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절대언어와 역사화 사이(5)
역사화, 혹은 어떻게 읽을 것인가
독서, 보편성의 읽기와 역사성의 읽기
독서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니다. 권위에 복종하고 주어진 가치를 흡수하는 숭배가 아니다. 독자는 텍스트를 재구성하고 따져야 한다. 독서는 저항이다. 밖으로는 스마트폰이나 TV를 보지 않고 책으로 달려들기에 외부에 저항하는 행동이며 안으로는 집중력을 쏟아 책의 권위에 짓눌리지 않으려 버티기에 이중의 저항이다. 밖의 저항은 안으로 저항하는 힘에 보탬이 된다. 독서는 전적으로 의지로 밀고 가는 실천이기에 수동적일 수 없으며 자신의 불신을 유예시키기에 적극적인 참여다. 책을 덮으며 읽은 것을 재조립하고 감정반응을 점검하기에 독서는 끝났으되 끝나지 않고 반추되면서 새 독서가 시작된다. 일련의 피드백은 순환하면서 책을 객관화하는 자리를 만든다. 독서 이전의 평가나 의견은 자신 앞에 놓인 거울이 되어 독서이전과 이후의 변화폭을 재는 잣대가 된다.
독서일반론을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독서의 지향점은 어떠해야 하는지 스케치해 본 것이다. 『논어』 읽기를 가져와 설명하는 게 내가 목표하는 독서행위를 거론하는 데 수월할 것 같다. 주자의 『논어』 읽기와 다른 『논어』 읽기를 살펴볼 때 다른 독서가 불러오는 『논어』 이해의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읽어보자.
“섭공이 정치를 물었다. 선생님께서 대답하셨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기뻐하고 먼 데 있는 사람들이 오는 것입니다.’”(葉公問政. 子曰 : 近者說 ; 遠者來/자한[子罕]13-16) 짧은 글에 대한 주자의 해석은 이렇다. “은택을 입으면 기뻐하고 소문을 들으면 온다. 그러나 반드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기뻐한 뒤에 멀리 있는 사람들이 오는 것이다.” 주자는 공자의 말을 부연설명하면서 되풀이한 것처럼 보이는데, 섭공에 대한 배경을 덧붙이지 않았다. 공자의 대답을 섭공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말이 아니라 정치 일반에 적용할 수 있는 합당한 진술처럼 풀었다.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그 행동은 가까운 사람에게 먼저 미쳐야 한다. 초나라 섭공이 당시 어떤 처지였는지 일부러 생략함으로써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보편타당한 말로 보도록 했다. 주자는 간결하게 주석을 작성하면서 공자의 말을 반복해 공자의 타당성을 강조했다.
청(淸)나라의 주석가들은 다르게 해석한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구체성. 섭공은 초나라의 유력자였다. 중앙집권이 강화된 정부의 권세가가 섭(葉)이라는 궁벽한 땅의 수령[尹]으로 오게 된 것이다. 섭(葉)은 원래 채(蔡)나라의 수도였다. 강대국 초나라와 가까워 늘 시달림을 받다가 오(吳)나라와 친해지면서 초나라 국경에서 먼 지역으로 천도하고 섭은 버려졌다. 초나라가 섭을 점령해 자기 영토로 삼은 지 두 해. 섭은 아직 완전히 초나라화(化)되지 못했고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초나라에서도 실력자를 보내 채나라 사람들의 핵심지였던 섭 지역을 평화롭게 만들어야 했다. 섭공이 된 심씨(沈氏)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초나라 수도에 자신의 권력근거가 있었으나 그곳은 멀고 섭을 다스리긴 해야 하나 남의 나라(채나라) 사람들이라 전혀 다른 그들을 설득해 마음을 얻어야 했다. 마음은 멀리 중앙에 있는데 몸은 여기 벽지에서 낯선 사람들을 다독여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던 것. 섭공의 고민은 작지 않았다. 공자도 마찬가지였다. 몇 해 동안 마음에 두고 기대를 품었던 위(衛)나라에서의 구직활동은 무위로 끝났고 공자는 남방의 오랑캐 초나라까지 가서 자신의 꿈을 실현해 보고 싶었다. 초나라 수도까지 갈 길이 멀었으나 초나라 유력자가 섭을 다스린다는 말에 중앙조정과 연이 닿을 수 있는 기회였기에 섭공을 만나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는 일은 중요했다.
