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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열의 자기만의 고전 읽기

『손자병법』- 군사의 기동성과 개념의 유동성

by 북드라망 2021. 8. 13.

『손자병법』(2) _ 군사의 기동성과 개념의 유동성

저자 손자


손무의 군사 훈련

서양에까지 널리 알려진 손자는 어떤 사람인가. 손자는 손무(孫武)로 제(齊)나라 사람이다. 제나라에는 두 명의 걸출한 병법가가 태어났다. 손무와 손빈(孫臏). 「예문지」에는 『오吳손자병법』과 『제齊손자병법』 두 권을 나란히 기록했는데 『오손자병법』이 현재의 『손자병법』이다. 손무가 한때 오나라에 가서 오나라 왕 합려(闔廬)를 섬긴 적이 있기 때문에 둘을 구분하기 위해 손무를 오손자라고 칭한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 「손자오기열전」에서 손무와 손빈을 모두 소개하는데 손무의 전기는 손무가 오나라에서 군사를 훈련시키는 이야기만으로 간략하게 구성했다. 실제로 손무는 오왕 합려를 도와 노나라를 괴롭혔던 초나라를 공격해 초나라의 수도 영(郢)까지 함락시키는 위력을 보여 준다. 단순한 이론가가 아니라 실전에 강했던 명장이었던 것. 그런 면에서 보면 사마천이 손무의 전기 전체를 기술한 군사훈련 장면은 음미할 만하다.

 


오왕 합려는 병법에 탁월한 손무를 만나 그대의 13편을 다 읽어 보았으니 시험 삼아 군대를 훈련시킬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할 수 있다는 말에 합려는 부인들(여자)에게도 가능하냐고 하자 거듭 할 수 있다고 대답하는 손무. 손무는 궁중 여자 180인을 뽑아 총애 받는 두 여자를 둘로 나눈 부대의 대장으로 삼고 훈련을 시킨다. 요즘 말로 제식 훈련이다. 우양우, 좌양좌, 뒤로 돌아. 북을 치며 설명하고 명령을 내렸는데 여자들은 크게 웃는다. 다시 한 번 설명하고 명령을 내린다. 또 크게 웃기만 하는 여자들. 손무는 말한다. “약속이 명확하지 않고 내린 명령이 익숙하지 않도록 한 것은 장군의 죄이지만 이미 명백한데 법에 따르지 않는 것은 병사들의 잘못이다.”[約束不明, 申令不熟, 將之罪也. 旣已明而不如法者, 吏士之罪也.] 그리하고는 대장이 된 총희(寵姬) 두 명을 목 베려 한다. 이때 만류하며 나서는 오왕. 손무는 말한다. “장수가 군대에 있을 때는 임금의 명을 받지 않을 수 있습이다.”[將在軍, 君名有所不受.] 손무는 두 여자를 처형하고 조리돌림 해 여자들에게 보여 준다. 그리고 두 번째로 총애 받는 여자를 대장으로 삼고 훈련을 재개한다. 여자들은 명령에 완벽하게 복종한다. 손무는 왕에게 내려와 참관하시라 부탁한다. “왕께서 병사를 쓰시려 한다면 물에 불에 들어가라 해도 될 것입니다”[唯王所欲用之, 雖赴水火猶可也]. 보고 싶지 않다며 피하는 왕(이 구절은 총희를 잃어 맘이 상한 왕의 심리를 잘 보여준다). 손무는 말한다. “왕께서는 단지 이론만 좋아하실 뿐 그 실제는 쓰려고 하지 않으십니다”[王徒好其言, 不能用其實]. 이에 왕은 손자가 용병(用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장군으로 임명해 강한 초나라를 친다. 


사마천은 전(傳) 말미 평가하는 말에서, “세상에서 군사문제를 얘기할 때 모두 『손자』 13편을 말한다”[世俗所稱師旅, 皆道孫子十三篇]라고 했다. 손자를 높이 평가했음을 당대의 의견으로 전해 준다. 손무의 전이 얼마나 잘 쓰인 글인지는 논외로 하자. 구성이 뛰어난 글이라는 지적만 하고 지나가자. 병법의 관점에서 손무의 전이 뛰어난 까닭은 병법이 어디서 근원하는지 병법의 전체 윤곽을 명확히 설명하는 점에 있다. 


손무 병법의 핵심, 군법

병법의 근원은 무엇일까. 병법의 근원은 군법(軍法)에 있다. 군법은 군사(軍事)를 총괄하는 넓은 의미의 군사기술을 말한다. 병법은 군법의 하위범주로 좁은 의미로 쓰인 말이다. 병법이 주로 군사를 실제 전쟁에서 운용하는 용병(用兵)에 집중한다면 군법은 용병 이전의 단계를 모두 포함한다. 군사(軍事) 하면 대부분 전투에서 싸우는 병사들의 움직임 혹은 전투부대 단위의 전술을 떠올리기 쉬운데 이는 군사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용병이 가능하려면 실제로 군사를 움직이기까지 보이지 않는 엄청난 노력이 배경에 있어야 한다. 이 배경을 국가의 경제력·행정력이라 다르게 부를 수 있다. 


