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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열의 자기만의 고전 읽기

철학자로서의 노자(2) _ 삶의 기술(art)로서의 철학

by 북드라망 2021. 7. 23.

노자의 목소리, 시인의 언어와 철학자의 언어(14)
철학자로서의 노자(2) _ 삶의 기술(art)로서의 철학

철학을 다르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노자』를 통치철학, 사회철학 혹은 정치사상으로 읽지 않고 다르게 읽는 길을 모색해 보자. 서양철학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는 방법도 참고자료로 유용하리라 생각한다. 서양철학의 모태이자 근간인 고대 그리스철학과 이를 이은 중세철학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철학을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철학에 대한 당대인들의 생각은 한마디로 ‘철학은 삶의 지표’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철학은 삶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다. 철학은 기본적인 질문들―삶이란 무엇인가, 사람답게 사는 것은 무엇인가. 가치있는 인생이란, 행복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등―을 끌어안고 고민하는 수준 높은 담론이었다. 소크라테스가 가치문제에 깊이 파고든 것도 가치 있는 삶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었다. ‘철학적’이란 말의 뜻은 ‘당신이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예컨대 인간은 모두 늙는다는 사실, 또는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것, 인생은 짧다는 진실 등을 받아들일 때 철학적이라고 했다. 로마시대 철학자 세네카(Seneca) 등의 저서의 제목이 『인생의 짦음에 대하여』, 혹은 『노년에 대하여』, 혹은 『우정에 대하여』라고 한 것도 삶의 한 방식으로서의 철학 혹은 실천으로서의 철학임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중세에까지 크게 유행해, 영국문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제프리 초서(G. Chaucer)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유명한 보에티우스(Boetius, 475-525)의 『철학의 위안』(The Consolation of Philosophy)이라는 이상한(?) 책의 제목도 그런 측면에서 접근할 때 이해할 수 있다. 지금으로선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보에티우스는 철학을 일종의 자기 계발(self-help)로 생각했고 그의 책은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담론이 더 나은 삶을 이끈다고 생각했던 고대인의 사고를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이런 사고를 지녔기에 보에티우스는 사형을 기다리면서 감옥에서 이 책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위안으로서, 치유로서의 철학이라, 철학이 이런 것이라면 매혹적이지 않겠는가. 철학은 문자 그대로 지혜에 대한 사랑이었다. 중세까지 실제로 이러했다.1) 혁명적인 변화가 온 것은 근대철학이다. 윤리적 담론이었고 지혜를 얻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었던 철학이 ‘이론에 대한 사랑’으로 바뀐 것이다. 푸코의 말에 따르자면 ‘철학의 이론화’가 시작되었던 것. 누군가는 이를 ‘이론의 제국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핵심은 “근대철학의 출발과 함께 철학이 본래의 고유한 성격을 잃어버렸다는 것”.2)

 


『노자』를 지혜의 책으로 읽을 수는 없을까. 중국 고대의 책들은 대부분 학파별로 분류되어 제자백가로 통칭하는데 나름의 근거가 있긴 하다. 많은 부분이 사회철학이어서 당대의 긴급한 문제와 씨름하는 지식인들의 고투가 선명하다. 그들 투쟁의 흔적이 역력하기에 그것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고대 서적은 당대성을 무시하고 읽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생명력을 유지하고 앞으로도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고전 자체의 아우라를 다채롭게 할 필요가 있다. 고전이 고전인 까닭은 한마디로 다시 읽기(rereading)일 터, 재해석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마르지 않는 샘물이 적절한 비유로 흔히 소환되지만 나는 수많은 독자의 안목에 더 의지하고 싶다. 수많은 해석이 쌓여 고전 곁에 놓일 때 고전다움이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노자』에 보이는 많은 시(詩)는 새로운 읽기를 유혹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저절로 손이 가게 만든다. 왕필이 심오한 현학(玄學)으로 읽었고, 하상공은 통치서로 독해했으며 상이주는 양생술로 이해했다. 누군가는 처세술로 해독할 것이며 누군가는 문명론으로 재해석할 것이고 다른 사람은 처세의 교본으로 떠받들 수 있다. 전문학자들에게 귀 기울이되 아마추어의 순수한 의견도 무시하고 싶지 않다. 깊이 있는 분석과 역사적 근거에 수긍하면서 맥락을 벗어나 자유로운 영감으로 읽는 방식 사이에 균형을 잡을 순 없을까. 체계적이고 통일적인 읽기와 일관성을 벗고 단편적으로 읽어 위안을 얻는 둘 사이에서 꼭 한 쪽 편에 서야만 하는가. 양비론과 양시론 사이에 길이 없을까. 당대에 비추어 세밀한 주석을 참고해 일관적인 사고를 찾아 통일적으로 재구성하는 읽기를 목표로 하면서도 다른 공간을 마련해 두고 싶은 것이다. 그 길은 어디에 있을까? 『노자』엔 삶의 기술로서 입에 올리고 마음에 담아 두고 싶은 언어가 가득하다. 내가 좋아하는 두 구절을 들어 본다.  