섭공의 질문은 간절하다. 어떻게 정치를 해야 합니까? 정치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이 아니다. 그의 질문은 간단하지 않다. 첫째 섭 지역 백성들은 남의 나라 사람들이다. 자신은 이곳에 연고도 권력기반도 없다. 어떻게 이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가. 두 번째 나는 이곳을 잘 다스릴 결심은 했지만 여기에 머물지 않고 중앙정부로 돌아가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정치방안이 무엇인지를 물은 것이다. 두 가지 사안을 담은 섭공의 질문은 보완되는 것일 수도 있으며 모순되는 일이기도 했다. 섭 지역을 잘 다스리면 실력을 인정받아 섭의 수령으로 주저앉을 위험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섭 지역 안정에 실패할 경우 중앙정부에서의 위상은 이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예측은 섭공의 기우가 아니었다. 초나라는 법가주의(法家主義)를 채택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기 때문에 치적에 실패할 경우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할 게 명백했다.(때문에 섭공은 법 객관주의와 유가의 온정주의적 견해가 충돌하는 유명한 문답을 한 차례 공자와 주고받는다.)
섭공의 질문에 공자의 대답은 간결하다. “근자열, 원자래”(近者說 ; 遠者來). 공자는 섭공의 딜레마를 간파했다. 그대가 우선 할 일은 채나라의 백성들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장 괴로워하는 문제를 푸십시오. 당신의 정치가 좋은 성과를 내면 멀리 중앙정부에서 당신을 찾아올 것입니다. 원자래(遠者來)는, 다른 지역에서도 당신이 다스리는 땅에서 살려고 소문을 듣고 백성들이 찾아올 것이고 궁극적으로 당신이 원하던 대로 될 것입니다, 라고 읽어도 무방하다.
공자의 대답이 훌륭한 까닭은 섭공의 시급한 질문에 대한 멋진 처방인 동시에 자신의 평소 생각과 배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자의 대답은 유가의 가족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다. 후대에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로 요약되는, 가족의 확대가 정치라는 사상(가족을 중심으로 동심원으로 퍼져가는 사고의 틀)이 잠재된 말이다. 근(近), 가까운 곳에서 출발해 원(遠), 먼 곳에 이르는 사고는 “하나로 꿰는”[一以貫之] 연쇄적 사고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섭공의 복합적인 질문에 공자 역시 겹으로 된 답을 준 것이다.
주자의 해석과 청나라의 해석에는 차이가 있다. 주자가 보편성을 지향했다면 후대의 주석은 공자 당대의 역사성에 주안점을 두었다. 둘 사이의 차이는 지향점이 다르다는 점에 눈길이 가는데 역사성을 강조한 독법에는 주자의 해석을 협소화했다는 비판이 따라올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보편성의 파기와 역사성의 복귀라는 결과가 아니라 역사성을 추구한 해석에 담긴 도전정신이 아닐까. 나는 도전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청대의 해석학을 실증학으로 부르면서 증거를 대고 증거를 토대로 확실성을 추구한다고 평범하게 말할 수도 있다. 청대해석학은 속화된 주자학의 관념주의에 대한 도전이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비판적 읽기를 시도했기에 의의가 크다. 뜬구름 잡는 공언(空言)은 말할 것도 없고 형해화된 권위에 의탁하는 맹목적 독서와 타성에 대한 질타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비판적 읽기의 어려움
경전 혹은 고전에 대한 무의식적 추종 내지는 투항적 존경은 글 읽기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화석이 된 전통을 의심으로 뚫고 다시 읽기를 감행했기에 다르게 읽기를 성취할 수 있었다. 여기에 간과할 수 없는 당시의 지적 환경 혹은 물적 토대가 있었음을 지나쳐선 안 된다. 활발한 출판문화가 청대에 번성하면서 온갖 서적을 구해 볼 수 있었고 서적들 간의 비교·대조·참조를 통해 권위를 가진 책들을 검토할 여건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청대의 작업은 송대(宋代)에 유행했던 경전의심[疑經]의 전통을 철저하게 재현했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가 있다.