첫째 인력을 소집해야 한다. 인력 소집은 그냥 불러 모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인력 소집은 조직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들의 명부를 작성해 부대편성의 바탕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소집한 인력을 편성해서 군복을 입히고 먹고 잘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셋째 소집인원을 훈련시켜야 한다. 훈련은 중요하다. 군사훈련은 대규모 인원이 전투상황 속에서 당황하지 않고 명령에 따라 조직 전체가 일관된 움직임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각종 군대의 표식과 암호 기능을 숙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명령이 단기간에 병사 개개인에게 명확히 전달되어 움직일 수 있도록 체계적인 조직과 움직임이 몸에 익도록 해야 한다. 훈련과정에 공을 많이 들여야 실제 전투에서 병력 손실이 적고 승리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논어』에도 공자는, “백성을 가르치지 않고 싸우게 한다면 이는 백성을 버리는 것이다”[以不敎民戰, 是謂棄之]라고 했다. 가르친다는 말은 바로 군사훈련을 제대로 시켜야 한다는 의미다. 공자가 생각한 군사훈련은 7년 정도라고 했으니(논어, 「자로」子路) 훈련은 뚝딱 해치울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군사문제가 중요했던 것은 생명과도 직결되어서인데 백성들이 바로 병사들이기 때문이었다. 용병이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병사들을 실전에 쓰는 행동을 용병이라 한다면 용병을 위한 준비단계, 특히 병사들의 훈련을 가리켜 치병(治兵)이라 한다. 치병은 용병의 근간일 뿐만 아니라 용병 가운데에도 치병은 상존한다. 용병과 치병은 별다른 두 개념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이다. 용병에 주안점이 놓이지만 치병이 없으면 용병은 존재할 수 없다. 치병과 용병은 물과 물고기의 관계와 같다. 용병이 날카로운 움직임을 보이려면 치병이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치병과 용병은 하나이자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손무의 훈련은 치병을 드라마틱하게 보여 준다. 여자들을 훈련대상으로 설정했는데 이는 농부들이건 젊은이들이건 상관없다. 치병은 조직이 먼저라는 사실을 보여 주려고 손무는 인원을 두 부대로 편성하고 대장을 임명해 체제를 편성했다. 아마 복장도 통일하고 편성에 맞는 깃발과 신호체계를 세웠으리란 점도 상상할 수 있다. 북에 맞춰 구령을 내리는 동작을 반복함으로써 명령체계의 작동과 각 부대에서 통용되는 신호체계를 익히도록 했다. 사마천은 원문에서 약속(約束)과 신령(申令)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는 군대에서 통용되는 조직 내의 언어를 말한다. 이 부분은 중요하다. 병사들이 자기 조직의 언어를 모른다면 병사를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깃발의 움직임을 보고 신속하게 행동으로 변해야 하는데 이게 안 된다면 전투의 결과는 뻔한 게 아닌가. 이를 약속이라 했다. 

 


약속에 상응하는 것이 군령(軍令)이다. 군대에서 명령의 중요성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작게는 군대에서 쓰이는 작은 신호와 암호를 의미하고 훈련할 때의 병사들을 움직이는 법칙이기도 하지만 크게는 임금의 명령이 전달되어도 전쟁의 규칙을 먼저 생각하고 그 명령을 무시할 수 있는 큰 규범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손자가 오왕 합려의 말에 명령을 받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군령은 군법의 구체화이면서 군법의 각종 규정을 언어화한 것이다. 치병의 엄중함을 얘기하는 것으로 손무의 훈련과정을 흔히 읽지만 그 안에는 병법의 모태로서 넓은 의미의 군법을 얘기한다는 사실을 폭 넓은 조망해야 할 것이다. 사마천은 손무의 훈련만으로 전을 구성했지만 손무의 가치와 병법의 핵심을 명확히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용병과 치병은 분리되지 않는다

