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목소리, 시인의 언어와 철학자의 언어(3)
『노자』의 판본_1
『노자』의 판본
현재 볼 수 있는 노자 판본은 다섯 종을 거론할 수 있다. ①왕필본 ②하상공본 ③상이본 ④백서본 ⑤곽점본. 이외에도 거론되는 판본이 없는 것은 아니나 대표적으로 이 다섯 가지가 노자 판본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판본이 중요한 까닭은 시대순으로 보았을 때 고본(古本)을 확정하면서 텍스트의 성립을 알 수 있고 이를 토대로 다른 중요 텍스트와의 관계를 따지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자의 경우 다른 텍스트에서는 보기 힘든 다양한 판본은 간단치 않은 문제를 제기한다. 다섯 가지 판본이 일관된 체계를 가지고 연결돼 있는지 계열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전혀 다른 성격의 글도 아니어서 텍스트의 이동(異同)은 미묘한 파동을 일으킨다. 먼저 각 판본의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전반적인 문제를 생각해보자.
① 왕필본.
시중에 가장 널리 통용되는 노자 판본은 왕필(王弼)이 주석을 단 텍스트다. 시기로는 가장 늦게 완성돼 위진남북조 시대에 해당한다. 위(魏)나라 정시(正始)년간(240~249)을 통상 위진현학(魏晉玄學)의 발생기로 보는데 왕필은 226년에 태어나 249년에 세상을 떠났다. 스물 세 해를 세상에 머무는 동안 『주역』(周易)에 주석하고 『노자』에도 주석을 달아 후대에 깊은 영향을 끼쳤으니 천재라는 말을 들을 만도 하다. 위진현학을 논할 때 ‘삼현경’(三玄經)이라 해서 『노자』, 『장자』(莊子), 『주역』을 기본 경전으로 삼아 사상과 논리를 구사한다고 얘기한다. 이 말은 위진시대 학풍이 이전 시대 한나라에서 성했던 유학의 학풍과 다르다는 차별을 강조하기 위해 차이를 과하게 적용한 혐의가 없다고는 할 수 않다. 예컨대 논어 연구에 귀중한 문헌이 하안의 『논어집주』(論語集註)다. 하안은 왕필과 동시대인으로 왕필을 잘 알고 그의 재주를 아꼈으며 『논어집주』도 이 시기에 나온 것이다. 하안의 『논어집주』에 대한 평(評) 가운데 위진현학의 기풍이 강하다는 통설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나 위진시대를 현학의 시기로 보고 현학을 기반으로 『논어』를 해석했다는, 비유학적(非儒學的) 접근이 『논어집주』에 투영됐다는 설명인데 검토해 보면 신뢰하기 어려운 말이다. 하안과 왕필은 『주역』을 중시해서 『주역』의 세계관과 철학으로 각각 『논어』와 『노자』를 주석했다. 남아 있는 글은 많지 않지만 왕필이 『논어』 주석을 남겼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주역』이 공자가 남긴 글이라는 게 일반적 인식이었기 때문에 『주역』에는 이미 유학적 가치가 깊이 담겨 있었다. 현학의 토대가 도가(道家)이기도 하지만 유학적 세계관이 고갱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바꿔 말하면 현학이라 해도 유학적 세계관에서 통섭한 학풍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무게를 둘 수도 있다. 시대를 구분하면서 각 시대의 학풍과 문학사조, 사상, 종교 등을 구분하는 작업은 늘 존재했고 손쉬운 설명방식이긴 하나 놓치는 부분도 많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왕필본은 노자를 전체 81장을 상하로 나누어, 상편은 1장~37장, 하편은 38장~81장까지이다. 상편에 해당하는 부분을 ‘도경’(道經), 하편을 ‘덕경’(德經)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노자』를 ‘도덕경’이라 하는 것도 상하편의 편명을 합쳐 부르는 데서 왔다. 아예 『노자 도덕경』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유명한 1장이, “도를 도라고 이름할 수 있다면 상도(常道)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라는 말인데 책 전체의 전제를 설면하면서 언어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 주어 널리 알려진 말이면서도 난해하다. 1장의 말이 도를 전면에 내세웠기에 ‘도경’이라 부른다. 하편이 시작되는 38장은 “최고의 덕은 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덕이 있다”(上德不德, 是以有德)으로, 덕을 강조하는 말로 시작하기에 ‘덕경’이라 부른다. ‘도경’과 ‘덕경’의 분류는 편의적인 게 아니다. 상하편으로 나눈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는데 ‘도경’은 언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포괄적으로 던지고 시작한 데서 감지할 수 있듯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글이 주류다. ‘덕경’으로 불리는 하편은 ‘도경’에 비해 실천적인 면이 강해서 통치철학과 관련해 읽을 수 있는 부분이 대다수다. 왕필본이 상편-도경을 앞에 두었다는 점은 그의 관심이 어디 있는지를 가늠케 한다.