이는 현재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동서고금의 많은 책들을 부지런히 참고해 읽으면 자기만의 독서와 비판적 안목을 기를 수 있는 조건이 어느 때보다 유리하기 때문이다. 책이 많다는 사실이 장점으로 활용될 수 있는 호시절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안타깝게도 비판적 읽기와 저항의 독서가 뜻대로 관철되는 것만은 아니다. 역사성을 바탕으로 초월적으로, 초역사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 읽기를 끊어야 한다고 전하기는 쉽다. 허나 『논어』에는 보편적 읽기에 몸을 맡기고 싶은, 바닥을 알 수 없는 말도 적지 않기에 비판적 독서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내가 좋아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다음 구절이다. “선생님께서 냇가에서 말씀하셨다.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으로 쉬지 않는다.’”[子在川上曰 : 逝者如斯夫, 不舍晝夜/자한子罕 9-16] 이 말은 차라리 시가 아닐까. 공자는 흐르는 물을 보고 “간다”(逝者)고 사실을 말한 다음 “밤낮으로 쉬지 않는다”고 느낌을 말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의미가 있기나 할까. 늙음에 대한 한탄인가. 흐르는 물과 시간을 병치시켜 덧없다는 느낌을 갖도록 한 말일까. 물을 보고 흐른다는 단순한 사실을 그냥 진술한 것일까.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혼자?) 한 말인지 어떤 정보도 없다. 도덕적 지향이 담겼을까. 느낌이 구체화되어야 할 텐데 어디에도 단서를 찾기 힘들어 음미해야 할 바를 알 수가 없다. 해석하기가 난감하다. 독자는 무언가 느낌이 있음을 명확히 감지하나 무엇인지 집어 말할 수 없기에 당혹감이 생긴다.
주자는 “천지의 조화”(天地之化)를 주어로 해서 “도의 본체”(道體)의 구현으로 이 말을 해석했다. 흐르는 물을 우주의 조화가 담긴 철학적 언술로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흐르는 물이 그치지 않듯 배우는 사람들도 끊임없이 성찰하고 배우기에 매진하기를 권한 말이라고 읽었다. 흐르는 물에서 도(道)를 깨달았다고 보고 학문에 진력하라는 수행적 언어(performative language)로 파악한 것이다. 성리학자다운 말이라 하겠다. 하안의 『논어집주』를 설명하면서 황간은 물이 흐르듯 시간이 흘렀는데도 도가 흥하지 않음을 한탄하는 당시 사람(위진남북조)의 말을 인용했다. 한(漢)나라 때나 그 이후까지 사람들은 흐르는 물을 흘러가는 시간의 은유로 읽고 의미를 붙였던 것이다. 덧없음에 대한 비감(悲感)이 스민 말로 이해한 것이다.
성리학자들의 철학적 읽기이건 한나라 사람들의 혹은 문인들의 글에서 흔히 보는 덧없음에 대한 문학적 읽기이건 어느 것으로 읽어도 동조하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 힘든 빼어난 해석이다. 흐르는 물에서 수행적 언술을 추출해 내는 안목이야말로 고도의 지적 행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논어』에는 이런 진술이 산재한다. 여기에 고유명사(인명이나 지명) 혹은 어떤 시기인지에 대한 정보 한마디만 주어져도 보편적 읽기에 저항할 발판이 마련되련만 그렇질 못하다. 덕분에 철학적 읽기와 문학적 읽기의 두 흐름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해지는 두 갈래 읽기가 역으로 지금 이 말을 읽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평범한 마음으로 글을 읽는데 어려움을 준다. 이럴 경우 어떻게 텍스트를 읽을 것인가. 종잡을 수 없는 말에 굵은 전통이 붙어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적 독서
독서는 순수한 읽기일 수 없다. 백지상태에서 읽을 수 없다는 말이다. 어떤 텍스트를 읽든 텍스트를 손에 쥔(선택했다는) 행위 자체가 그 책에 대한 정보를 어디선가 얻은 것이고 어떤 정보이건 그 정보를 통해 독자는 기대를 갖게 마련이다. 정보를 통한(무의식적인) 기대의 형성을 기대지평이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하는 모양인데 독자가 책을 읽는 행위에는 기대지평이 전제될 수밖에 없고 좋은 독서란 기대지평을 넓혀 주는 활동이기도 하다. ‘새 지평을 연다’(open the new horizon)는 영어표현은 이를 가리킨다. 고전의 경우 독자의 기대지평이 클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기대지평을 넓게 가져도 한 뼘 더 지평을 열어주기에 고전이다, 라는 현문현답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독자의 기대는 권위적인 정보, 고전이라는 이미 주어진 정보에 의지하기에 생기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독자의 기대는 수동적으로 형성된 것이고 독서 이후의 넓어진 지평도 권위를 재확인하는 데서 오는, 추인을 새 지평이 열렸다고 착각하는 게 아닐까.
