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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열의 자기만의 고전 읽기

노자의 목소리, 시인의 언어와 철학자의 언어(1) - 『노자』라는 책

by 북드라망 2020. 12. 4.

노자의 목소리, 시인의 언어와 철학자의 언어(1)

- 『노자』라는 책 



언어의 세계에 들어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노자』는 『논어』와 다른 성격의 책이다. 문장이 다르고 문체가 다르며 내용도 다르고 형식·어조가 다르다. 지시하는 방향도 다를 수밖에 없다. 책을 펼치고 읽으면 추상적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추상적인 게 어떤 의미인지 『논어』와 견주어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논어』는 사제 간의 대화 중심이기 때문에 문답체다. 대화가 길고 토론과정이 기록됐다면 행간에 갈등과 발전형태를 파악할 수 있어 드라마틱한 전개를 기대할 수 있을 텐데 스승의 가르침을 일방적으로 기록한 게 『논어』의 특징이어서 조밀한 논리[論]를 발견하기 쉽지 않다(스승문학[master’s literature]의, 또한 서양에서 말하는 지혜문학[wisdom literature]의 특징이기도 하다). 노자의 언어는 이와 다르다. 문답이 아니기에 대화가 없다. 공자는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서 공자라는 인물의 인격이 그려지고 공자 이미지가 형성되는 것은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다. 공자의 라이프스타일까지 세밀하게 보게 된다(「향당鄕黨」). 공자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노자』는 통독한 후에도 노자라는 인격이 그려지지 않으며 이미지도 떠오르지 않는다. 『노자』는 노자를 지워도 책만으로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유명한 1장을 보자. “도를 도라고 이름 붙일 수 있으나 항상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어떠한 이름으로 부를 수 있으나 항상 그러한 이름은 아니다. 이름 없음이 천지의 시작이며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미이다(혹은 다르게 해석해서, 없음은 천지의 시작을 이름붙인 것이며 있음은 만물의 어미를 이름붙인 것이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어려운 글자 하나 없고 리듬감을 주어 대구로 다듬어 아름답기까지 한, 그럼에도 알쏭달쏭한 대책 없는 글이다. 해석을 해도 추상성만 더 커질 뿐 의미를 알 수 없는 이 글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있음과 없음[有無]을 존재론적 관점이니, 무명·유명을 따로 묶어 인식론적인 관점이니 하는 식으로 해석을 한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을 들어 인식의 한계를 거론하기도 하고, 언어의 임의성에 대한 강력한 발언으로 읽기도 한다. 인간이 언어를 벗어날 수 없지만 그 언어가 곧 인식의 최대치라는 점을 명심하라는 전언으로 읽는 통속적인 해석도 가능하다. 언어의 규약성을 명시하되 규약성을 임시로 가정한, 상정된 기호임을 전제하는 서론으로 읽을 때, 노자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노자는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가는 가이드를 명확하게 보여 준 셈이다. 적어도 그렇게 읽자고 타협할 수 있다. 그런 가정 아래 읽어 보기로 하자, 누구나 작심한다. 그렇다고 해도 노자의 세계가 평탄하게 펼쳐지지 않는다. 


『논어』는 첫 글자가 학(學)이어서 배울 준비를 하면 그에 상응하는 가르침을 주면서 배움의 단계를 따라 전진할 수 있다. 『노자』는 어떠한가. 『노자』의 첫 글자는 도(道)다. 도(道, 진리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까?)를 배우려 단단히 마음 먹었지만 노자는 도를 설명하지 않는다. 노자는 도라는 궁극의 언어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대뜸 도는 임시로 이름 붙인 것일 뿐 실체가 아니라[道可道]고 한다. 임시로 붙인 칭호라 명사로서 지칭된 이상 항상 우리 곁에서 우리와 살며 생활하는, 항상성을 가진 상태로서 도는 인식되지 못하고 명칭을 주는 순간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非常道]고 한다. 이해하려고 준비했더니 이해라는 말 자체가 문제라고 경고하는 것 같다. 그런 것들은 제한된 명칭[名可名]일 뿐 사물의 어떤 모습, 형태에 대한 일시적 이름 붙이기지 사물을 제대로 드러내는 게 아니다[非常名]라고 재차 못을 박는다. 이름 붙이거나 설명할 수도 없는 게 이 세상(우주)일 텐데 無의 세계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無는 아무것도 없는 빈 것임에도 無라는 이름이 붙으면서 개념화되고 개념이 성립하면서 우주에 대한 인식이 시작된다 할 수 있고[天地之始], 시작되었다는 인식이 들어온 이상 명칭이 생겼으니[有名] 만물을 이름 짓고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萬物之母]고 가정한다. 有와 無의 관계를 인식하고 無가 有와 관계 맺으면서 無는 단순한 상태가 아니라 無라는 개념으로 인식된 것이며 다음 단계로 진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다음 단계? 말을 하려면 언어가 필요하고 그 언어가 아무리 임의적이고 일시적이며 한계가 있고 수단에 불과하다고 해도 언어의 세계로 들어와야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자는 언어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거나 언어의 부정확성, 언어라는 함정·올가미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거꾸로 언어화할 수 밖에 없고 언어화해야 하는 상황임을 말한다. 노자는 언어가 핵심문제임을 간파한 것이다. 그는 언어가 자연스럽고 당연한 전제임을 승인하지 않고 언어라는 사실을 인지한 후에 논의가 시작된다는 점을 제일 먼저 표시했다. 언어는 자연이 아니다. 언어는 물질이며 나는 나만의 언어로 말하겠다, 노자는 선언한 것이다. 그걸 이렇게 간결하게 대구에 운율을 맞추고 리듬에 실어서 말해야 하나. 노자는 ‘언어의 세계로 들어온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인사말은 짧아야 하지 않겠는가.