현재 통행되는 노자 텍스트는 왕필본, 정확히는 왕필주석본이다. 『노자』를 읽는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왕필주석본을 읽는다는 말과 동의어다. 왕필본이 중요한 것은 그의 주석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편의상 판본으로 다루었지만 그의 주석을 읽어야 왕필의 진가를 알 수 있다. 주석에 대해서는 후술하기로 한다. 왕필이 주석 작업을 할 때는 『노자』의 어떤 특정 판본이 이미 주어진 상태였다. 노자는 한나라 이전에도 존재했기에 왕필 이전에도 『노자』를 읽었다는 뜻이고 많은 경우 왕필이 읽었던 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왕필은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텍스트로 작업을 했고 그 텍스트는 한나라 때 유행하던 텍스트였다. 하상공본이 그것이다.
② 하상공본(河上公本).
하상공본에 대해서는 성립 시기를 두고 전한시기까지 올려보는 사람이 있고 후한시기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있다. 하상공이란 인물을 알 수 없어서 생긴 현상이다. 요컨대 왕필본보다 앞선 시대의 텍스트란 말이다. 하상공본이 귀중한 까닭 역시 주석에서 특징이 도드라지기 때문인데 판본으로서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하상공본도 81장을 네 파트로 구분했다. 권1은 1장~16장, 권2는 17장~37장, 권3은 38장~59장, 권4는 60장~81장이다. 특이한 점은 각 장마다 두 글자로 제목을 붙였다는 사실이다. 1장은 체도제일(體道第一)이라 했고(왕필은 이 판본으로 작업했을 가능성이 큰데 1장 본문은 왕필본과 차이가 없다) 왕필본의 덕경이 시작되는 권3의 37장은 법본제삼십구(法本第三十九)이라 했다. 38장에는 본문글자가 다른 게 보인다. “是以侯王自謂孤寡不穀”(이 때문에 제후와 왕은 스스로를 고, 과, 불곡이라 부른다)라고 왕필본에 보이는데 하상공본에는 불곡(不穀)이 불곡(不轂)으로 되어 있다. 의미에 약간 차이가 있다. 왕필본의 불곡(不穀)은 곡(穀)이란 글자가 선(善)과 같은 뜻이어서 왕이 자신을 ‘착하지 않다’고 말하는 겸사의 의미가 드러나 고(孤)나 과(寡)라는 말과 동일 차원의 의미맥락임을 알 수 있다. 하상공본의 불곡(不轂)은 용례가 없는 말이어서 알기가 쉽지 않다. 하상공이 주석을 붙여 해명하는 수밖에 없다. 하상공이 주석을 붙인 작업은 판본 문제를 넘어 주석과 관련되므로 그 때 다시 언급하기로 하자.
한 가지 의문점은 남는다. 과연 왕필이 본 게 하상공본일까. 여기서 하상공본이라 하상공주석본을 말하는 게 아니라 본문을 말하는 것이다. 왕필이 하상공본을 저본으로 삼았다면 간간이 보이는 글자 차이는 왜 생기는 것일까. 미세한 차이지만 글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왕필이 하상공본과는 다른 판본을 봤다는 걸 나타내는 것일까. 아니면 불곡의 경우처럼 문맥이나 글자가 이상해 볼일 때 교정이나 가필을 한 것일까. 후대 사람이 글자를 고치거나 손대는 일은 원전 훼손이 아니라 으레 할 수 있는 당연한 작업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트집 잡아서는 안 된다. 몇 곳에 보이는 글자뿐 아니다. 왕필본에 하상공본과 같은 식의 제목이 없고 총 권4로 나눈 것을 상하로 편집한 것으로 판단한다면 왕필이 다른 판본을 보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다. 텍스트의 전승과정은 글자 차이를 두고 이렇게 설명하거나 저렇게 설명하는 추론을 뛰어넘는 기회가 생기기도 하는지, 노자가 드라마틱한 예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들어 노자의 텍스트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③ 상이본(想爾本).
