 馳騁畋獵令人心發狂, 難得之貨令人行妨. 백서본: 五色使人目明(=盲), 馳騁田臘(=獵)使人心發狂, 難得之貨令人行仿(=妨), 五味使人之口爽, 五音使人之耳聾. 문장 순서에 차이가 있으나 의미상 차이는 미미하다.] 


이 글은 감각기관의 문제와 한계를 지적한다. 문화활동이 감각기관에 자극을 주고 인간이 반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자극과 반응이 계속 상승하면서 감각기관에 이상이 생긴다. 감각기관이 자극에게 붙들린 것이다. 감각기관이 자극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극의 노예가 되어 감각을 잃어버린다. 듣지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게 된다. 인간의 지각이 신령스러운[神!] 까닭은 본래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할 때 감각 너머의 어떤 것을 인지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노자가 여성성이나 어린아이를 내세운 이유도 이런 사정과 관련이 있다. 도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언어화하기도 어렵지만 누구나 인지할 수 있다. 감각기관을 넘어서기에 오히려 인지할 수 있다. 그러나 감각기관만을 믿기에 아무도 인지하지 못 한다. 이것은 역설이 아니다. 사실이다. 노자는 잃어버린 감각을 얘기한다. 노자는 알고 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손에 꼭 잡아 느낄 수는 없어도 뚜렷이 존재하는 현실 너머의 무엇을.         


대기만성, ‘큰 그릇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41장은 감각의 문제를 지나 인식의 문제까지 나아간다. “밝은 도는 어두운 듯 같고 나아가는 길은 물러나는 듯하다. 평탄한 길은 고르지 못한 듯하고 최상의 덕은 텅 빈 듯하다. 가장 깨끗한 덕은 더러운 듯하고 넓은 덕은 부족한 듯하다. 건실한 덕은 구차스런 듯하고 소박과 진실은 거짓인 듯하다. 큰 네모는 모서리가 없고 큰 그릇은 완성되지 않는다. 큰 소리는 들리지 않고 큰 형상은 형체가 없다. 도는 감추어져 이름이 없다. 도만이 잘 베풀고 잘 이루어준다.(차이 나는 백서본 부분: 하늘의 형상은 형체가 없다. 도는 거대해 이름이 없다. 도만이 잘 시작하고 잘 마무리한다.)” [明道若昧, 進道若退, 夷道若纇, 上德若谷, 大白若辱, 廣德若不足, 建德若偸, 質眞若渝,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道隱無名, 夫唯道, 善貸且成. 백서본:明道如昧, 進道如退, 夷道如類, 上德如谷, 大白如辱, 廣德如不足, 建德如偸, 質眞如渝, 大方无隅, 大器免成, 大音希聲, 天象无形. 道褒无名, 夫唯道, 善始且善成. 의미상 차이가 없어 보이나 밑줄 친 글자는 백서본이 명확하다.] 

 


12장에서 언급한 것이 되풀이되긴 하지만(大音希聲) 노자는 인식의 한계를 보여준다. 인식은 일차적으로 감각을 통해 온다. 감각, 특히 눈과 귀로 지각하고 그 후에 인식으로 전화한다. 앞서 말했듯 감각은 쉬 수동적이 되지만 더 큰 문제는 감각 이상의 것에 대해 무기력하다는 사실. 가시권을 넘어서는 것, 가청범위 밖에 있는 것에 대해 반응하지 못한다. 반응하지 못한다고 대상이 없는 게 아니건만.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너머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보는 사람. 이 문장은 시인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인용한 문장은 도(道)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어서 주제만 보자면 도(道)라는 존재에 모두 수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도 이전에 언급되는 숱한 양상들을 허투루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약간 부연 설명해야 할 것이 있다. 먼저 대기만성(大器晩成).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만들어진다)’고 사람들을 칭찬할 때 흔히 쓰는 어구다. 만(晩)이라는 글자는 부정어로 읽어야 한다. 백서본은 대기면성(大器免成)으로 써서 ‘면’(免)이라는 말로 부정어임을 명확히 했다. 완성에서 벗어난다는 말이다. 문맥을 봐도 그러하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은 “大方无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无形”이라는 연속된 구절에 들어간 말로 세 번째 자리에 있는 글자가 모두 부정어로 쓰이기에 부정어로 읽어야 하고 의미맥락에서도 그래야 아귀가 맞는다. 다만 완성되지 않는다고 부정어로 해석해도 어색한 부분이 남는다. 자칫 대기(大器)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방(大方)·대음(大音)·대상(大象) 모두 실재하는 것들이되 대(大)라는 말을 써서 인간의 인지 영역을 넘어선 것을 표현했다. 대기(大器)는 완성이 안 돼서 혹은 계속 만드는 과정에 있으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큰 그릇이므로 인간이 생각하는 완성의 단계를 벗어났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대기(大器)는 앞에서 말한 천하신기(天下神器)의 기(器)보다 크다는 점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한마디 덧붙인다. 『논어』에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말이 있다. 주희는, 군자는 한 가지 용도로만 쓰이는 그릇이 아니라는 의미로 풀어서 그릇처럼 쓰이는 게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노자식으로 풀이한다면, 군자는 완성이라는 의미를 벗어난 존재, 완성이라는 마무리가 없으므로 끝까지 노력하는 존재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공자는 노자식으로 썼을 것이다. 『순자』(荀子) 「권학」(勸學) 편에, “공부는 죽어서야 끝이 난다”[學至乎沒而後止也]는 말이 보인다. 순자의 말은 공자의 말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에 틀림없고(「권학」은 『순자』의 첫 편으로 “공부는 그쳐서는 아니 된다”[學不可以已]는 말로 시작한다. 『논어』의 첫 편이 「학이」(學而)이고 “學而時習之”로 시작해 學을 강조하는 것과 정확히 조응한다) 순자의 말은 “군자불기”(君子不器)란 구절을 설명했다고 읽을 수 있다. 