숱한 사상의 연원이 된 5천 자


『논어』가 산문의 세계라면 『노자』는 운문의 세계다. 노자는 설명하려는 것일까, 암시하려는 것일까. 자신의 세계를 펼쳐 보이려는 것일까, 비의(秘義)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으므로 흔적만을 드러내려 한 것일까. 


다른 질문이 따라온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를 가져와 설명을 시도해 보았지만 인용한 글이 1장이 아니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서문이 아니라면 이 추상적인 말을 어떻게 읽어야 한단 말인가. 이는 정당한 의문이다. 여기에는 노자의 판본 문제와 전승(傳承)에 대한 질문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질문이 따라온다. 노자는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언어로 가득 찬 글인가.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렇다면 다른 내용은 없는가. 당연히 다른 내용도 숨겨져 있다. 몇 가지를 보자. 먼저 스승문학의 특징인 잠언투의 지혜가 있다. “위대한 곧음은 굽은 것 같고, 위대한 솜씨는 졸렬해 보이고, 위대한 말씀은 어눌한 말 같다.”[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45장] 도가의 역설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말이기도 하지만 비유도 훌륭하고 외우기도 쉽고 내용이 풍요로워 말맛에 벌써 끌린다. 되풀이하건대 고전을 읽는 이유가 지혜를 얻는 것인 바, 노자는 벌써 당시에 통렬한 질문을 던진다. “명예와 몸 무엇이 소중한가? 몸과 재물 무엇이 귀한가? 재물을 얻는 것과 건강을 잃는 것 무엇이 병이겠는가?”[名與身孰親; 身與貨孰多; 得與亡孰病/44장]이름과 재물(명예욕과 경제력)에 자신과 건강을 잃어버리는 현상은 고금이 다르지 않다는 말인가. 노자는 통쾌한 말도 한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은 모르는 것이다”[知者不言; 言者不知/56장] 멋진 글을 써서 발언하고 싶은 욕망이 들끓는 세상에서 입을 다물 줄 아는 절제를 얘기한 것일까. 노자는 유머를 구사하는 명문을 쓰기도 한다. “훌륭한 선비는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실행한다. 중간 정도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한다. 못난 선비는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 비웃지 않으면 도가 될 수 없다.”[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不足以爲道/41장] 상사에서 하사로 내려가는 단계에서 그들의 행태를 설명할 때 독자의 허를 찌른다. 하사가 문제이기 때문에 문장의 리듬을 흐트렸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앞 문장을 뒤집으면서 문장 전체가 생기를 얻는다. 마지막 문장 때문에 의미가 증폭됐다. 이런 게 문장을 제대로 구사한 솜씨이며 명문이 되는 조건이다. 도를 비웃는데 그를 받아들일 줄 아는 넉넉함이 바로 유머의 본질이기도 하고. 이런 금언은 어떤가. “남을 아는 자는 지혜롭지만 자신을 아는 사람은 총명하다[知人者智; 自知者明]. 남을 이기는 자는 힘이 세지만 자신을 이기는 사람은 강하다[勝人者有力; 自勝者强]. 만족을 아는 사람이 부자이며 부지런히 실행하는 사람이 뜻을 이룬다[知足者富; 强行者有志]. 자기자리를 잃지 않는 사람이 오래가며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장수를 누리는 것이다[不失其所者久;死而不亡者壽].” 유가에서 높이 평가하는 지(智, 지식이자 지혜)에 대한 비판이 이 글에 숨어 있으며 장수가 현세에 오래 사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선언했다. 흥미로운 글이다.   


이런 지혜의 말과 금언을 읽다보면 어느새 양생론(養生論=장생술長生術)이 나오기도 하고(양생술은 방중술[房中術]과 연결되어 인간의 성[sex]에 대한 통찰력 있는 글이 보이기도 하는데 이 부분은 주석가의 글이 훨씬 구체적이다. 이는 후술하기로 한다. 양생술은 한대[漢代] 이후 『포박자』[抱朴子]라는 책으로 집대성된다), 유가와 다른 정치철학이 전개되기도 하며(이때 유가에 대한 패러디와 뒤집기가 인상적이다), 통치술이 이야기된다(한비자가 발전시킨 부분이다). 누군가는 병법(兵法)을 읽어내기도 하며, 어떤 이는 여성성(femininity)을 발견해 생태철학과 함께 논하기도 하며, 누구는 소박함[樸,통나무]을 중심으로 반(反)문명과 문명 비판의 근거를 찾기도 하고 나아가 반폭력·평화주의를 간취하기도 한다. 


‘오천언’(五千言)으로 흔히 불리는 5천 자 남짓의 이 짧은 텍스트는 무엇이기에 숱한 사상의 연원이 되었으며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일까. 『노자』라 하기도 하고 『도덕경』(道德經)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책의 저자가 누구이기에 이처럼 심오한, 깊은 우물 같은 책을 쓸 수 있었을까. 다음 글에서는 저자 노자(老子)에 대해 알아볼 차례다. 


글_최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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