문헌으로만 전해지고 실물은 사라졌던 상이본이 1900년 중앙아시아 돈황(燉煌)의 막고굴에서 발견된다. 상이본은 주석본을 가리킨다. 이 역시 주석을 조명하는 부분에서 거론될 것이므로 간단하게 체계와 차이를 얘기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당나라 때까지 제법 유행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상이주(注)는 한나라 이후 독자층이 상당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상이주는 후한의 오두미도(五斗米道)라는 도교계통의 종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상이주는 오두미도의 경전(經典)이었다. 노자의 주석본이 경전이라는 사실은 상이주는 읽는 키워드다. 노자 텍스트의 어떤 면이 종교교단을 형성하는 데 자극을 주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상이주가 종교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상이주를 흔히 도교(道敎) 텍스트로 보는 경향이 있다. 다른 텍스트는 도가(道家)로서 학문적 대상이라고 한다면 상이주는 종교 영역에서 다루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를 말한다. 동일성이 유지되는 텍스트를 유가, 도가, 법가처럼 학파(school)로 보는 관점과 종교(religion)로 나눠보는 접근이 옳은지 자신할 수 없으나 고대의 학파 중심으로 제도교육과 아카데미즘이 형성된 현행체계는 어떤 면에서 배제와 폭력의 원리가 작동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상이주가 많이 알려지지 않은 까닭도 ‘특정 종교’의 경전이라는 종교에 국한된 사고가 작동해서 관심의 폭이 좁아진, 그리고 타의에 의해 좁혀진 탓일 것이다.
상이주본은 오두미도와 성립 시기가 일치하므로 후한으로 시기를 확정할 수 있다. 하상공은 확신할 수 없어도 욍필이 상이주본을 보았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안타깝게도 상이주 돈황본은 상권(도경)만 전하는 낙질본으로 3장 일부부터 37장까지만 남아 있다. 왕필본과 비교해 보면 글자 출입이 적지 않다. 3장만 보더라도 왕필본은, “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성인의 다스림은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운다)라고 했는데 상이주는 “聖人治, 靈其心, 實其腹”(성인의 다스림은 마음을 허령虛靈하게 하고 배를 채운다)이라 했다. 크게 의미 차이는 없다. 상이주본은 세 글자씩 규칙적으로 썼는데 외우기 편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6장에서도 왕필본은 “玄牝之門, 是謂天地根”(아득한 암컷의 문을 하늘의 뿌리라 한다)이라 했는데 같은 문장을 상이주본에서는 “玄牝門, 天地根”이라 했다. 상이주는 허사를 비롯한 기능어에 무심한 경향이 있다고 할까. 전체적으로 왕필본이 읽기 수월하다. 왕필본도 보조어와 허사를 최소화했지만 상이주본과 비교하면 연결어들이 곳곳에 포진해 독해를 도와주기 때문이다.
세 가지 판본을 비교해 보자. 상이주본과 하상공본이 공존했다면 왕필은 두 가지 판본을 다 보지 않았을까. 전체적으로 세 텍스트는 큰 차이가 없다. 글자 출입이 보이기는 하지만 전통시대 글쓰기 관습에 비춰볼 때 용인할 만한 수준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상공본이 체계면에서 볼 때 특이하다면 특이해서 소제목을 붙이고 4권으로 나눴다. 상이주본과 왕필본은 텍스트를 상하로 나눴고 글자 차이가 좀 더 눈에 띄긴 하지만 역시 완전히 다른 판본이었다고 판정하기엔 주저된다. 그렇다면 세 가지 판본은 동일 계열의 어떤 판본이 주석가의 손에 의해 조금씩 변한 것이고 당시의 관습에 따라보자면 허용할 수 있는 범위라고 잠정적으로 결론내릴 수 있으므로 통일되고 균질한 오리지널 텍스트를 상정해도 괜찮은 것일까.
아직 고려해야 할 두 개의 텍스트가 더 남았다. 그리고 텍스트는 일부만 복원할 수 있지만 반드시 곁에 두고 보아야 할 중요한 참고 문헌이 있으므로 다음 글에서 이 전체를 아우르고 나서 판본문제를 정리하도록 하자.
글_최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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