형(形) 너머를 보는 사람


하나 더 첨언해 보자. 대상(大象)(백서본엔 天象. 대상이란 말이 문맥상 타당해 보이긴 하나 천상이라 했을 때 천(天)은 상(象)으로써만 표현된다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좋은 말이다)에 보이는 상(象)이란 말도 흥미로운 단어다. 한비자는 상(象)이란 말을 이렇게 설명한다. “살아 있는 코끼리를 본 사람은 거의 없다. 죽은 코끼리의 뼈를 발견하고서는 그림을 생각해 내 산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마음속에 그려보는 것을 모두 상[象]이라 한다. 도(道)라 것은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지만 성인이 도의 드러난 작용(결과)을 보고 형상을 살펴 드러내었다. 그러므로 ‘형태가 없는 형태요 구체적 형상이 없는 상이다’라고 하였다.”[人希見生像也, 而得死象之骨, 案其圖以想其生也, 故諸人之所以意想者皆謂之象也. 今道雖不可得聞見, 聖人執其見功以處見其形, 故曰:‘無狀之狀, 無物之象’.]


『한비자』, 「해로」(解老) 편에 보이는 구절로 인용한 구절은 14장에 보인다. 상상력이라는 말이 어디서 왔는지 상(象)이라는 글자를 통해 설명했다. 의상(意想)이라는 말이 상상력에 해당 될 듯한데 상상력의 발생 메커니즘을 코끼리를 가져와 말하면서(案其圖以想其生)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執其見功以處見其形, 處는 審이라는 말이다) 성인이 도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고 했다. 성인이 상(象)을 보고 형(形)으로 구체화했다는 뜻이다. 형(形)도 형체를 보여줬다기보다 알 수 없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도록 했다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이다. 인간 심리의 작동방식을 상(象)이라는 말과 관련되는 연상작용으로 끌어와 대구로 논리를 구성한 재치 있는 글이다.      

 


상(象)은 형(形)이 아니다. 형은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고 구체적인 형체를 갖춰 일정 공간을 차지한다고 정의할 수 있다면 상은 존재하지만 구체적 형태를 감각으로 명확히 그려낼 수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생긴다. 예컨대 공기·바람·수증기·물 따위는 형으로 나타내기보다 상으로 이미지화 할 뿐이다. 물[水]을 상으로 상상했다는 게 눈여겨볼 만하다. 상을 모아 놓은 책으로 『주역』(周易)을 떠올릴 수 있다. 『역』에 보이는 기본 8괘는 그 도상마다 상징하는 자연물이 있다. 하늘[乾]·못[lake,兌]·불[離]·우뢰[震]·바람[巽]·물[坎]·산[艮]·땅[坤]. 우리가 익히 아는 건괘[𝍢]는 괘가 먼저가 아니라 하늘을 기호화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서구사람들은 건괘가 상징하는 ‘하늘’을 ‘이미지’로 받아들인다.) 


『역』에서 감(坎)괘라는 기호가 가리키는 자연대상은 물이라 설명되지만 이때 물은 포괄적인 말이다. 물은 생명에게 필수적인 존재라는 상징적 함의에서부터 강과 바다까지 물로 된 구체적 형상까지 모든 것을 가리킨다. 바다 하나만으로도 신비스럽고 변화무쌍한, 두려운 미지의 존재로 여겼던 옛사람들을 떠올려 본다면 물이 단순한 대상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도 마찬가지다. 산은 형(形)으로 이해할 수 있고 산(山)이라는 글자는 상형문자의 대표주자처럼 거론되니 상(象)으로 본다는 게 의아스러울 수 있다. 요체는 산이 지닌 신령한 힘에 주목했다는 점이다. 산은 물을 품고 숲을 지녔으며 못[lake,兌]과 계곡(도가에서는 텅빔[空]의 상징이다)이 그 안에 있으니 눈으로 보는 것만으론 분별할 수 없는 영역이 있는 셈이다. 때문에 형이 아닌 상으로 간주한다. 복합적인 상(象)의 작용을 품고 있기에 『주역』의 변화가 다채로운 것이다. 


시인을 보는 사람이라고 할 때 형(形) 너머를 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주역』을 빌려 말한다면 시인은 상(象)을 보는 사람이다. 상을 보았기에 언어화할 수 있는 것이다. 한비자의 말은 정확하다고 하겠다. 노자는 정녕 잘 보는 사람이다.  

 

글_최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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