사정이 이렇다고 한들 나는 원칙론으로 대응한다는 사실이 맘에 걸린다. 고전을 읽건 경전을 읽건 역사성을 염두에 두고 독해해야 보편성에 저항하는 비판력이 생긴다. 이것이 내 원칙이다. 보편성의 마비력, 비판을 무디게 하는 권위적 언사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강조점은 비판에 놓인다. 비판적으로 읽고 비판적으로 사고해야 자기만의 힘이 생긴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고도 실제 실천하기 어려운 공자의 말이 튀어나오자 주춤한다. 질문이 다시 돌아온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 다시 원칙론으로 대응한다. 독서는 독자를 편하게 만들지 않아야 한다. 불편하고 이질감을 느끼게 하고 자극하고 괴롭게 만드는 행위가 책읽기다. 나는 그런 실천을 비판적 독서라 했다. 일체의 권위와 두꺼운 역사와 대단한 전통을 죄다 괄호 속에 넣고 텍스트에 대한 정보를 의심하며 읽기. 나는 그걸 역사성이라 불렀다. 단어에는 단어의 삶과 역사가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비판적 독서와 역사성의 개입을 피하며 무화시키는 텍스트와 늘 부딪친다. 절대언어가 바로 따라 붙는다. 질문이 다시 파고든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인상적인 글이 있다. 『공자가어』를 두고 위서(僞書)네 아니데 말이 많지만 후한말(後漢末) 공자의 전설이 집대성된 자료로 읽으면 공자에 대한 후대사람들의 이미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뛰어난 담론집이기도 하기에 가치가 작지 않은 책이다. 공자는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사이에서 곤경에 빠져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된다. 괴로운 지경인데도 공자는 악기를 연주해 노래를 부르며 흔들리지 않는다. 자로는 분노한다. 착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준다는데, 덕을 쌓고 의(義)를 품어 실행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어떻게 이렇게 궁할 수 있단 말인가. 공자는 자로에게 말한다. “깊은 숲속에 피는 지초와 난초는 사람이 없다고 향기를 내지 않는 건 아니다”[芝蘭生於深林, 不以無人而不芳].
독서는 쉽지 않다. 비판적 독서는 더 어렵다. 더 공부해야 하고 더 참고해서 따져봐야 하기 때문이다. 주어진 대로 읽고 권위 있는 분들의 말을 따라 읽는 게 속 편하고 지식이 늘며 주류(主流)가 되는 길인데 무엇하러 혼자 샛길로 빠져 공연한 짓을 하는가. 그렇게 한들 많이 공부한 분들, 전공자를 이길 수 없고 그들을 경유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인데. 옳은 말이다. 그럼 대체 어떻게 읽으란 말인가?
공자는 안 될 가능성이 큰데, 계속 실패하기만 했는데 왜 포기할 줄 몰랐을까. 설령 공자 자신의 계획이 실행됐다 한들 공자에게 보상과 대가가 주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 공자 자신이 보상과 대가를 바라지 않을 수도 있는데 왜 자기의 이상을 버리지 못했을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 길을 걷는 공자의 어리석음은 지초와 난초로 형상화되었다. 아름답지만 외롭고 슬픈 말이다. 많이 배우고 공부한 사람일수록 그에 비례하는 결과가 주어지는 게 당연한 세상에서(자본주의는 투자 대비 그에 상응하는 혹은 그 이상의 결과가 제도화된 사회다) 공자를 읽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 그럼에도 그를 읽고, 읽는 데서 수긍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려 발버둥 친다. 비판적으로 사고하자고 동지를 구한다. 어리석은 짓이다. 어떻게 읽을 지 계속 불안해하면서. 숲 속에 홀로 핀 꽃들을 생각하면서.
글_최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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