33장.
“남을 아는 사람은 지혜롭고 자신을 아는 사람은 밝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을 가진 것이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야말로 강하다. 만족을 아는 사람이 부자이며 힘써 행하는 사람은 뜻이 있다. 자기 자리를 잃지 않는 사람은 오래가는 사람이고 죽어도 잊히지 않는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이다.”[知人者, 智;自知者, 明. 勝人者, 有力;自勝者, 强. 知足者, 富;强行者, 有志. 不失其所者, 久;死而不亡者, 壽. 백서본:知人者, 智也;自知者, 明也. 勝人者, 有力也;自勝者, 强也. 知足者, 富也;强行者, 有志也. 不失其所者, 久也;死不亡者, 壽也. 백서본에 어조사 야 也자가 문장 끝에 붙었으나 의미는 차이 없다.] (두 문장씩 대구를 이루어 반대되는 의미쌍을 이루기 때문에, “知足者, 富;强行者, 有志”를 “만족을 아는 사람이 부자이며 억지로  실천하는 사람은 뜻만 높다”로 볼 수도 있다.) 


나는 지자(智者)가 아니라 명자(明者)가 되고 싶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을 가진 것이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야말로 강하다.”[勝人者, 有力;自勝者, 强.] 누군들 자신을 이기는 강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겠는가. 경쟁에서 남을 이기는 것보다 더 귀한 게 있다는 걸 까마득한 예전부터 알고 있었건만 경쟁사회에선 남과 싸워 이기는 게 철칙이다. 그러한 정글의 삶에 『노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불로장생이 꿈인 세상에, “죽어도 잊히지 않는 사람이 오래 사는 것”[死而不亡者, 壽.]이라니, 주어진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노자의 말을 거꾸로 읽을 순 없을까. 

 


44장은 어떤가. “명예와 몸, 어느 것이 더 중한가? 몸과 재물 어느 게 더 소중한가? 얻음과 잃음 어느 게 더 문제가 되는가? 이 때문에 너무 아끼면 반드시 크게 낭비하고 많이 쌓아두면 반드시 호되게 잃는다. 만족을 알면 치욕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그러므로 오래가고 길게 갈 수 있다.”[名與身孰親? 身與貨孰多? 得與亡孰病? 是故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백서본:名與身孰親? 身與貨孰多? 得與亡孰病? 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 故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큰 차이 없다.] 

“만족을 알면 치욕을 당하지 않는다”[知足不辱]라고 진정 말할 수 있을까. 명예와 몸 중에 명예가 더 중하고 몸과 재물 가운데 재물이 더 귀한 세상에서. 삶이 고단한 건 인간관계가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그 조건을 생략하고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만족할 때 남과 비교되고 손가락질 받는 걸 감당할 수 있는가? 어리석은 자의 자기기만이나 망상이 아니라고 어찌 자신하겠는가. 자신을 불만족스럽게 여겨 열심히 전진하는 사람은 바보들인가? 나는 회의하면서 받아들이고 싶다. 
물어보자. 『노자』의 지혜로운 말씀이 진정 호소력 있게 다가오는가? 권위에, 고전이라는 권위와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인정이 독서에 영향을 준 게 아니고? 이런 집단적 권위에 저항하고 의심하는 자세에서 읽기는 출발할 것이다. 저항하기 쉽지 않다. 『노자』의 지혜는 아직 유보적이다. 유보되어야 한다. 노자를 지혜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싶지만 수용하기 전에 의심해야 한다. 의심하면서 불안해야 하고 불안을 견뎌야 저항하는 균형점이 생긴다. 그게 자기만의 읽기가 아닐까. 그래야 삶과 이어지는 탐구의 언어로서 『노자』가 읽히지 않겠는가. 

 

글_최경열

 

1) 고대철학에 대해 새로운 통찰력을 주는 책 두 권을 추천한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고대철학 연구가인 피에르 아도(Pierre Hadot)의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What is Ancient Philosophy), 동일 저자의 책, 『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Philosophy as a Way of Life). 앞의 책은 한국어 번역본이 있고 뒤의 책은 영어번역본이다. 

2) 이상 고대철학과 근대철학에 대한 간략한 개요는 임철규, 『눈의 역사 눈의 미학』, 10 구원의 눈, 한길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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