병법의 모태로서 군법을 체계화한 저술이 『사마법』(司馬法)이다. 전설에 따르면 『사마법』은 위대한 문명의 창시자 주공(周公)이 지은 책이다. 현재 전하는 동명의 책은 사마양저(司馬穰苴, 이 사람 역시 제나라 출신이고 사마천의 전기가 있다)가 저자로 되어 있다. 후대에 주공의 책에 제목을 가탁해 찬한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특이하게도 「예문지」에는 『사마법』이 병가략이 아니라 육예략(六藝略)의 예(禮) 부문에 들어가 있다. 원래 「예문지」의 모본이었던 『칠략』(七略)에는 『사마법』이 병서(兵書)에 분류돼 있었는데 「예문지」에는 『군례사마법』(軍禮司馬法)이란 제목으로 예(禮) 항목에 옮겨 놓았다. 군례(軍禮)라는 말 때문이었을까. 청나라 사고전서(四庫全書)에서는 『사마법』을 다시 병서로 분류했다. 『사고전서 총목제요(總目提要)』에는 반고가 사마법을 예 항목에 분류한 것을 두고, 『사마법』은 그 말이 주관(周官=주례[周禮])과 출입이 많아 예로부터 전해오던 오례(五禮)의 하나로 보아 그런 게 아니었을까 추측했다. 반고의 새로운 분류는 주공(周公)이 지었다는 전설과 유교화가 완전히 진행된 한나라의 변화를 가늠하게 한다. 아울러 『제요』에는 사마양저가 저자로 전해지는 『사마법』은 제나라가 관찬(官撰)으로 병서를 편찬하면서 대표자로 이름을 올린 게 아닌가 얘기한다는 점도 지적해야겠다. 춘추전국시대에서 한나라의 제국통일에 이르기까지 각국의 전술가·장군들은 많은 병서를 남겼는데 병법 분야에서 유독 제나라가 두드러지는 점이 특이하다. 『제요』는 또한 『사마법』을 두고 “삼대 군정의 남겨진 규범”[三代軍政之遺規] 등을 기록했다고 했다. 하은주 삼대의 군사(軍事)를 다스리는[政] 규범이 이어져 담겼다는 말인데 이 말을 통해 주공과 관련 지으면서 치병에 주력한 저술임을 알겠다. 


사마천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두 애첩을 잃고 맘이 상한 왕에게 손무는 말한다. 왕께서는 이론을 좋아할 뿐 그 실제를 쓸 수 없을 것이라고.[好其言, 不能用其實]. 그제서야 왕은 손무가 용병할 수 있음을 알고 장군으로 삼아 초나라를 공격했다는 문장이 이어진다. 손무에게 치병과 용병은 분리된 게 아니었고 군사(軍事)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였다. 중요한 발언이다. 치병과 용병이 한 몸이고 이론과 실제가 일체라는 사실만큼 중요한 건 없다. 특히 병법에서는. 오왕 합려는 치병은 치병일 뿐이고 『손자병법』을 읽고 이론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손무는 그게 아니라고 궁중 훈련을 통해 눈앞에서 입증해 보였는데도 임금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랬기에 실전에 쓸 수 없다고 임금의 선입견에 충격을 준 것이다. 사마천은 여기 와서야 용병이라는 말을 씀으로서 오왕 합려의 변화를 보여 준다. 정확한 표현이었다. 이렇게 되면 다음 일이 어떻게 벌어질 줄 능히 알 수 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초나라를 멸망의 문턱까지 가게 한 손무의 놀라운 전과이지만 사마천은 훈련과정을 상세히 보여 주면서 손무가 전쟁에 이길 수밖에 없었음을 증명해 보였다. 놀라운 필력이다. 손무에 대한 신뢰가 마련됐으니 『손자병법』의 적실성은 구구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세상에서 군사문제를 얘기할 때 모두 『손자』 13편을 말한다”[世俗所稱師旅, 皆道孫子十三篇]라고 손자에 대한 평가를 간결하게 맺은 것도 더 이상 말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손자에 대한 평가는 바로 『손자병법』에 대한 신뢰였던 것이다. 


손무는 『손자병법』이라는 단 한 권의 책으로 설명될 수 있는 사람이다. 『손자병법』에는 용병과 치병이 분리되지 않는 책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손자는 당연히 용병에 집중한다. 그럼에도 치병과 용병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치병은 규범화할 수 있다. 그러나 용병은 이론화가 어렵다. 용병은 전투와 전쟁의 소용돌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집중한다. 전쟁은 한마디로 한다면 우연이라 할 수밖에 없다. 전쟁은 인간이 하는 일이다. 전투에 돌입하면 많은 변수들에 한꺼번에 부닥친다.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돌발변수는 주변에 영향을 미처 예상치 못한 일들이 끊임없이 생긴다. 똑같은 전투는 없다. 손자는 전쟁상황을 정확히 인식했고 용병의 원칙에 집중해 통제할 수 없는 요소를 최소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손자병법』의 뛰어난 점이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숙고하면서 나름의 이론과 원칙을 세웠던 것. 따라서 『손자병법』에서 구체적 조언이나 불패의 작전비결을 기대할 수 없다. 언어는 포괄적이고 당위에 기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손자의 문제의식과 전쟁을 보는 그의 통찰력을 염두에 둔다면 『손자병법』은 다르게 읽힐 소지가 많다. 때문에 『손자병법』에 무수한 주석가들이 자신의 의견을 밝히면서 『손자병법』을 새롭게 읽고 해석했다. 시대가 다르고 문인이냐 무인(武人)이냐에 따라 견해가 다채롭다. 

 

글_최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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